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October 1,Thursday

History of Street name (2)

베트남은 정부는 일정한 작명 원칙과 기준에 따라 각 도시의 거의 모든 거리 이름이 베트남의 영웅들이나 애국선열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도시마다 서로 같은 거리 이름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적인 사실들을 요약 조명하여 1군을 시작으로 다루어본다. 우리나라는 숭배하지 못하여 부럽기까지 하는 베트남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록해보자.

한 나라의 강토는 그 나라의 영웅이 몸을 바쳐서 장엄하게 해 놓은 것이며,
한 나라의 민족은 그 나라의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신은 산같이 우뚝 높고, 그 은택은 바다같이 넓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나라의 영웅을 그 나라 민족이 알지 못하면,
그 나라가 어찌 그 민족의 나라일 수가 있겠는가?
그런 우리나라는 영웅을 숭배하는 심성이 어찌 이리도 박한지!
-을지문덕 전 / 단재 신채호

 

Intellectual Property people 문인 / 전략가 / 지도자

함니이 Ham Nghi (1871 ~ 1943) King
함니이 황제이다. 그는 베트남 윙(Nguyen)왕조의 제 8대 황제로 제위기간 연호가 통칭이 되어 흔히 ‘함의제’라고 부른다. 평소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함니이는 1884년 14세의 약관에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다음 해에 항불근왕대봉기(抗佛勤皇大風潮) 의 격문을 발표한다. 당시 그는 왕도 후에를 탈출한 후, 지방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프랑스에 대한 필사항전을 호소했다. 이에 프랑스는 형인 동경제를 즉위시키고 함니이에게 귀순을 권유했지만, 함니이는 농촌을 전전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다가 붙잡혀 1888년에 알제리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여 3명의 아이를 두고 행복하게 살다가 1943년 72세에 사망했다.

윙주 Nguyễn Du (1766 ~ 1820)
응우옌주는 탕롱 출신으로 그의 가계는 레 왕조의 고관으로 근무하였고 그 역시 레 왕조를 섬겼다.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13세에 어머니를 잃은 뒤 가장이 되어 형제들과 이복형제들을 양육하였다. 레 왕조의 관료로 생활하던 중 레 왕조가 망하자 왕조의 복귀를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자롱 황제가 응우옌 왕조를 세우자 군인과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1802년에는 주 청나라 안남국 대사로 파견되어 베이징(北京)에 갔다. 명나라의 중국 소설을 베트남어로 번역하여 쓴 서사시 금운교전(金雲翹傳)을 발표하였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는 토뉴, 호는 탄히엔이다. 베트남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쭈엔끼에우를 집필했다. 한자로 쓰여진 대서사시로 총 3,254행에 달한다.

승윙안 Suong Nguyen Anh(1864~ 1921)
20세기 베트남 여권 신장에 기여한 베트남 최초의 여성 주필이자 탁월한 시인이다. 그녀는 윙딘찌우(Nguyen Dinh Chieu)의 3째딸답게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한자와 베트남언어인 쯔놈(Chu Nom)에 능통했다. 성인이 되고 미토지역에서 지역 공무원인 윙꽁띤과 결혼하지만, 얼마 못가서 남편이 사망하게 되고 생계를 위해 사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1918년 여성신문을 발행과 주필로 활약하며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부이티쑤언 Bui Thi Xuan (1765 ~ 1802)
부이티쑤언 장군은 중부 베트남 반딘성 출신으로 따이선(Tay Son)왕조의 명장 쩡광지우(Tran Quang Dieu)의 부인이다. 그녀는 병법에 통달하여 적을 막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여걸 중의 여걸로 투항하거나 도망가는 적을 결코 죽이지 않아, 적 조차 그녀를 마음으로 깊이 존경했다. 당시 그녀가 활약했던 시대적 배경은 Tay Son의 난으로 이 대규모 농민 봉기는 레왕조 후반기에 발생한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 혁명이다. 부이티쑤언은 남편과 함께 다수의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광쭝(Quang Trung)황제의 요절로(1792년)따이선 왕조는 멸망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윙왕조(1802~1954)가 수립된다.

응원꽁쯔 Nguyen Cong Tru (1778 ~ 1858)
응윈왕조 시대의 군사이자 경제 전문가이자 시인으로 베트남 근대사의 업적을 남겨 칭송 받는 인물이다. 그는 삶 속에서 온갖 역경을 이여내어 자신의 삶을 승리로 이끌고 국가에 세운 공을 인정받았다.

레귀동 Le Quy Don (1726 ~ 1784)
베트남 문학사의 길이 남을 시인이며, 수필가, 사상가, 철학가, 정치가였다. 1752년 27세의 나이로 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뒤, 한림원 학사, 중국파견 사신 등 조정에서 중책을 맡는다. 1760년 동아시아의 허브라 할 수 있는 북경에서 베트남 사진 레귀동과 조산 사신 홍계희와의 만남을 통해 양국 간의 첫 만남과 소통을 통해 양국의 동아시아 문화동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이비엣통스(Dai Viet Thong Su – 대원통사), 구엉트카오빙(Quan Thu Khao Bien), 탄모힝팜(Thanh Mo Hien Pham), 박스통록(Bac Su Thong Luc) 등 수 많은 저서를 남겨 후에 사가들은 그를 일컬어, 천재학자 관료로 평가하고 있다.

판보이쩌우 Phan Bội Châu (1867~1940)
베트남에서 존경받는 반 식민주의 지도자이다. 사상가이자 민족주의자로 다양한 저작 활동을 병행하며 독립 운동에 한평생을 투신했다. 특히 동주운동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유교 교육을 대신해 근대 교육을 통해 베트남독립을 추진한 운동)을 주도하여 베트남에 신교육 이념을 불어 넣었다. 봉건왕조(응우엔 왕조)의 통치 아래 자랐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교육했으며 봉건군주제폐지를 주장하고 또한 베트남개혁회, 베트남광복회 등을 조직하며 지속적인 프랑스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쳤다.
일본, 중국 등을 옮겨 다니며 독립활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수감되었으며 하노이 호아르수용소로 이송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석방된 후 가택 연금 상태로 생을 마감하였다.

판쩌우찐 Phan Châu Trinh (1872~1926)
프랑스식민지배 시절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민족주의자이다.
교육을 통해 베트남의 미래를 변화시킬 것을 강조하며 봉건왕정(응우엔왕조)이 아닌 근대화를 통한 베트남독립을 모색했다. 홍콩, 중국, 일본,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일본에 머물면서 동시대를 살았던 판보이쩌우와 함께 동주운동을 이끌었다. 베트남으로 돌아와서는 동낀응아톡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1911년 꼰다오섬에서 악명 높은 정치범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1915년 프랑스로 건너가 호치민과 함께 독립활동을 펼치다 1926년 사이공에서 사망했다.

 

 

 

쭈반안 Chu Văn An (1292~1370)
베트남에서 가장 추엉 받는 유학자이다. 쩐 왕조 시정 문관으로 고위 관직에 올랐으나 유학 보급에 더 관심을 갖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다. 국자감에서 유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왕세자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응오득께 Ngo Duc Ke (1878 ~ 1929)
하띤성 출신으로 본 이름은 응오빈빙(Ngo Binh Vien), 호는 떰쑤잉(Tap Xuyen)으로 20세기 식민시대 베트남 사회를 이끈 반체제 지식인이자 선각자이다. 그는 하노이에서 프랑스에 항거하는 흐우탄(Huu Thanh )지 주필로 활동하다가 언론사가 문을 닫은 1972년 이후에는 후에(Hue)에서 중국에서 발간된 최신 서적들을 압수해 베트남에 소개하기도 했다. 한편 응오득께는 특히 중국의 선각자 강유위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덕에 베트남 고전문학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걸쳐 유럽의 선진학문 도입에 열성적이었으며 진보적 사상을 담은 판따이호지타오(Phan Tay Ho Di Thao)같은 책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08년 반체제 인사로 지목되어 1921년 꼰다오 섬에 유배되나, 이후 1929년에도 하노이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하다 51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우세 사가들은 이런 그를 일컬어 신학문에 통달한 20세기 선각자로 평가하고 있다.

응우옌 타이혹 NGUYỄN THÁI HỌC (1902~1930)
프랑스 지배 시기에 활동했던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이다. 사회주의 성향의 베트남 국민당 창당 맴버로 참여 했다. 프랑스 식민정부 타도를 위해 1930년 엔바이에서 무장 봉기를 주도했으나 프랑스 정부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베트남이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 레러이(레타이또)를 도와 독립을 이끈 군사전략가이다. 유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레 왕조의 조정에서 재상의 관직까지 올랐다. 레러이(레타이또)가 승하한 다음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며서 시를 쓰며 여생을 보냈다.

타이반릉 Thai Van Lung( 1916 ~ 1946)
타이반릉은 법률가이자 제1기 국회의원이다.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포병 사관학교에서 공부한 후 2차대전에 참가해 중위로 제대했으며, 1945년 3월 조국으로 돌아와 사이공 상급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Nguyen Van Thu, Pham Ngoc Tach, Luu Huu Phuoc 등과 함께 선봉무장병력을 창설했다. 8월 혁명 이후인 1945년 9월 23일에는 Nam Ky에서 사이공무장병력을 창설해 프랑스와 싸웠으며, 1945년 7월 2일 결국 적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2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똔턱팁 Ton That Thiep (1870~ 1888)
똔턱팁은 19세기 초, 프랑스 식민시대 근왕운동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로, 베트남 중부 후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명장인, 똔턱투잇 (Ton That Thuyet)으로 1875년 7월 4일 군사들을 이끌고 프랑스군 진영을 공격하나 반격을 받고 광찌(Quang Tri) 성으로 피신 후 광빈성 뚜이호아로 후퇴한다. 1885년 수도 후예가 최종 전복된 후, 함응이(Ham Nghi) 왕을 지키다 18세의 나이로 죽는다. 지금도 민족과 왕을 위해 목숨 바친 이 애국 청년 똔턱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하노이와 호찌민 후예등에 있다.
똔턱팁 거리는 현재 호찌민시민들 사이에 작은 인도로 통한다. 쿠알라룸프, 싱가포르 등에 인도 거리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바로 이 부근에도 다수의 인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문이다. 인도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네사(Ghanesa)신을 모시는 힌두사원 Sri Thenday Yuttapani 사당 문에 한결 인도 색깔이 덧입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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