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June 3,Wednesday

‘에티카’(1) – B. 스피노자

1656년 24살의 한 청년이 유대교회당의 장로들에게 호출되었다. 그들은 그 청년에게 물었다. “그대는 친구에게 ‘신은 육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는가? 또 ‘천사는 환상일지 모른다’라고 말했는가? 그리고 ‘영혼은 죽으면 사라지는 단순한 생명일지 모른다’라고 말했는가? 대답하라.” 우리는 이 청년이 뭐라고 답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아는 건 겉으로라도 교회와 신앙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면 5백 달러의 연금을 주겠다고 한 제의를 그 청년은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해 7월 27일 헤브라이 종교의식에 따라 이 청년은 파문을 당했다. 파문의 의식은 다음과 같이 행해졌다.

“저주의 말이 읽혀지는 동안 이따금 커다란 뿔피리가 길게 꼬리를 끄는 처량한 소리를 냈다. 식이 시작할 때 환하게 타던 등불은 식이 진행됨에 따라 하나씩 꺼져 마침내 모든 등불이 꺼졌다. 파멸된 자의 영적 생명도 이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마침내 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 남겨졌다”

도대체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저주가 끊임없이 파문자에게 내려졌을까? 반 블로텐이라는 학자가 이 날의 파문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 일부를 보도록 하자.

“고하노라. 교법회의는 일찍이 이 자의 나쁜 견해와 소행을 충분히 확인하고 모든 방법을 다 해 나쁜 길에서 그를 계도하려 애썼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노라. 이제 많은 증인들 앞에서 장로들은 이 자의 유죄를 인정하노라…이자를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적하여 영원한 벌에 처하노라…파문하고 저주하여 추방하노라…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으며 잘 때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받을 지어다…주의 노여움이 지금부터 그 위에 임하여 모든 저주가 그를 압박하여 그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실 것이다…. 이로써 각자를 훈계하노라. 누구나 그와 입으로 말을 주고받지 말고, 글로써 그와 의사를 주고 받지 말라. 아무도 그를 돌보지 마라. 아무도 그와 한 지붕 밑에 살지 마라. 아무도 그에게 접근하지 말고, 누구도 그가 입으로 전했거나 글로 쓴 문서를 읽지 마라”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칼럼에서 재인용 함)

아들이 뛰어난 학자가 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누이동생은 그를 업신여기고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빼앗으려 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한 흉한은 이 젊은이에게 단도를 들고 덮쳤다. 몸을 피해 다행이 목에 작은 상처를 입는 것으로 모면할 수 있었지만 위험은 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족 전체의 버림을 받고 가족과 떨어져 그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아야 했다. 고독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평온한 용기로 이 고독을 받아들였다. 테러사건 이후 그는 암스테르담 교외의 아우델게르크의 조용한 다락방으로 옮겨 살았다. 이 청년의 이름은 바르흐 데 스피노자다. 파문이라는 시련은 스피노자로 하여금 그저 촉망 받는 유대의 신학자로 살아갈 인생을 ‘근대의 가장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로 살아가게 도약시켰다. 고독이 그를 위대하게 했다.

고독과 시련을 겪으면 사람들은 매우 표독해지거나 반대로 매우 온순해 진다. 스피노자는 다행히 매우 다정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하숙집 주인부부도 그의 온화함을 좋아했다. 그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렌즈를 연마하였다. 이것은 그가 유별나게 가난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학자들은 면학을 통해서만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학자라면 생계를 유지할 기능직을 익히게 했던 유대율법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직업을 가지지 않은 학자는 결국 부랑인이 되어 사회에 짐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한 푼도 남길 수 없이 조촐하게 살았지만 그는 행복했다. 한 번은 이성보다 신의 계시를 믿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내가 자연적 오성으로 수집한 결과가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 자체가 유쾌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나날은 탄식과 슬픔 속에서가 아니라 평화와 밝음과 환희 속에서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죽은 개만큼’ 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모든 철학에 스며들었다. 어떤 학파도 만들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베르그송의 ‘생의 비약’으로 이어졌다. 그가 죽은 다음 200년이 지난 다음 헤이그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고독은 그의 생을 넘어서야 풀어지게 된 것이다.

그의 생전에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스피노자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에 굶주리며 자신의 사유를 넓혀갈 때 당시 대영제국의 장관급 고위관리가 스피노자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대를 만날 수 없고 데려올 수도 없지만 나에게 하나만 알려 주시오.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만이라도 알려주시오.” 세계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이 파문 당한 안경기술자에게 너의 생각을 조언해 달라며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생각, 관념, 사유, 철학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날고 긴다는 권력과 철학자들이 그에게 열광했을가? ‘철학자들의 메시아’로 불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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