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August 13,Thursday

파리를 사로잡은 이방인 ‘스트라빈스키’

그는 성공한 이방인이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독보적인 클래식 음악의 주류였던 파리를 매료시킨 최초의 러시안 ‘작곡가’였다. 당시 유럽에서 내로라하던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성을 파리의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세계 일류 예술가가 되는 지름길이라 여기며 프랑스로 몰려 들었고 서로 뜨겁게 경쟁했다. 그중에서도 스트라빈스키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음악가들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일반적인 상식을 거부하는, 자유분방하고 까다로왔던 당시 프랑스 파리의 관객들은 그의 음악 어떤 면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스트라빈스키의 성공에 주역이 되었던 초기 3대 발레음악을 살펴보면 그 궁금증이 해소될 것 같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디아길레프
너무나 식상한 이야기겠지만, 클래식 음악 역사 속에는 음악을 반대하는 부모와 이를 어기고 끝끝내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된 불굴의 음악가들이 많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그 중 하나이다. 부친이 마린스키 극장 소속 베이스바리톤이어서 어려서부터 오페라 극장에서 살다시피 한 스트라빈스키. 그가 진작부터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 너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엉뚱하게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당시 러시아 최고의 관현악 대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 ‘블라디미르’가 같은 법학과에 재학 중이었고, 두 사람은 음악을 매개로 절친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덕분에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하게 된 스트라빈스키는 그로부터 과감하고 혁신적인 20세기형 관현악기법을 배울 수 있었고, 당시에 습득한 작곡기법은 이후 스트라빈스키가 파리에서 관현악작품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아쉽게도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애제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펼치고자 고군분투하던 무명의 그는 이렇다 할 스승의 후광 덕을 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스승이 다른 제자(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버렸다. 거기서 그는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천부적인 흥행사이자 예술 기획자였던 러시아발레단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이다. 디아길레프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했던 러시아 출신의 발레 연출가로 원래는 작곡가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문하생이 되기를 원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자 그 자리에서 작곡가의 꿈을 접어 버린, 오기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언젠가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품들을 듣고선 ‘바로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의 기분나쁜 인연(?)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랬던건지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는 마음이 맞았고, 장래가 불투명했던 무명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동지 디아길레프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환상의 새, <불새>
디아길레프의 눈은 예리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담당하고 그가 총괄기획을 맡아 1910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발레 <불새>는 대성공이었다. 불새는 진홍색과 금빛 깃털을 가진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새이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수백 년을 살다가 마지막이 오면 향기 나는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자기 몸을 불살라 죽는다고 한다. 이때 불새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는 재 속에서 새롭게 불새로 부활한다고 한다.
발레 <불새>는 아름답고 신비스런 불새를 붙잡은 ‘이반’ 왕자의 이야기이다. 사냥을 나간 이반 왕자가 길을 잃어 마왕 ‘카스체이’가 사는 고성에 들어갔다가 불새의 도움으로 마왕을 죽이고 카스체이의 포로가 되었던 왕녀 ‘차브레나’를 구출해 결혼하게 된다는 동화같은 이야기이다. 마법, 전설의 새 등 초자연적이고 동화적인 소재를 탁월하게 표현한 스트라빈스키의 관현악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 디아길레프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일까? 그는 스트라빈스키가 완성한 악보로 첫번째 리허설을 하자마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작품이 연주된 다음 날이면 유명인사가 되어 있겠군요.” 라고. 스트라빈스키는 이후 이 작품을 세 차례(1911년,1919년,1945년)나 연주회용 모음곡으로 개작했는데, 그 중 1919년 버전이 가장 많이 연주 된다.

영혼을 가진 인형, ‘페트루슈카’
첫 작품 불새로 일약 스타가 된 스트라빈스키에게 디아길레프가 다시 한번 위촉을 해 완성한 발레음악이다. 니콜라이 1세 치하의 러시아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축제날, 서커스단 쇼에 사용되었던 인형 ‘페트루슈카’가 알고 봤더니 영혼을 가진 인형이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불새>의 초연 때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로서는 사람도 인형도 아닌 존재 ‘페트루슈카’(제정 러시아 시대의 농민들에게 흔했던 이름 ‘페터’의 애칭)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점이 상당히 신선하고도 파격적이었다. 전통 발레에만 익숙했던 파리의 관객들은 페트루슈카가 표현해내는 기묘하고도 광적인 동작, 공허한 눈빛과 표정, 고통스러운 내면의 파토스 등에 매혹되었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볼 때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명의 남자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권력의 힘에 치여 소외당하는 힘없는 농민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풍자한 것이다. 그 풍자의 도구로서 페트루슈카라는 인형을 사용한 것이고 말이다. 관객들은 단순한 치정극처럼 보이는 이 작품이 사실은 사회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끼는 자신들의 심정을 속시원히 대변해 주고 있는 듯 해 더욱 열광했다. 흥행에 성공하자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모음곡으로 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새>와는 다르게 단락으로 구분하기 애매한 연속적인 구조를 띄고 있어 모음곡으로 만들 수 없었다. 대신 피아노 솔로 버전으로 편곡했는데, 요즘은 피아노 버전이 더 많이 연주 되고 있다. 피아노 버전의 발레음악 ‘페트루슈카’, 강렬한 첫 도입부부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감상을 꼭 추천하고 싶다.

‘봄의 제전’, 논란을 뛰어넘다
불새, 페트루슈카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충천한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는 또 하나의 센세이셔널한 공연을 꿈꾸며 발레 <봄의 제전>을 발표했다. 초연이 있었던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 생기있고 역동적인 봄날의 사운드를 기대했던 관객들의 표정은 대략난감이었다. 아니, 불쾌함을 느낀 관객들은 심지어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향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럴법도 한 것이, 토슈즈도 신지 않은 맨발의 무희들이 추는 춤은 너무나 음란하고 선정적이었다. 악단의 음향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고, 무용수들은 발레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전위적인 동작을 하며 시끄럽게 발을 구르느라 바빠 보였다. 관객들은 비싼 티켓을 사서 들어와 이런 음란물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화가 났고, 급기야 공연을 중지하라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초연은 폭망이었다. 그렇다. 그건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시대를 앞서 나간 하.드.코.어였다. 도대체 어떤 봄을 표현했길래?? 내막은 이렇다. 봄의 제전은 따스한 봄날의 단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엄숙한 제전을 무대에 형상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봄을 주관하는 태양신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으로 이교도들은 늙은 족장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제물로 간택된 처녀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지켜본다는 내용이다. 상당히 주술적인 이 주제는 아직 기독교의 윤리가 대세였던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초연이 끝난 이후에도 작품에 대한 찬반양론은 뜨겁게 일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느낌은 어땠을까? 두려웠을까? 위축되었을까? 아니다. 비록 이제 겨우 몇 개의 히트곡을 낸 신진 작곡가였지만, 그는 시대를 리드할 자신의 음악언어에 대해 이미 확신이 있었다. 다만, 봄의 제전의 실패는 순전히 관객몰이에 눈이 멀어 난해하고 선정적인 안무를 조장한 디아길레프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초연된 이듬해에 봄의 제전의 연주회용 버전을 고국 러시아와 파리에서 연주했다, 발레는 모두 삭제한 채……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인생을 통틀어 얘기한다면, 그는 너무나도 카멜레온 같은 작곡가이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민족주의, 원시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신고전주의, 거기에 재즈와 미국의 팝까지 두루 섭렵해 참으로 다양한 음악사조를 소화해냈던 욕심많은 작곡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품은 그가 경력 초기에 발표한 3개의 발레음악 <불새>, <페트루슈카>,<봄의 제전>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어쩌면, 시대의 요구로 때묻지 않았던 젊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지향점이 이미 ‘봄의 제전’에서 완결되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는 초기에 발표한 3개의 발레음악을 통해 완벽하게 파리의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덕분에 러시아 변방 작곡가가 아닌 유럽 음악의 ‘주류’를 선도하는 작곡가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세계를 주도하는 20세기 관현악기법의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발레음악으로 1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가 그를 잊을 수 없게 해 주었으니까…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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