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26,Sunday

광해군과 북인의 정권장악

“전쟁이 나면
임금 곁에 숨어야 안전하며
공신도 되지 충절이 넘쳐서
전투에 참가하면
역적으로 몰려서 집안이 거덜난다”

난 이야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곧이어 분열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군의 침략을 감지하고도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왜군과 싸워야 하는 조선 장수들은 도망가기 바쁩니다. 문관만 고상하고 무관을 천시하는 성리학의 풍조가 빚어낸 현상입니다.
의심받은 무관들
신립 장군의 기마병이 충주에서 몰살했으나 상주에서 도망친 경상도 순변사 이일 장군은 충주 전투가 시작되자 또다시 도망갑니다. 이일은 한양으로 도망가서 신립의 패전 소식을 선조에게 고하고 이렇게 건의합니다. “오랑캐의 기세가 드세니 일단 피하시어 훗날을 도모하소서” 이일은 자기처럼 선조에게 도망가자고 채근하고 연이은 패전에 불안한 선조는 북쪽으로 몽진을 갑니다. 다수의 신하들은 “임금이 한양을 버리면 백성들의 항전 의지가 꺾일까 두렵습니다” 몽진 반대를 주장하는 신하들의 의견 따위는 이미 겁먹은 선조에게 마이동풍 입니다. 도망가는 선조를 추격하던 왜군이 평양성까지 따라오자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평양성을 사수하라 이르고 자신은 의주로 몽진을 갑니다.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곧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가려고 명나라 황제에게 압록강 도강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전쟁을 지휘할 국왕이 도망갈 생각이나 한다면서 명나라 입국을 거절합니다. 참으로 국제적 망신입니다. 선조의 망명이 거절 당하자 이번에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 승전보가 도착하고 곧이어 의병들의 활약이 보고 됩니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의병들의 승전 소식에 기뻐하던 선조는 차츰 불안해 집니다. 임금인 자신은 도망가고 이순신과 의병들이 활약하여 전세가 호전되니 선조의 컴플렉스와 질투심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던 중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병 5만명이 조선에 도착 합니다. 불안감과 질투심에 가득찬 선조는 엉뚱한 주장을 합니다. “재조지은” 이는 조선을 구한 명나라의 은혜라는 뜻 인데요. 진정한 의미는 이순신과 의병들 덕분에 전쟁을 이긴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보내준 군대 때문에 임진왜란을 승리 했다는 뜻 입니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재조지은” 단어가 유행 합니다. 훗날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때 서인들은 “재조지은”을 모르는 무도한 임금 광해를 몰아내자는 명분을 세웠습니다.

의심으로 가득찬 선조는 자신의 조상인 전쟁 영웅 이성계 처럼 이순신도 백성들에게 받는 신뢰와 군사력을 이용하여 역성혁명이 일어날까봐 걱정을 합니다.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 죄로 죽인 선조는 이순신도 제거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임진왜란 공신책봉을 할때 선조는 한심한 행동은 최고점을 찍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군인과 의병이 받는 선무공신에 이순신을 비롯한 18명이 책봉되고 선조의 어가를 따라다닌 호종공신은 52명 입니다. 호종공신은 문관 대신들과 의원 내관 궁녀등 다양합니다.

새로운 공신과 재조지은
일본의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대는 철수 합니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끝나고 조선은 전쟁 후 수습에 들어갑니다.
선조는 대단한 후안무치의 군주입니다.
전쟁공신 104명 책봉을 하는데 군인은 18명에 불과 합니다. 선조의 궤변은 “임진왜란의 승리는 조선 수군과 의병 때문이 아니라 명나라가 도와준 덕분이다. 과인은 명나라 지원군을 얻기 위해서 의주까지 갔고 중국으로 건너가 지원병을 요청하려는 과인의 뜻을 명 황제가 가상히 여겨서 수락했다. 때문에 의주로 몽진 갈때 과인을 수행한 86명의 대신들과 의원 내관 궁녀들의 충절이 나라를 살렸다.” 이정도면 국왕이 아니라 거의 정신병자 수준입니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전쟁이 나면 임금 곁에 숨어야 안전하며 공신도 되지 충절이 넘쳐서 전투에 참가하면 역적으로 몰려서 집안이 거덜난다” 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또한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준 “재조지은”을 강조합니다. 선조는 전쟁이 두려워서 도망 갔는데 조선 수군과 의병들은 남아서 눈부신 활약을 하니 선조 자신과 비교되는 창피를 극복하려고 취한 조치인데 방법이 너무 유치합니다. 선조는 14세 어린 나이에 선대왕 명종이 익선관을 써보라는 어명에 재치있는 답변을 하여 임금이 될 정도로 영리하지만 다른 무엇이 조금 부족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절대적으로 변합니다.
이러한 선조의 발언을 서인들은 정치적인 계산으로 움직여 훗날 인조반정 후 서인들은 (훗날 노론) 3백년 넘게 정권을 누리다가 결국에는 조선이 망하게 됩니다. 한 정당의 300년 집권한 사례는 세계사에도 유례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우수한 정치제도인 붕당정치는 양반들의 지나친 권력욕 때문에 이렇게 변질 되었습니다.
선조는 55세에 13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영창대군 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때 활약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세자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영의정 유영경 등 서인들과 왕세자 변경을 비밀리 의논합니다. 서인들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임금이 되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많이 배출한 북인으로 권력 교체가 예상됩니다. 선조를 따라 몽진하고 공신 책봉을 받은 많은 서인들은 목숨을 걸고 광해군 제거에 나섭니다. 하지만 영창대군 출생 2년 후 선조는 사망하고 1608년 광해군이 조선 제 15대 국왕으로 등극 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요동을 칩니다.

광해군의 즉위와 북인의 정권장악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임진왜란 때 의병들을 모아 세자 광해군과 함께 전투를 벌인 북인들이 정권을 잡습니다. 서인들은 권력에서 소외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잃는 경우는 집권당의 과욕이나 실수 때문에 일어납니다. 광해군은 세자시절 부왕 선조가 세자를 교체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는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고 2년 후 선조는 사망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2년은 20년 이상 긴 시간이기도 했고 고통의 시간입니다. 차기 권력을 두고 싸우다가 패배하면 권력은 물론 목숨까지 끝납니다. 게다가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서인들이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에워싸고 있으니 항상 의심이 갑니다.

집권당 북인은 8살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역모에 연류되어 폐모 시킵니다. 광해군 보다 어린 계모 인목대비는 그래도 국왕의 어머니 입니다. 성리학 논리로 서인들은 큰 명분 2개를 가집니다. 첫번째 광해군은 선대왕 선조의 유지인 “재조지은”을 어기고 명나라와 청나라를 같이 취급하는 중립외교를 하여 상국 명나라 황제에게 불충한 죄. 둘째는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모한 불효죄 등 두가지 명분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인조반정과 서인의 독주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고 서인들의 지지를 받는 능양군이 조선 제 16대 국왕으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인조 입니다. 서인들은 집권하자 북인들을 역모로 몰아 씨를 말립니다. 이제 조선에서 북인들은 사라집니다. 집권당 서인과 야당 남인이 존재하지만 남인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서인들의 독주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100년 후 집권당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쪼개집니다. 숙종때 장희빈의 아들 세자 경종을 지지하는 남인과 소론 최숙빈의 아들 영인군 (훗날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으로 쪼개집니다. 이렇게 4색 당파는 생겼습니다만 4색 당파가 공존했던 시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의 신흥 무력과 합심하여 당시 부패한 기득권 층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개혁 과전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강건파 온건파로 갈라집니다. 당시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산골에 숨어 살던 신진사대부 온건파들은 200년 후 조선정치의 주류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사림파” 라고 불리는 신진사대부 온건파 그들은 300년 넘게 조선을 지배했고 3번 당파가 쪼개지고 당파 안에서 파벌이 생겼습니다. 이는 현대정치와 별반 차이가 없으나 부패한 양반들은 신분제도를 악용하여 백성들을 심하게 착취 하였습니다. “견제 세력 없는 절대권력 300년” 은 조선의 우수한 제도를 병들게 하였고 결국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정치에서 발생하는 권력형 비리, 정경유착, 입시부정, 매점매석, 채용비리 등 모든 것들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보다 더 심했습니다. 역사의 교훈은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안내
필자의 개인 사정으로 역사 칼럼은 당분간 중단 됩니다. 앞으로는 야사 이야기도 많이 보충하고, 좋은 역사 자료들을 찾아서 더욱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진행 하겠습니다. 또한 사건 중심으로 역사 이야기를 진행하되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쉽게 설명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역사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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