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August 13,Thursday

한국에서 살아보기

자살이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쓰는 오늘 7월 10일에 국내의 가장 큰 뉴스는 박원순 서울 시장의 죽음입니다.
어제 저녁 박시장의 딸에 의해 실종신고가 된 지 7시간 만에 시신을 서울 시내 북한산 근교에서 발견하였다고 경찰이 발표했습니다. 아직 박시장의 죽음의 원인이 공식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경찰에서는 타살의 흔적이 없다고만 하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박원순 시장의 여비서가 성추행으로 박시장을 고발했고 그 뒤를 따라 미투의 행렬이 이어질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박시장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시중의 소문입니다.

만약 박시장의 죽음이 성추행 고발 사건에 의한 것이라면 참으로 세상이 아이러니 하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박시장은 바로 권력자들이나 힘있는 자들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여성들을 위한 인권변호사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더불어민주당은 오거돈 전 부산시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김남국 의원, 민병두 민주당 전 의원, 정봉주 민주당 전 의원 등 쟁쟁하던 권력자들이 미투 의혹으로 정치일선에서 아주 혹은 당분간 물러나는 전례를 다시 한번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름을 더불어미투당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비아냥이 인터넷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아직 판단할 입장은 아니지만, 권력자들의 죽음에는 뭔가 석연치 못한 일이 많았다는 것이 이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또 다른 마음의 파편입니다.
뭔가 자신들의 진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이 일어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사안의 방향타를 돌려버립니다. 그 행위가 자신의 결정인지 아니면 그 집단의 압력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행여 그런 죽음에 타살 의혹이 있다고 해도 그저 소문으로만 끝날 뿐 제대로 해명된 적은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희찬씨의 죽음이었죠. 그의 죽음은 정말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런 의혹이 1도 해명되지 않은 채 사건은 종결되고 말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의 죽음이 자살이건 아닌 건 간에 정치인들의 자살은 모든 문제의 해결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것을 이유로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마 이번의 박원순 시장의 자살도 그런 사례를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이미 검찰에서는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발표되자 마자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일사천리, 빈틈 없는 일 처리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 그 죽음이 자살이건 아니건 간에- 고발녀는 사회의 눈총으로 대중의 그늘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정치의 중립적 사고로 생각해봐도, 죽음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회는 결코 건전한 양심이 살아있는 사회로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회를 책임지는 지도층이 자살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다면, 사회를 정의롭게 이끌어야 한다는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실제는 많은 말을 합니다.
그것도 죽음이라는 비할 수 없는 무게를 더하여 그 발언에 힘을 실어줍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말을 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인 줄 모릅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말은 이성보다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치인이 감성적인 호소를 할 때 그 나라가 나가는 방향은 위태로워집니다. 대중을 선동하는 자들이 상습적으로 쓰는 무기가 감성적 호소입니다. 죽음은 그런 감성적 비논리적 발언을 용인합니다. 이런 사례가 많아질 수록 사회의 이성적 판단이 흐려집니다. 이런 일들이 통용되면, 자살을 이용하는 정치집단이 생겨나고, 생명은 경시되고, 자살 폭탄테러와 같이 생명이 하나의 정치 수단으로 활용되는 악행이 생겨납니다.

죽음의 침묵으로 의혹을 변명하거나 또는 자신의 부당함의 항변하는 행태가 통용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그런 죽음이 미화되어서는 결코 안될 일입니다. 설사 자살로 문제를 마감하려 해도 문제는 문제대로 사회 규범적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회피성 자살이 효과가 없다는 것은 알게 됩니다.
자살로 문제를 피하려 한, 사자의 명예를 들먹이며 모든 비리가 미화되는 일은 용인되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살아 숨쉬는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골프 라이프
자신의 삶에 골프를 초대한지 이미 3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골프는 그 어떤 친구보다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동반자가 된 셈입니다. 아무리 귀한 삶의 동반자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는 이별을 하곤 하지만 그래도 골프는 상당기간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귀한 친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조건이 남아있기는 하지요. 골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근육과 필드를 거닐기 위한 재정적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또 다른 조건이 있다면 골프를 만나는데 함께 할 인간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니어 골프회가 운영이 잘 되는 것은 바로 그런 현상 즉, 동반자가 점차 사라지는 현상을 보완해주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도 그런 모임이 있는 탓에 베트남에서는 그 동안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동반자를 만들며 골프라이프를 즐겼는데 요즘 예상치 않게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골프라이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골프라이프의 위기는 가장 먼저 재정적 부담에서 다가옵니다. 라운드당 200불이 훌쩍 넘는 비용을 감당해야 하니 맘 편히 약속을 잡을 만한 금액이 아닙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세상이 어려운데 말입니다. 새삼 베트남에서의 골프가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요금이 좀 저렴한 퍼브릭 코스를 찾았습니다. 퍼브릭 코스를 돌게 되면 필요 경비를 10만원 정도로 막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정규코스에 비해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이 많지만 그런대로 적절한 가성비가 적용되는 듯하여 마음의 허락을 받을 만합니다. 물론 이렇게 궁한 티를 내며 골프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자조 섞인 질문이 올라오긴 하지만 그나마 없으면 이 게으른 몸을 어찌 관리하나요 하는 변명으로 위로를 찾습니다.

최근 몇 번 가 본 코스는 오클랜드에 있는 퍼브릭 코스인데 캐디가 없는 것은 빼고는 그런대로 하루를 즐길만 합니다. 아니 어쩌면 캐디가 없어서 더욱 즐거운 라운드가 보장됩니다. 카트에 먹을 것을 좀 준비해 다니면 소풍 나온 초등학생 마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코스가 좀 짧고 험하긴 하지만 스코어보다 라운드 자체에 의미를 두는 시니어 골퍼다 보니 감내할 만합니다. 그러나 남은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동반자를 구하는 일입니다. 장기간 한국을 비워둔 채로 지낸 덕에 함께 라운드를 할만한 동반자를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친구들도 은퇴 후 여러 가지 이유로 골프를 접은 친구가 많습니다.
마치 남의 동네에 와서 골프를 치는 듯이 누군가 불러주기만 기다려야 하는 형편입니다. 자연이 베트남의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해서 한국에 나와있는 베트남 시니어 골프 회원들의 서울 모임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최근 저의 경우처럼 한국에 나와서 베트남에 들어가지 못하는 분들을 모아 환담도 나누고 기회가 된다면 운동도 함께 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습니다.

베트남 교민들의 한국에서의 만남은 묘한 공동의식의 집합체로 나름 매력이 있습니다.
다음 호에는 그분들과의 만남에 대한 얘기를 보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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