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August 5,Wednesday

선조의 붕당정치 사림파가 동서로 갈라지다

지난 이야기
고려말 성리학을 같이 공부한 동문들이 조선 건국을 거치면서 서로 갈라져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되었습니다. 두 세력은 같은 학문을 공부했으나 뚜렷한 이념적 차이를 보입니다. 현실 정치를 추구하던 훈구파는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되면서 180년 권력을 잃고 사라집니다. 반면 명분과 도덕성을 주장한 사림파는 국왕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획득 합니다. 이후 사림파는 300년간 조선사회를 지배합니다.

중세에 시작된 위민정치
온건개혁파 이색과 정몽주의 학문을 계승한 야은 길재는 고향 구미 금오산으로 내려가 30년간 많은 학자들을 양성했고, 길재 사후 길재의 제자들도 학자 양성을 계속 합니다. 성리학의 종주로 추앙 받는 김종직을 필두로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은 걸출한 학자가 많이 배출 됩니다. 중종때 조광조 명종때 퇴계 이황, 조식, 기대승, 서경덕 등은 전부 길재 김종직 문하에서 배출한 학자들 입니다.
당시 훈구파는 학문 연구보다 현실 정치에 몰두 하였고 성리학 이론에 크게 구애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고 있는 유교 관습은 사림파 학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사림파 학자들의 성리학 연구에 의해 명종과 선조를 거치면서 성리학의 일반 이론은 거의 완성 됩니다. 따라서 조선중기 부터 조선은 성리학 사회가 됩니다. 관혼상제에 대한 절차를 규정한 “예론”은 17세기 우리역사의 유명한 토론인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현종과 숙종때 완성됩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조상들의 성리학 연구와 유교문화가 우리에게 어떤 득과 실이 있는지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양반은 벼슬 외 다른 생업을 가질 수 없어서 권력 다툼이 치열 합니다. 따라서 정당 정치가 일찍 발달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정당정치를 붕당정치 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가 교육 받은 사색당파 및 당파 싸움의 역사 등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의 표현 입니다. 일제강점기 교육은 우리민족의 단점만을 부각하고 장점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권력 다툼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지 존재합니다. 우리는 권력 다툼을 칼이 아닌 토론으로 했던 국가 입니다. 토론을 많이 했으니 시끄러웠던 것은 당연하죠. 다만 권력 다툼의 목적이 위민정치에 있느냐 권력쟁취에 있느냐 구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중세시대에 위민정치를 하는 국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성리학은 근면성과 학문 숭상을 유독 강조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큰 장점입니다. 한국인의 근면성과 배움의 열정은 경제성장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를 강탈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장교는 이렇게 기록 했습니다.
“미개하고 가난한 나라 조선에 집집마다 책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당시 양반들 집에는 당연히 책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세금과 군역을 면하기 위해서 양반의 수는 전 국민의 70% 정도 되었으니 집집마다 책이 많았을 것입니다.
100년 넘게 학문에 매진해서 학자를 많이 배출한 사림파는 도덕성과 명분으로 무장하여 성종때 김종직이 관직에 진출한 후 명종 말기를 거쳐 선조때 순탄하게 정권교체를 이룹니다. 성종때 정계 진출 후 80년 동안 많은 시련과 4대 사화를 겪었지만, 문정왕후 사망 후 부패청산 이라는 시대의 요구를 받아서 집권 세력이 됩니다. 훈구파 자녀들 대부분이 사림파로 전향하여 훈구파는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사림파 세상이 됩니다.

명종과 익선관
명종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고 16세의 하성군이 등극하니 그가 바로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입니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13세에 죽고 후사가 없었습니다. 순회세자 사망 당시 명종은 30세 젊은 나이라 후계자 선정을 하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명종의 서거로 후계자 지명이 없었고 인순왕후의 지명으로 선조는 임금이 됩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후사가 없는 명종이 자주 왕족 소년들을 불러 많은 이야기와 질문을 했는데 그중 하성군이 가장 영특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명종이 왕족 소년들에게 “익선관을 써보아라” 라고 했는데 모든 소년들이 어명을 따랐으나 하성군 혼자 “익선관은 왕관이라 소인이 쓸 수 없습니다” 라고 답했고 명종은 재차 권하기를 “왕관은 면류관을 뜻하는 것이지 익선관은 괜찮다” 그러자 하성군이 답하기를 “비롯 삿갓이라도 전하께서 쓰시면 왕관인데 하물며 전하께서 쓰시던 익선관을 소인이 쓰겠습니까” 라고 답해 명종과 인순왕후 두사람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강해서 인순왕후는 명종의 진의를 오판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렇듯 선조는 등극에 논란을 가져온 임금이 됩니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세째 아들 하성군 입니다. 후궁 출신의 서자도 아니고 후궁의 손자 즉 중종의 서손 입니다. 게다가 형님 두명을 제치고 임금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최초의 직계출신이 아닌 방계출신 임금 입니다. 출신 성분의 정통성이 미약하여 콤플렉스를 많이 가진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조는 재위 41년 동안 30번 넘게 양위 파동을 일으킵니다. 임금이 양위를 선언하면 신하들은 만류하고 세자는 석고대죄를 해야 합니다. 그대로 양위를 수용한 신하들은 역모죄로 몰리고 세자의 목숨도 위태롭게 됩니다. 그만큼 양위 파동은 조정의 큰 사건인데 이것을 매년 하다시피 했으니 선조의 속마음이 궁금합니다.
선조때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는데도 사림파가 갈라져서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고 일본의 침략으로 7년 동안 전쟁을 겪게 됩니다.

선조등극과 동인 서인의 등장
16세의 어린 임금 선조를 대신해서 인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합니다. 조정과 백성들은 문정왕후의 악몽이 되살아납니다. 여론을 경청한 인순왕후는 7개월 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선조에게 대권을 넘깁니다. 이번에는 어린 임금을 우롱하는 권신들의 독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선조의 복인지 조선의 복인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실세 사림파들은 부패에 물들지 않아서 깨끗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합니다. 기묘사화 때 숙청된 조광조 계파의 신진 사류들이 복직되고 윤원형등 을사사화 주역 권신들은 몰락의 길을 갔습니다.
선조 5년 우리나라 최초의 당파 싸움이 시작 됩니다. 조선건국 당시의 당파 싸움은 과전법과 신분제도 등 백성들을 위한 제도 개혁의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1572년 선조 5년의 사건은 자리 싸움 입니다.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사림파가 동서로 갈라져서 혈투를 합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 봅시다. 1572년 2월 이조정랑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 합니다. 김효원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대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였죠. 그러나 인순왕후의 동생 이조 참의 심의겸은 오건의 김효원 추천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과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이유 입니다. 당연히 김효원은 발끈했고 김효원을 추천한 오건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 했습니다. 김효원 눈에 비친 심의겸은 정계에서 물러나야 할 척신인데 심의겸이 자신의 주변 사람을 추천하려고 방해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동은 있었지만 법에 의한 추천권에 의해 김효원은 소망하던 이조정랑에 임용됩니다. 김효원이 임기를 마치고 후임자 추천을 할 시점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자 김효원은 단번에 추천을 거절하고 이발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합니다. 연이은 악연으로 두사람은 서로 적이 됩니다. 이때부터 사림파는 갈라져서 김효원 일파를 동인이라 부르고 심의겸 일파를 서인이라 부릅니다. 김효원의 집은 광화문 동쪽 건천동에 있고 심의겸은 광화문 서쪽 정릉에 살았기 때문에 동인과 서인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이조정량과 악용된 제도
“이조정랑” 어떤 자리인지 알아봅시다. 이조정랑은 정5품 현대의 과장급이고, “병조정랑” 역시 정5품 군대의 대령에 해당됩니다. 이조정랑은 6품 이하 문관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조정랑 역시 6품 이하 무관의 인사권을 가집니다. 현대 제도와 다르게 판서나 참판 등 상사의 결제없이 단독으로 인사권을 행사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습니다. 병조정랑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무관의 인사권을 행사 합니다. 이조와 병조에 각각 2명씩 좌랑이 (정6품) 있습니다. 이조와 병조에 2명의 정랑과 4명의 좌랑을 합쳐서 6명을 “전랑”이라 부르는데 이는 조선의 독창적인 제도이며 중국에서 부러워하는 제도입니다. “전랑제도”는 권력의 집중을 막고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또한 이조정랑과 병조정랑은 임기를 마치면 후임자 추천권을 가지는데 이를 “전랑자천제”라 부릅니다. 권력을 가진 대신들이 전랑들을 임명하면 간접적으로 하위직 인사권을 행사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랑제도 때문에 젊은 신진 관료들은 권력에 줄서기를 하지않고 소신있는 업무집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전랑들은 청요직의 핵심이며 이조정랑은 전랑들의 리더 입니다. 또한 전랑들은 대신으로 승진하는 보증수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악용하면 좋은 의미가 퇴색이 됩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당파 싸움이 치열해져 이조정랑 자리는 목숨걸고 투쟁하는 자리로 변질 되었습니다. 또한 이조정랑은 젊은 대간들을 조종하는 자리로 변질됩니다. 전랑 제도라는 우수한 제도가 애물단지로 변해서 영조때 폐지됩니다.

다음 이야기
이조정랑 문제로 투쟁하던 사림파는 동서로 분리되고 곧이어 사색당파로 분화됩니다. 국가보다 당과 가문이 먼저인 양반 지배층은 왜적의 침략과 만주족의 침략을 자초합니다. 전란 후 반성은 없는 양반들은 조선후기 300년 동안 권력추구를 계속합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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