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December 2,Wednesday

라벨의 혁신적 인상주의 – 두번째

프랑스 근대 음악의 선구자 모리스 라벨. 그는 언제나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동경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주류들의 사고에서 벗어나 있으며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라벨의 혁신적인 인상주의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그의 인생 후반기에 탄생한 주요 대작들을 소개한다.

다시 태어난 <전람회의 그림>
‘전람회의 그림’은 러시아 음악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이다. 그가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친구 ‘빅토르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에서 감상했던 400여점의 작품(소묘, 수채화, 건축 양식 스케치) 중 10점을 발췌해 피아노곡으로 만든 것이다. 이 모음곡은 발표 당시엔 피아노 연주자들이 기피했던 곡이었다. 왜?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던 무소르그스키는 뛰어나고 개성있는 음악성을 지녔던 반면 피아노 연주에는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나 깨나 번뜩이는 악상을 떠올릴만큼 멜로디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악적 상상력을 피아노로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데에 미숙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이 오늘날 이토록 많이 연주되는 인기작이 되었을까? 사실, ‘전람회의 그림’이 본격적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무소르그스키가 이 곡을 발표한 지 무려 50년이나 지난 후 ‘모리스 라벨’이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9세기 말, 파리에서 러시아 음악을 선봉적으로 소개하고 있던 러시아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평소 무소르그스키의 작품들에 심취해 있던 라벨에게 그의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미 자신의 상당수 피아노 음악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할 정도로 오케스트라 악기의 음향과 기법에 관심이 많았던 라벨은 10개의 그림을 묘사한 ‘전람회의 그림’이 음색의 한계가 있는 피아노보다는 오케스트라에 더욱 적합한 곡임을 간파하고 쿠세비츠키의 제안을 수락했다. 1922년 10월 19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쿠세비츠키에 의해 초연된 라벨판 ‘전람회의 그림’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순식간에 세계 각국 오케스트라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라벨이 편곡판에서 관현악의 가능성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는 원곡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사실,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좌우 88개의 건반을 넘나들며 표현해낼 수 있는 음색은 무궁무진할 수 있다. 하지만 수십 개의 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음색과 음량 면에서 피아노가 이길 수 있을까? 필자 역시 피아노를 만지는 사람이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라벨은 다소 밋밋했던 무소르그스키판 전람회의 그림들에게 마술봉을 휘둘렀다. 절뚝거리는 난쟁이, 어기적거리며 굴러가는 소달구지 소리,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들이 삐약대는 소리, 시장 아낙네들의 수다 소리, 키에프의 웅장한 대문 등 전람회의 그림에 출현하는 온갖 사물과 인물들은 현악기와 금관, 목관, 타악기에 의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서 감상하는 우리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무소르그스키는 살아 생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출신 작곡가의 손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 획기적으로 ‘갱생’하게 될 것을. 라벨의 편곡이 대히트를 치면서 무소르그스키의 원곡은 덩달아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지금은 편곡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전 지구적인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흑백의 세계에서 구출해내어 총천연 칼라의 세계에 가져다 놓은 모리스 라벨. 그는 정말 오케스트레이션의 천재이다.

‘어…? 실험이었는데…’ <볼레로>
‘볼레로’ 는 하나의 리듬이 169번이나 나오고 주요 멜로디 2개가 15분 넘게 반복되는 요상한 곡이다. 라벨은 1928년에 전위무용 안무가인 ‘이다 루빈슈타인’ 으로부터 스페인 풍의 작품에 쓸 음악을 위촉받아 이 곡을 완성했다. 볼레로는 18세기 스페인에서 생겨난 전통춤이다. 어머니가 스페인계였기에 어려서부터 스페니쉬 무곡을 많이 들으며 자란 라벨은 프랑스인이면서도 뼛속 깊이 스페인의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라벨이 파리오페라극장에서 볼레로를 초연했을 때, 청중들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작품임에도 강하게 매료되었다. 악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리듬’과 중독성 강한 ‘멜로디’, 거기에 이전 음악가들이 결코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다이나믹 기법’ 덕분이었다. 곡에 대한 특징을 쉽게 설명해보자면, 도입부에 등장하는 볼레로 리듬은 스네어 드럼(작은 북)과 팀파니에 의해 시작되어 마지막 340번째 마디까지 거의 쉬지 않고 계속된다. 타악기 주자들의 팔이 괜찮은지 걱정될 정도이다. 지휘자의 템포 해석에 따라 짧게는 14분, 길게는 17분까지도 소요되는 작품에서 타악기 주자들이 네버엔딩으로 북을 두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획기적이다. 첫 주제 선율은 소리가 작은 목관 악기(플룻, 클라리넷, 바순, 오보에)들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더니 점점 소리가 큰 금관악기들이 더해지고 절정부분에 이르러서는 현악기까지 합세하더니 마지막엔 오케스트라 전체가 폭발하듯 드라마틱한 엔딩을 선사한다. 이 작품의 호흡, 길어도 너무 길다. 무슨 말이냐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단 2마디를 제외하곤 쉬지 않고 끝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악곡 전체를 꿰뚫는 ‘점진적인 크레셴도(점점 커지는)’ 때문일 것이다. 즉 도입부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냘프게 등장한 멜로디는 지구력 끝내주는 타악기 주자들의 반복 리듬을 배경으로 커지고 커지더니 계속 커진다. 다시 말해, pppp로 시작된 악곡은 시나브로 크레센도(점점 크게)를 하더니 결국엔 ffff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흥행에 성공시킨 라벨의 당시 인터뷰가 좀 싱겁다.
“당황스럽군요. 이것은 음악이 아닌 관현악적 조직일 뿐이며 단순한 실험이었습니다. 전위 무용에 걸맞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본 것인데,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 ‘크레센도 음악’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볼레로는 전위적인 현대무용에 대한 라벨의 이해가 그만의 독창적인 음악성과 맞물린 걸작이다. 어쩌다 보니 라벨의 걸작이 된 ‘볼레로’. 반드시 무용과 함께 들어보시길 추천한다.

왼손만으로 세계를 들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내 이름은 파울 비트겐슈타인. 나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팔 한쪽만 잃은 것을 감사해야 할까…하지만 내 오른팔을 잃던 순간 나는 이미 죽었다. 왜? 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는 세상, 감히 상상도 안 된다. 나는 과연 무슨 명분을 가지고 내 삶을 지탱해 나갈 것인가…”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팔에 총탄을 맞고 급기야 오른팔을 절단하는 비극을 겪은 후 10년 동안이나 죽은 사람처럼 방황하던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 그런 그에게 절친이었던 라벨은 왼손만으로도 연주가 가능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해 주었는데, 그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왼손을 위한 협주곡 D장조>이다.
만약 이 곡을 들어본 적 없는 그 누군가에게 연주영상이 아닌 음원만 들려준다면, 영락없이 양손연주 협주곡으로 알 것 같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온전히 왼손 하나로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상대하는 이 곡의 영상을 보게 된다면 신기하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 할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이 협주곡은 순전히 억지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야 하는 솔리스트 (피아니스트)의 음량적 역량도 높아야 하지만, 열 손가락이 해야 할 일을 다섯 손가락이 해결해야 하는 무리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눈 깜짝할 사이에 1m가 훌쩍 넘는 88건반을 좌우로 훑고 다닐 수 있는 순발력과 공간 사용력, 양손으로 펼쳐져 있는 넓은 화음들을 한 손으로 해결하느라 쉼없이 많은 음들을 굴려서 쳐야 하는 손가락들의 고단함 등은 왠만큼 숙련된 피아니스트가 아니고서는 소화하기 힘든 고난이도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운이 좋은 음악가였다. 그의 장애를 완벽히 커버해 줄 수 있는 천재적인 작곡가 라벨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벨은 한 손으로 연주할 때 발생하는빈 공백을 메꾸기 위해 다양한 금관악기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물론 건반의 위아래를 폭넓게 오르내리는 피아니스트의 선율은 그야말로 서정적이다. 또한 2악장에 등장하는 재즈리듬과 화성은 모던하면서도 독특한 뉘앙스를 풍긴다. 비트겐슈타인과 라벨은 절묘한 타이밍에 만나 시대에 앞선 피아노 연주 역사를 썼던 완벽한 콤비였다. 이 작품으로 재기에 성공한 비트겐슈타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왼손 피아니스트’ 가 되었고, 다음 세대의 수많은 왼손 피아니스트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 눈을 감고 감상해 보시길 추천한다. 아..정말 양손으로 연주하는 것 같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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