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October 23,Friday

‘프로코피에프’의 슬픈 유산

제정 러시아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체제로 탈바꿈하던 1917년.
급변하는 정치적 기류에 불안했던 상류층 귀족들은 자제를 외국으로 도피시키거나 아예 온 가족이 망명길에 올랐다. 1891년생의 청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역시 잠시 고국을 떠나 이 혼란을 비껴가려고 했다. 그런데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수상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고국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지금 떠나려는 당신,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것이오. 혹 다시 들어온다 해도 당신은 냉대를 면치 못할 것이오.’ 프로코피에프는 이 메시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게 될런지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잠시’ 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긴 채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시작은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보수파 청중들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미 너무 많은 영구 망명 음악가들의 서바이벌 무대가 되어버린 미국에 염증을 느낀 프로코피에프는 파리행을 선택했다. 20세기 초 유럽 문화의 핵심도시였던 파리에는 러시아 출신의 성공한 발레 기획자 ‘디아길레프’ 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가 있으니 미국 무대보다 더욱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는 프로코피에프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고, 그의 음악활동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고국에 대한 향수병으로 마음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고국의 언어, 음식,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프로코피에프는 친구인 작곡가 ‘미아스코프스키’ 의 집요한 종용에 못 이기는 척하며 소련으로의 영구 귀국을 결정하게 되었다. 순진하게도 고국의 예술적 환경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다소 근거없는 장밋빛 환상을 가지고 말이다.

소련 당국은 귀환한 음악가 프로코피에프를 열렬히 환영했다. 호화스러운 아파트와 높은 연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어질 채찍질을 위한 당근에 불과했다. 얼마 안가 프로코피에프의 가족(아내 리나와 두 아들)은 영구 귀국을 요구 당했고, 가족들은 프로코피에프를 위협하기에 좋은 볼모가 되어 갔다. 프로코피에프는 점점 공산주의와 스탈린을 찬양하는 작품만을 쓰도록 강요당했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종종 ‘사회주의 정체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거나 ‘좌파로서 개성이 없다’는 낙인을 받곤 했다. 심지어 1938년 미국으로의 순회 연주 후 당국은 그의 여권조차 압수해 버리며 해외 활동을 크게 제한했다. 거기에, 스탈린의 충복 ‘즈다노프’ 는 24시간 프로코피에프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즈다노프는 미국과 파리에서 건반이나 두드리던 부르조아 음악가에게서 끊임없이 꼬투리를 잡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참 아둔했다. 프로코피에프는 창살없는 감옥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온 셈이었다. 스탈린 체제하의 예술계는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든 살얼음판이었다. 수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사상을 의심받아 대숙청에 휩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로코피에프는 당의 눈 밖에 나지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소련 정권과 야합하는 것처럼 연기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음악이 소련 체제를 수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통렬한 풍자의 메시지’ 라고 봐야 한다. 그의 작품은 한계점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현대음악 어법으로 중무장 되어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무자비하고 아둔한 스탈린 정권의 하수인들을 신나게 비웃어 주었던 것 같다. 오페라, 발레,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 독주곡, 합창, 가곡 등 거의 모든 장르를 통해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오늘은 그가 스탈린 체제 하에서 현실의 모순과 사투를 벌이던 당시 작품들 중 잘 알려진 몇 곡을 소개한다.

그의 로맨티시즘, ‘로미오와 줄리엣’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소련(소비에트 연방공화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파리에서 인연을 맺게 된 발레 기획자 디아길레프는 소련 당국의 정책적 기조가 고전적인 소재에 호의적일 것이라며 볼쇼이 극단을 위한 음악을 한번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때마침,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을 읽게 된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이 추구하던 고전적 로맨티시즘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해 발레 음악으로 각색하게 되었다. 프로코피에프의 세련되고 날카로운 감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몇 년 후인 1938년 체코에서 초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애초에 계획되었던 소련에서의 초연은 2년이 더 지나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라이트모티브(유도 동기)’ 가 키워드이다. 어려운 음악 용어처럼 들리지만, 라이트 모티브란 각각의 등장 인물과 그들의 감정, 핵심적인 사건마다 주제선율을 붙인 것을 말한다. 좀 더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시청하는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나 특정 사건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동일 선율 즉, 테마송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작품은 원래 발레음악이지만 ‘세 개의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된 것이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추억 속의 전래동화, ‘피터와 늑대’
자신이 떠나 있었던 20년 동안 고국의 음악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했던 프로코피에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극장들을 하나둘 순회하던 중 어린이용 오페라를 관람하게 되었다. 마침, 어린 두 아들과 함께 공연을 보고 있던 그에게 극장장 ‘나탈리아 사츠’ 가 다가와 어린이용 작품을 의뢰해 만들어진 작품이 ‘피터와 늑대’ 이다. 이 작품은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러시아 전래동화를 토대로 한 것이다. 소년 피터가 늑대로부터 여러 동물들을 구하고, 기지를 발휘해 그 늑대를 생포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동화구연과 음악이 함께 이루어진다. 프로코피에프는 이야기 서두에 등장인물과 그 인물들을 표현하는 악기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주인공 피터= 현악 4중주/ 피터의 친구 새= 플룻/ 오리 = 오보에/ 고양이 = 클라리넷 /할아버지 = 바순 /늑대 = 3개의 호른/ 사냥꾼 = 팀파니/ 총소리 = 드럼과 큰북.
다양한 클래식 악기소리를 경험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재미있는 작품으로,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 와 함께 클래식 입문자나 어린이들을 위한 곡으로 인기가 높다.

자유를 향한 찬가, ‘교향곡 제 5번’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프로코피에프는 스탈린이 만들어 준 지하벙커에서 작곡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스탈린은 그에게 당과 인민을 선동할 음악을 요구했는데, 이를 받들어 완성된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즉 스탈린을 찬양하는 강력한 ‘찬미가’ 이자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전쟁 교향곡’ 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프로코피에프의 의지가 아니었다.어쩌면 그는 이 교향곡을 쓰는 내내 전쟁없는 세상에 대한 염원과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했던 것일까? 1945년, 모스크바에서 자신이 지휘한 ‘교향곡 5번’ 의 초연은 그의 일생 중 손꼽힐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연주 직후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리하여 ‘교향곡 5번’ 을 끝으로 그의 정력적인 작품 활동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마지막 독백,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 134’
스탈린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낸 음악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이데올로기나 정치 따위엔 관심 없었던 그는 그래도 “오직 당과 인민만을 위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음악을 쓰겠다” 는 공개서약까지 하며 살아남기위해 버둥거렸다. 그리운 마음으로 다시 찾은 고국 러시아는, 아니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은 너무나도 혹독한 굴레였다. 고된 창작업무와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육신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고혈압과 협심증에 시달리던 그는 1953년 3월 4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아니,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같은 날, 철권정치의 독재자 스탈린 역시 사망했으니…두 사람의 악연은 결국 생의 종착지까지 이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장례식으로 전국이 초비상 사태였던터라 프로코피에프의 죽음이 알려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사망하던 즈음 붙들고 있던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134’. 그는 끝내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했다. 이 소나타의 첼로 선율은 자신의 기구했던 삶을 반추하는 외로운 독백으로 들린다. 마치 “나는 이렇게 살아냈다네…” 라고 읊조리는 것만 같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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