2024,April 25,Thursday

어긋난 조선의 개혁

지난 이야기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꿈꾸며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유교국가를 건설 하고자 했던 조광조는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 시키고자 무리한 개혁을 시도하다 제거됩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 수십명이 희생 되었으나 그 후로도 조광조 인맥들을 제거합니다. 이렇듯 기묘사화 후 오랫동안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건만 사림파는 더 많은 학자들은 배출합니다. 조광조는 죽었으나 조선은 성리학 국가로의 뿌리를 내리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조광조의 성리학 연구는 주변 사림파 선비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퇴계 이황, 기대승 등 뛰어난 후배들이 조광조를 흠모하고 그의 이론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16세기 말 조선은 성리학 국가로..

원상 복구된 조광조의 개혁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의 정책들이 폐기 되는 사례가 많듯이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전부 원상복구 됩니다. 소격서 부활, 현량과 폐지, 위훈삭제 취소로 공신들의 특권이 회복 됩니다. 또한 기묘사화 3인방 남곤 심정 홍경주는 권력을 독식합니다. 그러나 기묘사화의 주역은 중종이므로 기묘사화 3인방의 영향력은 이전의 중종반정 때의 반정 3대장 보다 훨씬 미약 합니다. 기묘사화 3인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조광조 인맥을 차근차근 제거합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기준(기대승의 숙부), 김식 등 뛰어난 사림파 학자들이 중종에 의해 죽습니다.

하지만 조광조의 성리학 연구는 주변 사림파 선비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퇴계 이황, 기대승 등 뛰어난 후배들이 조광조를 흠모하고 그의 이론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16세기 말 조선은 성리학 국가가 됩니다. 조광조가 꿈꾸던 이상향이 조광조 사후 반세기(50년) 지나서 실현되기 시작 합니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상국가는 권리와 의무는 함께한다는 동반 원칙을 무시하고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는 백성들과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는 양반 즉 양반들의 국가가 뒵니다. 즉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측면이 있습니다. 조선 초 평민들이 누렸던 권리는 사라지고 의무는 계속 늘어납니다. 내용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발전된 성리학 연구와 서원의 대두
김종직을 필두로 시작된 성리학 연구는 조광조를 거쳐 발전을 거듭 합니다. 조선건국 후 백년간은 은둔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했고 이후 사림파의 현실 참여가 시작됩니다. 백년간 연구한 이론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접목하다가 사림파가 참화를 당한 사건이 4대사화 입니다. 수백 명이 죽어 가면서도 계속 정계 진출을 꾀한 이유는 선비는 벼슬 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성리학의 사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조광조의 학풍에 동화된 사림파는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합니다. 서원의 설립은 성리학 보급을 위한 첫 단계 사업입니다. 풍기군수 주세붕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설립합니다. 나중에 퇴계 이황이 주세붕의 후임으로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 서원의 사액을 요청합니다. “사액” 이는 임금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한 것 입니다. 이에 명종은 소수서원이라 이름 짓고 토지 (사원전) 하사, 면세, 면역의 특권을 내립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수서원은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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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에 관한 야사 하나 소개 하겠습니다. 처음에 소수서원은 서자와 평민의 자제들도 입학이 허용되고 학비와 기숙사 비용이 무료이니 소수서원에 입학을 원하는 선비는 넘쳐납니다. 조용하던 소백산 자락의 마을이 갑자기 붐비고 사람이 많다 보니 사건도 생기는데, 동네 처녀와 서원 유생은 정분이 생겨 처녀는 임신을 합니다. 조선시대에 처녀가 임신을 했으니 큰일이 났습니다. 이에 서원 유생은 꾀를 부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제월교를 지나 갈 테니 그대는 아이를 다리 밑에 놓아 두시오 어머니가 아이를 거둔 후 그대를 아내로 맞이 하겠소”
과연 청년의 말대로 다리를 지나가다 아이 울음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고 후에 청년의 혼담 이야기가 있을 때 청년은 마음에 둔 처녀가 있다고 하여 아이의 엄마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다리 밑에서 주어온 아이를 양자로 입적하여 기릅니다. 신부는 주어온 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펴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실이 밝혀져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유명한 말이 생깁니다. 제월교 일명 청다리라고도 하는데 변형되어 똥다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즘도 부모들이 어린 아들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게 된 말의 근원입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형편없었다.
어떠한 제도라도 좋은 의미로 시작하여 끝이 나쁜 경우가 많습니다. 서원이 대표적인 사례 입니다. 처음에는 평민들의 입교를 허락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은 신분 차별이 많지 않았고 또한 향교 (현재의 중등 교육과정) 입학 자격이 신분제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점차적으로 평민들의 교육 기회는 사라집니다.
조선건국 후 평민들은 납세, 병역, 부역 등의 3대 의무를 지고 교육과 과거에 응시할 권리를 부여 받았는데 100년 후 성리학이 정착 하면서 일반 백성들의 권리는 사라지고 의무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 원인은 사림파입니다. 사림파는 “인간의 신분은 하늘이 정한 법도 이므로 인간이 바꿀 수 없다. 양반과 중인 평민 천민은 각자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라는 조광조도 성리학의 법도는 하늘의 법칙이라 여겼으나 인을 베풀어 하인들을 따뜻하게 대했고 그러한 행동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분제는 엄격히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자가 시대를 역행했다는 표현은 100년 전보다 더 퇴보된 신분제도를 정착 시켰다는 의미 입니다. 게다가 신분상승 기회를 원천봉쇄 합니다.

신분제도와 더불어 기술문명의 천시 풍조도 동시에 일어납니다. 세종대왕의 과학정신은 사라지고 성리학 법도인 강상의 법도는 법 위에 존재 합니다. 조선초 임금과 달리 16세기 3대 군주 중종, 명종, 선조는 백성 보다 자신의 옥좌를 지켜주는 사대부가 중요했고 민생보다 사대부의 이념인 성리학이 중요했죠. 이렇게 16세기 성리학은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정착합니다.

조선초 국가 통치와 백성들의 삶 향상을 위해 학문을 활용한 측면이 많았으나 점차 변형되어 갑니다. 양반이란 신분은 조선 초기에는 없던 신분제도 입니다. 문관 무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을 칭하던 용어가 신분제도로 변한 것 입니다. 조선 초기의 신분제도는 “양천제” 입니다. 즉 평민과 천민 두 계급만 존재 했습니다. 물론 평민들 중 벼슬을 가진 사람들은 양반이라 칭하며 우대 했습니다. 또한 평민들도 직업에 의한 차별을 둡니다. 농민 공인 상인 세부류로 나누어 상인들을 제일 천시하는데 조선의 직업분류인 “사농공상” 입니다. 상인들을 극도로 천시한 이유는 상업에 의한 자본의 축적은 권력화 되어 양반들의 권력 독점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 편에서 다시 설명 하겠습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전량제도”
“전랑제도” 이는 선조 때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제도입니다.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의 결과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집니다. 본 칼럼의 제목처럼 “4색 당파”의 출발입니다. 미리 예습하면 선조 때 일어나는 당파 싸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전랑제도는 5백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조선의 제도입니다. 중국과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부러워한 제도입니다. 쉽게 풀어서 설명 드리면 “전랑”은 문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정랑 1명과 이조좌랑 2명, 그리고 무관의 인사권을 가진 병조정랑 1명, 병조좌랑 2명 등 총 6명 전체를 “전랑”이라 부릅니다. 다른 말로 “낭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전랑제도는 조선건국 후 정도전의 건의로 만든 제도입니다. 전랑은 6품 이하 관료들의 인사(승진 및 부서 이동)를 고위직의 중간결제 없이 독자적으로 행사하고 국왕에게 직보하고 승인을 받는 제도입니다. 국왕과 고위직의 권력을 동시 견제하는 제도입니다. 이러한 요직을 고위직에 있는 대신 혹은 국왕이 임명하면 의미가 퇴색되므로 전랑들은 부서 이동을 할 때 후임자를 추천하는 전랑자천제 (스스로 추천 한다는 뜻)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6명의 전랑 자리를 “청요직”이라 부르며 영광스러운 자리로 생각했습니다. 정승 판서 보다 청요직을 배출한 가문을 더 존경했으니 조선시대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청요직 중에서 이조정랑 자리가 으뜸이니 정 5품의 낮은 관직이지만 서로 경쟁이 대단합니다. 정승은 양보해도 이조정랑은 양보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됩니다.
전랑제도는 조선 초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림파가 등장하는 16세기 정착합니다. 이렇듯 사림파는 합리적인 사고로 좋은 제도를 정착 시켰으나 정권장악 후 요직을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당이 쪼개지고 갈라집니다. 결국은 사림파의 분열이 4색 당파를 만들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
신하들의 도움으로 등극한 중종은 항상 신하를 통한 간접 정치를 합니다. 조광조 사후 등장하는 김안로 그리고 명종의 등극과 “을사사화”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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