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27,Monday

아시아의 독립과 8월

1945년 이후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는 그야말로 재탄생을 맞는다. 즉, 일본이 아시아 전역을 침략하며 시작한 태평양 전쟁으로 태평양 연안의 거의 모든 아시아인들이 그들의 치하에서 전쟁물자를 제공하는 신민지의 노예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 두발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각 나라는 예기치 못한 독립을 맞게 된다. 대한민국과 인도가 8월 15일, 파키스탄 8월 14일, 인도네시아 8월 17일, 싱가포르 8월 9일 베트남 9월 2일 등 대다수의 아시아국가들이 일본군의 퇴각을 하며 독립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대한민국 역시 그 시기에 광복을 맞은 이 후 70여년이 지났다. 지금도 성대히 그날을 기념하고 있지만 그날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국민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도우사 일본이 패하고 광복을 맞았으니 어찌 기뻐할 일이 아닌가 라는 기본 정신은 동의하지만 다른 나라와는 달리 아직도 국토분단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우리가 과연 진정한 독립을 한 것인가 하며 자문하는 자기 성찰의 시각도 있다. 또한, 그 광복의 기쁨이 우리가 스스로 싸워서 쟁취한 독립이라면 길이 기념할 만 하지만 조선, 대한 제국의 독립에 과연 우리 민족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답이 궁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시각이 타당하다 할 것인가?

독립은 그냥오지 않는다
일본과, 태국, 그리고 중국(대만)을 제외한다면 아시아의 국가들은 대부분 2차 대전 이후 탈식민화결과로 이룬 아시아의 식민제국 붕괴이자, 독립국가의 성립이다. 아시아는 넓고 다양한 지역이다, 극동의 일본, 극서의 터키,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 베트남의 정글, 한반도와 중국의 온대기후, 인도의 사막까지 다양한 기후가 공존하고 다양한 민족이 사는 지역이다. 당연히 이들의 독립 과정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의 항복이라는 우연은 공동의 상항이지만 그 이 후의 행보는 각각 다르다.

세계정세의 변화와 무력 자주독립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우연과 자주독립의 혼합형태의 독립을 이룬 국가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아시아에 세계대전이 다시 올 수 있다는 수준의 뜨거운 과정을 거친 열정의 독립투쟁이다.

일본 통치의 잔혹함으로 촉발된 독립전쟁
일본 제국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석유 공급을 위해 동남아 석유 공급의 거점인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공한다. 일본군은 1942년 3월에 자바 해전에서 승리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통치할 때는 현지 정권을 앞세워 만든 괴뢰국을 내세워 통치했지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직접 군정으로 통치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처음엔 일본군을 네덜란드를 몰아내는 해방자인 줄 알고 반겼다. 실제로 일본은 네덜란드의 지배 때보다는 나아졌다는 것을 의식을 만들기위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 자치권을 허용하였고, 인도네시아인 군대를 조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의 현지자급자족 정책을 따른 착취가 시작되자, 본색을 드러내며 네덜란드 치하보다 훨씬 잔혹한 착취를 자행한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인도네시아에서도 민족주의, 독립주의가 고조되어 일본 제국에 저항한 저항 운동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이 본격적으로 들고 일어나기 전에 일본 제국은 항복해버렸고, 일본군은 일본 제국의 항복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철수한다.

피로 물들은 자주독립으로의 길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적국인 네덜란드에게 인도네시아를 다시 빼앗기느니 차라리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도네시아 중앙 국가위원회(KNIP)’가 출발했고 인도네시아에는 연합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동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이, 자바 섬을 비롯한 중앙 인도네시아 쪽에는 영국군이 상륙했으며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 문제, 그리고 잔여 일본인들의 송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문제는 인도네시아는 스스로 독립을 선언했지만, 원래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하였던 네덜란드가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국은 원래 연합국의 일원이자 식민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재점령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말 동인도에 진주한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단순 소요로 치부하고 네덜란드를 도와 진압에 들어간다.

수라바야에서 영국군은 독립 지지파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는데, 이 수라바야 전투(1945년 10월 27일~11월 20일)에서 영국군은, 약 12만 명에 달하는 독립군(10만 정도는 무장 수준이 빈약한 민병대)에 맞서, 최대 3만 명의 정규군 및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해서 힘겹게 승리하게 되지만 전투중 지휘관이었던 A. W. S. 맬러비 준장까지 전사하게 되는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한편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Ambarawa)에서 벌어진 암바라와 전투(1945년 10월 20일-12월 15일)에서는 독립군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독립군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고 만다. 이러한 결과에 직면한 영국은 동인도의 독립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판단을 유보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게 되며, 설상가상으로 인도네시아에 배치된 인도 제국군 가운데 인도네시아 독립파 편으로 돌아서는 인도인까지 나오게 되면서, 영국은 1946년부터는 네덜란드 지지를 철회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을 외교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다시 온 네덜란드의 재침공 그리고 휴전
네덜란드는 세계 대전의 여파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국왕은 영국에 망명가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야욕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영국군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철군을 약속하였고 인도네시아 측과 네덜란드 측은 임시로 정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 정전협정은 영국군의 철군 이후 곧 깨졌으며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 재침공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독립파와의 협상이 불만족스럽자 1947년에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12만 병력을 동원하여 전면 공세에 나섰다. 이 작전(Agresi Militer Belanda I, Operatie Product)은 네덜란드 측의 전략, 전술적 대성공이었고 인도네시아 측 사상자는 최대 15만에 달했지만 네덜란드 측 사상자는 6천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정도로 커져버린 전쟁은 국제적 주목을 끌었고 네덜란드도 독립파를 완전히 소탕해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네덜란드와 독립파는 1948년 판모크선(Garis Van Mook)에 따라 일단 렌빌 협정(Perjanjian Renville)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이에 따라 자바에서 바타비아(자카르타), 수라바야, 보고르, 치르본, 스마랑, 말랑은 네덜란드 영역 하에 남았고 욕야카르타와 마디운 및 서부 일부 지역은 독립파 영역이 되었으며 네덜란드군은 독립파 영역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휴전은 양측이 만족하기 어려운 거래 였다. 결국 1948년 12월 19일, 네덜란드 측에서 휴전을 먼저 깨뜨리고 자바 및 수마트라에서 독립파 지역으로 재공세에 나서게 된다.(Agresi Militer Belanda II, Operatie Kraai) 여기서도 독립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술, 전략적으로 패배하고 독립파의 수도 역할을 하던 욕야카르타가 점령되었지만, 주변국인 베트남의 정세가 언론에 의하여 주목을 받고 국제적인 압박이 미국에게 가해졌듯이, 동인도의 상황도 연일 서방 언론에서 주목 받았으며 네덜란드에 가해지는 국제적 압박이 거세어졌다.

1948년 12월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에 적대 행위 중지를 요구하고, 1949년 1월에는 독립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를 재수립시키도록 요구한다. 일단 자바에서는 48년 12월 31일, 수마트라에서는 49년 1월 5일 휴전이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전쟁의 흐름은 미국의 등장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미국은 유럽 부흥 계획의 일환으로 마셜 플랜 등 엄청난 자금을 유럽에 쏟아붓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네덜란드는 미국 돈으로 제국주의 시절 버릇 못 버린 네덜란드가 전쟁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이미지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고 네덜란드 측에 ‘협상하지 않으면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본국의 피해를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는 군사 행동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네덜란드의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며,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된다.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협상에서 네덜란드가 1949년 12월 27일 공식적으로 서뉴기니를 제외한 동인도 지역의 주권을 인도네시아 합중국에 이양함으로써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완성된다. 자국민의 대대적인 독립투쟁으로 인한 희생과 피가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노력과 끈기의 전략적 사고의 완성 (베트남)

프랑스 식민정부의 심한 착취 독립운동을 생성시키다.
근대역사에서 베트남의 독립과정은 베트남이 다른 인도차이나 지역보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인구도 많고 농사짓기도 괜찮은 편이어서 경제적인 이득이 높을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점이 많은 조건은 근대 이후 식민통치를 시작한 프랑스 식민당국이 타지역에 비하여 베트남에 관심이 높았고, 이로 인하여 착취가 심한편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프랑스의 침략 초기때부터 게릴라 방식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무력의 차이와 여러 상황으로 인하여 실패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저항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한국과 비슷한 것 같지만, 국제주의 성격이 강했던 베트남의 독립운동
한국의 독립운동과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비교한다면, 한국도 처음에는 의병으로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독립운동 노선이 다양화되고 바뀌게 되는 과정을 겪지만, 이러한 점은 베트남도 비슷하다. 즉 식민주의라는 현실을 받아 들이면서 독립운동의 방향이 국내외의 세력을 규합시켜서 체계적인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1927년 창설되었다가, 1930년 해체된 베트남 국민당이다. 이들은 1929년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기시작한다. 상황을 타개를 위하여 1930년 엔 바이(Yen Bai)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키지만, 프랑스군에게 진압된다. 실패의 댓가는 가혹했다, 국민당원 몇천명이 체포되었고, 당수인 응우옌타이혹은 사형에 처하게 되자 운남성으로 도망하게 된다. 즉 독립운동을 규합하고, 정치제도화 할려는 첫 시도는 실패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된다.

또한 프랑스에서 독립을 하려면 프랑스 지배에 시달리고 있는 이웃의 모든 인도차이나 국가와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당시 전세계 공산당을 중앙에서 지휘하던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았고, 베트남 독립의 영웅인 호찌민이 본래는 외교를 통한 노선을 통해 독립을 모색하였던 성향이 있어서 베트남 독립은 한국의 개별적 독립운동과 구분된다. 한국의 독립지사들은 우선 정치적으로 비공산당계가 독립을 이끄는 상황이었고, 이들은 국제주의자라기 보다는 일국주의 즉 한국만의 독립을 외치던 부분이 강했다. 심지어 이승만을 비롯한 외교 독립운동가들도 한반도의 지리적 고립으로 인하여 주변 세력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아서 국제적 연대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1930년 베트남 공산당 창건
베트남의 독립운동의 특징은 공산당의 활동을 중심으로 베트남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국민당의 옌 바이 봉기와 비슷한 시기인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코민테른(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정당의 국제적 조직체)에서 파견된 호찌민의 주도로 베트남 공산당이 창설된다. 같은해 10월 베트남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서 베트남내 이미 있던 인도차이나 공산당, 안남공산당을 통합하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재 출범하게 되는데. 1930년부터 1945년의 베트남 독립운동은 바로 이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세계2차대전과 베트민 그리고 대기근
공산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40년 식민본국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독일에 항복하자, 프랑스가 사실상 동맹국인 독일의 위성국으로 편입되고, 세력이 약화되자 동남아시아 세력확장을 통해 군사적 전초기지로 마련하기 위하여 인도차이나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일본은 독일을 등에 업고 프랑스본국을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락을 얻어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키기 시작한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지휘를 맡게 된다. 이 조직은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조직원을 받아들이면서 1943년에는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이 된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지고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제국군 남방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리고 이때 즈음 추축국세력인 비시 프랑스 본국 정부가 몰락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드골이 이끄는 연합군에 속한 자유 프랑스 쪽에 갈아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하면서, 일본의 본격적인 군정 지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은 통치를 위하여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괴뢰국을(베트남 제국,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이 성립시킨다. 아울러 일본의 통치가 본격화 되면서 엄청난 식량 수탈을 당하게 되고 1945년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겪으면서 베트남 독립운동은 오히려 탄력을 받게 된다.

 

베트남의 독립이 9월 2일이 된 이유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가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다. 특히 아시아인이 프랑스를 굴복시켰다는것은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고무시키는 심리적 효과가 있었다. 당시 독립운동은 공산당이 조직한 베트민이 중심이었고, 독립동맹조직 답게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조직,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베트민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되면서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공산당은 뒤에서 지원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군대 조직도 완성되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정규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항복하자 호찌민 휘하의 베트민은 8월 16일 총 봉기를 일으켜 8월 19일에는 하노이를 장악, 1945년 8월 25일에는 사이공까지 공산당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를 8월 혁명(까익 망 탕 땀·Cach Mang Thang 8)이라고 한다. 8월 30일에는 응웬 왕조의 마지막 왕인 바오 다이(Bao Dai)왕이 권력의 상징인 황금의 보검을 비엣민 대표에게 넘겨줌으로써 143년의 응웬 왕조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3일 후인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서명일에 맞춰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자신이 직접 작성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독립의 기쁨도 잠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독립전쟁) 발발
9월 2일 베트남은 독립을 했지만. 상황은 복잡했다 베트민은 북부지방 장악에 성공했지만. 남부는 프랑스군을 대신하여 영국군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인도 제국과 버마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고,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현지 프랑스 인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치안 유지에 동원하고, 베트민을 인정도 하지 않고 계엄령을 선포하여서 베트남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결국 영국군은 프랑스 식민당국에게 통치권을 반환하고 1946년 철수하였다. 그리고 영국군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베트민과 협상 한번 하지 않고 베트남으로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프랑스 제 4공화국은 최초에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주는 듯 하였으나, 곧바로 입장을 바꿔 베트민 주도의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과 프랑스 식민당국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파기하면서, 자신들이 장악하지 못했던 북부지방으로 프랑스군 재진주를 시작했다.

우세한것으로 보이는 프랑스, 전략적으로 파고든 베트남의 저항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는 베트남 재점령을 위하여 약 40만명의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전쟁 초기 4년간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였고, 그 사이 정치적 활동을 통하여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낮에는 프랑스, 밤에는 베트민이 통치하는 게릴라 전쟁 방식으로는 프랑스를 대상으로 완벽한 승리를 얻기 힘들었기에 이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회는 1950년 찾아온다, 이때 부터 알제리 같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중심으로 독립요구가 나오면서 프랑스 군의 전선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민심의 지지와 공산국가의 지원으로 힘을 키운 베트민은 1950년 9월 중순 중-월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하여 성공하였고. 본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은 뒤 1950년 12월 총공격 계획까지 세울 정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저항은 아직까지 만만치 않았고, 하노이 해방을 위하여 1952년까지 베트민은 기다려야 했다. 1952년 프랑스군 사령관인 드 타사니 장군이 지병을 이유로 귀국하게 되면서 전세는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진행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베트민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공세를 천천히 벌이게 되었고,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은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0,0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베트민은 이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전선이 확대되고 있기에 더이상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Au Revoir France( 안녕 프랑스), 그러나 나라는 분단된다.
1954년 7월 21일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인도차이나 총선거 수행을 위한 일부군대를 제외하고는 철수하게 되었고, 베트남의 독립은 확정된다. 그렇지만, 문제는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했던 17도선 이남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지역이었고, 본래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했지만, 늘어나는 희생과 전비로 식민 통치의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는 남베트남의 총리였던 응오딘지엠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하였고, 베트민도 이 지역에서는 큰 영향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정치적인 위치를 이용해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고, 결국 응오딘지엠이 프랑스군의 주둔을 비난하는 상황까지오자 프랑스는 총 선거의 행정업무를 돕고 선거 실시를 감독해야 하는 휴전협정 이행조차 파기하고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완전 철수해 버린다. 이후 프랑스 대신 남부정권을 후원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은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였고. 결국 응오딘지엠은 1955년 7월과 8월에 총선거를 위해 협의하지 않을 것임을 재통보하면서 베트남의 분단은 확정이 된다. 여기까지가 프랑스의 철수로 일차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의 독립과정이다.

자주독립은 아름답지만 험한길
지금까지 국민 스스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독립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국가의 기본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경우를 공부해 봤다. 두나라 다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의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 또 다른 고비를 넘겨야 했고 그런 투쟁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키웠다. 반면 한국의 광복은 어떠한가.한민족은 일제 강점기 시절 국내에서는 거의 숨소리 조차 크게 내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심한 탄압으로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활동은 불가했다. 대부분의 독립투쟁은 국외인 중국의 만주를 근거로 행하여 졌지만 이 역시 식민제국의 정책을 바꾸는데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군 덕분에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아마도 한국을 일본의 잔여물로 생각했는지 독일처럼 러시아에게 38선 이북의 통치권을 양도하면서 이데올로기갈등이 시작되고 그것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며 한민족은 인류역사상 가장 혹독한 고난을 겪는다.

한국은 대규모 전쟁으로 3백만의 국민을 사지에 몰아넣고 서도 국토 통일을 이루지 못한 비극적 민족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광복절에 그저 기뻐하며 감사 행사를 벌리고 있다. 조상이 내려준 국토를 남의 손으로 우연히 되돌려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처럼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결정하지 못했다. 국민이 합심하여 이국인을 볼아내는 대신 이국군대를 활용한 국민간의 전쟁을 선택한 대가다.
자신을 돌아보려면 가끔 타인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다.

75주년이 되는 광복절, 이제 우리는 지구촌의 일원으로 우리만의 광복이 아니라 아시아의 광복이라는 점도 상기해볼 만하고, 이런 글을 통해 다른 아시아국가들이 진정한 독립을 어떻게 이루었는지 돌아보며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또한 희망한다.

참고문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https://ko.wikipedia.org/wiki/인도네시아_독립_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https://ko.wikipedia.org/wiki/제1차_인도차이나_전쟁
오피니언 뉴스 (2018) ‘처절한 저항 통해 얻은 인도네시아 독립’ https://bit.ly/3kH7tT1
도위창(2015)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https://bit.ly/33PEfvs
송정남(2016) 처음 읽는 베트남 史 https://bit.ly/2Fdpec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