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ne 24,Thursday

세계를 뒤흔든 경제위기 3편 – IMF 경제위기

지난호 스폐셜리포트 세계를 뒤흔든 경제위기 2편에서는 1929년 전세계를 뒤흔든 세계경제공황을 살펴보았다. 세계경제공황은 1920년대 당시 세계최대 경제였던 미국에서 시작된 장기간의 금융위기가 전세계로 전이되면서 실물위기로 확대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호에는 조금 다른 경제위기를 다루어 볼까 한다. 바로 한국에서는 IMF위기로 부르는 1997년 외환위기다. 1997년 연간 7%이상 성장하면서 잘나가던 동아시아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해 5월부터 발생한 경제위기로 인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던 한국, 태국,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눈부신 성장이 멈추고, 이후 적게는 3년, 많게는 8년간의 고통의 시간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국은 6.25이래 최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상초유의 경제 구조조정과 많은 고통을 거쳤지만 결국에는 경제가 세계적 수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태국 같은 국가는 23년전의 위기를 현재도 못 벗어났고,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는 모든 경제 시스템이 붕괴직전까지 가게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들 국가가 위기를 맞아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살펴보며 지금 세계를 흔드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에 참고할 사항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의 전개
태국 → 인도네시아 → 한국 → 러시아 → 브라질로 1년간 지속되는 전이과정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한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온 일련의 금융위기를 일으킨다.
시작은 1997년 5월 태국이었다. 경제 상황 악화, 특히 수출 부진으로 인해 태국 바트화는 1996년 말부터 런던·뉴욕·홍콩 등 역외 금융시장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태국 중앙은행은 바트화 방어를 위해 쏟아 넣은 달러자금으로 인한 외환보유액 고갈로 태국이 7월 2일 바트화의 달러화 페그(peg system: 고정 환률)를 포기하면서 바트화 가치는 하루에 20%나 급락했다.
결국 태국은 IMF와 1997년 8월 14일 17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패키지와 함께 경제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하면서 진정하는 듯 보였지만, 전세계 금융시장에서 동남아 국가의 통화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10월경부터 위기는 확산되어, 동남아 최대 경제인 인도네시아로 옮겨가면서 인도네시아의 루피아화 가치가 30%나 떨어졌다. IMF와 인도네시아는 10월 31일 4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잠시 진정되는 것으로 보이던 아시아의 금융시장은 11월 중순 이후에는 이미 위기에 빠진 동남아 국가들과 체구가 다른 한국까지 전이되기 시작한다. 이미 10월부터 한국 시장에서 자금이 이탈하면서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11월 21일 급기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IMF는 한국을 위해 570억달러에 달하는 전례 없는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 구제금융에 싸인을 하게 된다.

12월 IMF의 1차 자금이 위기에 빠진 국가들에게 공급됐고, 일부 외채 조정도 이뤄지면서 이듬해 1월 중순에는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의 환율이 더 이상 상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IMF 프로그램 이행을 두고 인도네시아가 정치적인 이유로 불투명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난 이후 결국 인도네시아가 4월 IMF에 완전히 손을 들고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유류 보조금을 삭감하자 타격을 받은 자카르타의 저소득층이 시위에 나섰다. 인도네시아를 1967년부터 철권통치 해 온 수하르토 대통령을 향한 분노, 그의 가족에 대한 특혜로 대표되는 부정부패에 대한 염증, 주로 화교 자본가에 대한 분노가 시위대를 거리로 불러냈다. 화교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있었고, 주요 화교 은행에서 예금 인출사태가 발생했다. 다른 위기국의 외환시장이 안정된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가치는 1998년 6월까지 계속 떨어졌다.

이런 난항을 거치면서도 아시아 국가들이 다소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즈음 이 경제 위기는 아시아 밖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먼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경제개혁의 일환으로 민영화를 추진해 왔는데 취약한 금융, 옐친정부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등에 의한 부작용으로 경제난에 빠졌다. 이 시기 IMF는 러시아에 긴급자금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 등 개혁 조치가 미흡해 IMF와 러시아는 계속 대립했다. 주식시장이 급락하는 등 위기가 악화되면서 러시아는 마침내 8월 루블화 평가절하와 외채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위기는 이제 러시아에서 브라질로 옮아갔다. 그렇지만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아시아 금융시장 위기의 전이는 막을 내리고, 위기의 진양지인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되면서 아시아 금융위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97년 위기의 발생 원인
수출주도형 발전과 개방금융시스템의 간극

아시아 경제위기는 통화가치의 급격한 하락으로 촉발된 외환위기에서 시작해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위기, 정치사회적 위기로 퍼져나갔으며 지역적으로도 확산됐다는 점에서 종합적인 위기였다. 현재까지 여러 의견이 있지만 가장 많이 언급된 위기의 원인은 금융시스템 문제였다.

1980년대 말부터 선진국의 낮은 금리와 개도국 높은 금리차이를 노린 일본을 필두로 한 선진국의 대규모 자본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른 신용상승으로 단순히 임가공 수출 때 보다 높은 경제 성장률 보이며 수출이 증대하나, 동시에 취약한 금융시스템으로 인한 자국화폐의 평가절상(환율하락)이 일어나며 경상수지 적자상황을 불렀고, 동시에 자본재와 소비재 수입증가가 발생하면서 무역수지도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이기간 평균 국내총생산(GDP) 대비 6.9%에 이르렀고 말레이시아도 5.6%, 심지어 무역수지에서는 흑자를 내던 인도네시아조차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2.6%로 나타났다.
당연히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은 서구의 투기자본에게는 기회로 여겨졌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환율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1995년 방콕국제금융센터의 개장으로 대표되는 금융자본 이동의 개방은 이러한 상황에서 투기성 핫머니의 유입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면서 위기의 창이 열리게 되었고 우연찮게 1997년 당시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던 태국에서 자금이 철수하면서 금융시장에 심리적 공포가 만연하게 되면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한국의 경우
위기를 기회로 전환한 한국국민

외환위기 터지다
한국의 외환위기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나눠볼 수 있지만 단적으로 말한다면 경제개발기에 성공적이었던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관치금융, 재벌체제 등이 오히려 위기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한보비리 사건에서 보듯이 정치권과 기업 간의 ‘정경유착’도 불합리적인 대출이나 투자를 부추겼다. 종합금융사들은 해외 자금을 1년 이하의 단기로 차입해, 기업들에게 높은 금리를 받고 장기 시설투자 자금으로 대출했다. 우리나라 경제가 문제없을 때는 차환(Rollover, 대출연장)이 됐지만 위기 조짐이 보이자 외국 금융사들은 자금을 급히 회수하기 시작했다.
위기 조짐은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최종 부도로 쓰러지면서부터 감지됐다. 3월부터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등 대기업 그룹들이 연쇄 부도가 났다. 7월에는 태국 바트화가, 8월에 인도네시아 루피화가 폭락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우리나라는 원·달러 환율을 무리하게 달러당 800원대로 방어하려다 외환보유액을 허비했다. 11월에는 외환보유액이 20억 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정부는 결국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IMF는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고 환율 변동폭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또 고금리·고환율 정책으로 투자자금을 유치하라고 압박했다. 금리는 연 20%대로 뛰어올랐고 원·달러 환율은 1,900원대로 상승했다. 고환율 정책은 수출 증대, 투자자금 유치 등을 위해 불가피했으나 고금리 정책은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켜 두고두고 ‘정책 실패였다’는 오명을 썼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는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 등에서 4대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정부는 총 200조 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조성해 부실화된 은행에 투입했고 일부 은행과 종합금융사를 퇴출시켰다.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로 대표되던 5대 시중은행들은 합병이나 해외 매각의 길을 걸었다. 기업들도 부채비율을 낮추고 인원을 해고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상당수 기업들이 채권은행들의 관리 하에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통해 자산 매각, 구조조정 등을 추진했다. 4대 그룹 중 하나였던 대우그룹도 해체돼 채권은행들이 관리했다. 공기업 개혁으로 포스코, 한국전력, 한국통신(KT) 등이 민영화됐고 노동부문에서는 정리해고가 허용됐다.

환골탈태한 한국경제
우리나라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2001년 8월에는 IMF로부터의 구제금융 자금을 모두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IMF 외환위기는 경제를 비롯해 우리나라 전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은행들은 정부나 정치권의 압력에 따른 관치금융으로부터 벗어나 독자 경영이 이뤄졌다. 금융‘기관’이라는 표현보다 금융‘회사’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게 됐다.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대폭 낮췄고 불필요한 투자나 무리한 확장을 삼갔다. 규모보다는 수익성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해 효율성을 높였다.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 등은 글로벌화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외국 자본의 유입과 글로벌스탠더드 도입으로 금융시장도 선진화됐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우리나라 시장에 참여하면서 시장이 투명해지고 펀드나 파생상품 등 여러 가지 새로운 금융상품과 제도가 도입됐다.
물론 IMF 위기가 우리나라에 긍정적 결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왜곡된 자금의 흐름은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한쪽에서는 돈벼락을 맞는 졸부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한번 왜곡된 돈의 흐름은 사회 빈부 차이를 심화시켰고 또한 대졸자들이 중소기업을 외면하고 대기업과 공기업으로만 몰려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1997년 부터 공사가 중단된 사톤 유니크 타워의 모습

태국의 경우
성공한 구조 개혁, 내부 갈등과 사회, 경제적 모순으로 도약 실패

방콕 야나와 지역에는 사톤 유티크 타워라 불리는 49층짜리 건물이 23년째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당시 고급 호텔로 지으려 했던 본 건물은 80%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97년 공사가 중단되었고, 2020년 현재까지도 중단된 상황에서 인스타그램 사진을 찍거나, 폐허를 좋아하는 특이한 관광객들을 위해 500바트의 입장료를 받으면서 유지되고 있다. 방콕 돈무앙 공항 고속도로변에 위치한 철근이 들어난 기둥의 행렬도 공항 철도를 만들다가 중단된 프로젝트의 흔적이다. 1997년 당시의 경제위기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국경제의 모습은 방콕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1997년 당시 3000달러로써 중국보다 훨씬 발전했던 태국 경제는 23년이 지난 현재 8000달러 수준에서 고정이 된 상황이고, 지난 5년간 경제성장률은 평균 3% 수준의 실적을 보이면서 개발도상국중 가장 낮은 수준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태국경제는 왜 1997년을 극복하지 못하였을까?

첫번째 요인으로는 IMF가 당시 요구하였던 구조조정으로 인한 빈부차의 확대와 고정화를 들 수 있다.
IMF와 일본정부 ADB(아시아개발은행은) 태국에 총 172억 달러 제공을 약속하면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그 목표치를 달성할 것을 요구했다.
태국 정부는 IMF의 요구대로 1997~1998년(회계연도) 예산을 ‘GDP 대비 1% 흑자’로 편성하기 위해 세출예산을 전년도에 비해 11%나 감축했다. 아울러 부가가치세도 7%에서 10%로 인상했으며, 태국항공·방콕은행 등 공기업의 민영화 및 해외 매각도 이루어졌다.
금융기관 정리 등 구조개혁을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태국은 부실 금융기관을 과감히 퇴출시켰으며 금융감독 및 규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끝에 태국경제는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무역수지는 흑자로 전환됐고,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면서 환율도 안정됐다. 태국의 외환보유액도 348억 달러로 증가했다.
그러나 IMF의 요구에 따른 결과 국내 수요의 위축과 경기 침체, 금융 혼란, 대규모 해고 사태가 발생해 1998년 말 실업 자가 200만 명을 돌파했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이러한 구조조정이 태국을 상시적으로 괴롭히는 정치불안과 구조적인 골치거리인 계층당 빈부격차의 심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강력한 개혁정책에 따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쌀·소금을 제외한 산업 전 분야의 외국인 투자 규제를 철폐하고, 외국 자본 진출 금지 12개 분야도 전면 해제하면서 2000년대 홍콩 금융계에서는 태국이 ‘투자 최적지 1순위’로 선정되기도 할 정도로 태국 경제의 앞날은 2000년대 초반에는 밝아 보였다.

그러나 경제를 살리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태국경제를 지금까지 침체로 몰아넣은 두 번째 이유인 정치적 불안이 등장한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집권했던 탁신 총리는 농촌 개 발사업, 공기업 민영화, 인프라 확충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탁시노믹스(Thaksinomics)’를 추진해 경제위기 이전의 성장률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태국은 2003년 7월 IMF 구제금융액 중 최종 잔여액 16억 달러를 상환함으로써 당 초 상환 일정을 2년여나 앞당겨 위기관리체제를 종료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는듯 했다.
그러나 탁신 총리의 경제정책은 상당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특히 인프라 확충이 특정기간에 과도하게 몰리면서, 2004년 이후 7%대의 고성장률은 다시 4~5%대로 약화되었고, 부작용으로 성장률이 약해지면서, 계획되었던 인프라 개선에 기반한 산업투자에 악영향을 미치면서, 태국경제가 다음단계로 도약하는데에 방해요소가 되어버렸다. 그 후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군부 쿠데타로 탁신이 권좌에서 쫓겨나자, 이에 불응하는 레드셔츠와 이를 반대하는 옐로셔츠로 국론이 분열된 상태가 상시적인 상황이 되었다. 결국 태국은 1997년 이후 새로운 반등 보다는, 반등을 보이다가 내부의 문제로 상시화되어 저성장의 함정에 갇힌 국가가 되어버렸다.태국의 GDP는 2019년을 기준으로 7792달러에 머물고 있다. 1997년 당시 한국과는 약 7천달러 정도의 경제적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과의 경제적 격차는 2만 3천달러 정도가 되었다. 태국은 2020년을 살고 있지만, 1997년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체된 나라가 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 태국 GDP성장률 표
1997년이후 인도네시아의 견실한 성장과 태국의 널뛰기 성장이 비교 Point

Year Zero에서 다시 시작한 인도네시아
심각한 역성장, 정치적 혼란 20년이 지난 지금은 동남아시아 고도 성장의 한 축으로 떠올라

 

인도네시아는 부존자원이 적은 태국과는 달리 자원도 풍부하고 2억 6천에 달하는 인적 자원을 지닌 잠재력이 큰 나라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에 착수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유럽 등의 국가에서 투자를 받아 의류· 신발 등 경공업 산업을 육성되기 시작했다. 외부 투자를 기반으로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인도네시아는 금리가 높다는 이유로 헤지 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의 표적국으로 부상했다.
국제금융자본은 인도네시아 투자액을 높였고, 이에 따라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졌다. 하지만 낙후된 금융시장이 국제금융체제에 편입되면서 자본의 과잉 유동성으로 신용이 과다 평가되었다. 단기적인 자본 유입에 따라 유동성이 증가했지만 인플레이션이 인도네시아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실질 환율이 절상되면서 경상수지도 악화되자 다시 자본유입으로 충당돼야 하는 악순환으로 재정건전성도 취약해졌다. 즉 확정되지 않은 유동성 외채와 부채가 과다하게 확대된 것이다.
국제 투기성 자본의 공격에 대응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환율제도도 태국과 같이 완전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 통화에 대한 불신은 확산됐고, 대외채무 변제 능력에 대한 대외신인도가 하락했으며 루피아화 가치는 급락했다. 결국 단기유입자본이 외환보유액을 초과하면서 경제위기가 촉발됐다.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이 당시의 인도네시아 경제는 이웃 말레이시아, 태국과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는 철저히 붕괴되어 버렸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경제가 일시적으로 급격히 둔화하였다. 이충격으로 수하르토 정부가 퇴진한다. 성장률로 보면 1998년의 -13.1%라는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태국과 함께 가장 심각한 급성 역성장을 보였다. 환율 측면에서 보면, 1997년 8월 시점에 1달러당 2,600루피아 수준을 유지하던 루피아화는 1998년 1월 11,000루피아 수준까지 자유 낙하하였으며, 한때 15,000루피아 수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이 1998년에 환율과 실질 국내총생산 모두가 급락하여 당해 세계은행 집계 달러 환산 GDP는 심지어 싱가포르보다도 적었다.
이렇게 경제가 망가지면서, 30년 권좌의 수하르토 대통령의 통치도 막을 내렸다. 1998년 화교학살 및 폭동, 그리고 1999년에는 동티모르 독립으로 인한 혼란까지 겹치면서, 정치개혁과 민주화로 가는 길은 혼란스러웠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위기는 태국과는 달리 경제위기가 시작된 단기간 내에 모든 혼란이 한 번에 찾아본 것이었다. 고로 정치적인 개혁과 같이 진행되었기에, 인도네시아의 회복은 더딜 수 밖에 없었고, 1997년 수준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8년이 걸렸을 정도로 인도네시아에게 1997년 위기는 나라를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위기였다.
그러나 그 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정치는 안정적으로 변했고 위기를 겪으면서 리스크 관리에 노하우가 있는 것으로 평가 받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로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6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의 정부부채는 국내총생산(GDP)대비 27.7%를 기록했으며, 타 동남아시아 국가 대비 낮은 수준이 유지중이고. 2016년 이후 브렉시트 및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국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도 국채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 유출이 제한적인 점은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된다. 이와 더불어 2016년 기준 대외부채는 GDP대비 약 34.1% 수준이며 외환보유액은 1157억 달러로 외환보유액 적정성 지표도 국제통화기금(IMF)권고 수준인 100~150%를 충족하고 있다.

30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수하르토 대통령

이러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노력을 반영하듯 3대 신용평가 회사 중 하나인 S&P는 1997 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인도네시아를 투자적격 등급인 ‘BBB-’로 상향 조정했다. 루피아화가 2016년 이후 안정적인 추세로 전환됐으며, 인도네시아 경제성장률이 2016년 5%대로 재진입 하는 등 안정적 성장세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재정적자는 GDP 대비 3% 이하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0년 GDP의 70%에 달하던 정부부채가 30% 이하로 축소됐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세계은행 집계로, 인구 2억 5천 5백만명의 연간 GDP 1조 740억 달러 규모의 동남아시아 최대 경제대국이자 세계 16위 경제국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대로 큰 위기 없이 성장을 지속할 경우, 인도네시아는 2030년 무렵 PPP 기준 GDP 세계 5위/명목 GDP 세계 9위로 올라설 것으로 영국의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전망했다.

IMF 위기와 현 코로나19 사태의 비교

20여년 전의 IMF 위기의 흔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리만 사태 그리고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또 다시 전 세계적 경제위기를 맞았다. 특히 이번에 발생한 코로나 19사태로 인한 경제위기는 다른 위기와는 원인부터가 다르다.

코로나 19의 경제 위기는 사람들이 이동을 멈춘 게 가장 큰 이유다. 이에 따라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멈춰섰다. 몸 전체를 경제에 비유하자면 과거의 금융위기와 경제위기는 어느 특정 부위에 탈이 나 생긴 문제인데 지금은 전신마비에 가까운 심각한 수준으로 그 영향력도 역시 더욱 심대할 것이다.
한국은 방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실적을 인정받아 국가의 신뢰를 높였다는 성적표를 받았지만, 트럼프 이후 노골화된 자국주의와 생산기지의 자국화는 중국의 의존도가 크고 수출 주도국인 한국의 입장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또한 구조개혁의 부진으로 인한 경제의 부실화 문제까지 등장하며, 코로나 이후의 경제 반등을 기약할 만한 요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다.
경제운영은 타이밍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책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경제는 무너지고 그 댓가는 국민이 지불한다.
이미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4월 취업자가 102만 명이 감소했다고 한다. 대량 실업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IMF때 겪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어쩌면 이번에 한국은 어느 위기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의 무거움이 더욱 느껴지는 상황이다. 글. 한성훈 kosdaq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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