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선악의 저편’ – 프리드리히 니체 (2)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지음
(참고한 책: ‘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저,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02.10)

이 책은 니체가 그의 사상을 홍삼 다리듯 진액을 만든 다음 한번에 쪽 짜 먹을 수 있게 간추린 액기스다. 책 서문의 시작은 이렇다. ‘진리가 여성이라면’.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게 심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화난 얼굴을 한 채 굵은 안경을 끼고 책을 파고들며 진리를 쫓는다면 아마 진리는 도망가지 않겠는가. 선악의 저편 서문에서부터 니체는 세계를 대하는 철학자의 자세에 관해 주저없이 일갈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 특히 철학자들은 ‘진리에 접근할 때 가졌던 소름 끼칠 정도의 진지함과 서툴고 주제넘은 자신감이 바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졸렬하고 부적당했다는 혐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진리를 갈애한 나머지 진리도출을 마치 경주와 올림픽 경쟁을 하듯 격투의 장으로 올려버린 철학자들을 맹비난 한다.

그들은 철학적 논리를 신격화했다고 말하는데 이를 테면 논리를 유머로 뭉개거나 학적 체계를 생략하고 가볍고 빠르게 그렇지만 홍심을 찌르는 의견들은 철학 경연장에서 일찌감치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선과 악, 옳고 그름, 도덕과 윤리, 이편과 저편, 승리와 패배, 남과 여, 세계는 오직 두 가지의 이분법으로 재단되었고 인간은 스스로 만든 이분법의 가치로 옭아 매어지고 그 너머와 그 아래를 보지 못하는 유치의 인간으로 축소돼 버렸다. ‘선악의 저편’은 작아진 인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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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몽되었고 무감각해졌다. 선사시대 지구에 살던 모든 인간의 지식의 합보다 옆집 초등학생 6학년 철수의 지식이 더 많을지 모르는 오늘이다. 의문이 든다. 유래 없는 지식의 폭발적 발생과 습득은 우리를 지혜로 이끌었을까? 삶은 행복해졌을까? 선사시대 모음으로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과 오늘날 노트북을 앞에 놓고 있는 우리 중 누가 지혜로울까? 우리는 계몽되었으며 자유로운 개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과연 누구의 관점으로 계몽되었길래 이리도 불행하고 자유롭지 못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배우려는 지식은 과연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가? 누구를 위해 배우고 익히며 기를 쓰고 자기계발에 열중하는가? 그것은 당신 안에 당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답한다. 당신의 내면에 서식하는 도덕과 윤리적 가치는 당신이 한번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의심한 적 없는 세상의 가치다. 나 아닌 세상의 윤리, 세상의 도덕, 세상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스스로 제어하고 억압한 것이 지금의 당신이라 말하는데 어쩌면 확실하다고 믿는 당신의 소소한 행복조차 당신의 행복이 아닐 거라는 오지랖을 마다하지 않는다. 남들이 편안해 하는 장면에서 당신이 편안해 한다면, 남들이 맛있다고 여기는 음식에서 당신도 맛있어 한다면 그래서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거의 모든 당신의 행복은 세상에 길들여지거나 만들어진 거짓 행복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당신이 불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고 있기나 하냐고.

그리하여 니체는 책에서 관점주의를 소환한다. 개구리는 사람처럼 먼 곳을 보지는 못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사물은 인간이 보는 시각보다 열 배 크게 보인다고 한다. 아무리 빠르고 작은 벌레라도 개구리 눈 앞을 지나가게 되면 백발백중 먹히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 개구리의 시각이 인간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각자의 퍼스펙티브는 타자와 완벽하게 다를 수 있다.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행복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 ‘페르소나’는 니체철학의 핵심이다. 태어나자마자 들씌워진 자식으로서의 인간, 사회적 인간, 학교의 인간, 회사의 인간, 부모의 인간, 어른, 남편, 아내, 친구, 스승, 부장, 과장, 대리.. 온갖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가고 그 가면에 걸맞는 윤리와 도덕을 마치 제 옷 인양 입고 있다. 인간은 세계를 부단히 위조하며 살아간다. 살면서, 늘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있지만 실제, 때가 오면 슬그머니 발을 빼는 슬픈 패배를 되풀이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현실로부터 지켜 낼 힘을 스스로 제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생각에 복종한다. 우리는 어떻게 가면을 벗고 나만의 퍼스펙티브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니체가 가장 사랑한 부사다. 어쩌면 세상이 틀린 길로 가는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그것은 거짓인지 몰라,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도덕은 도덕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은 지금의 가치를 무로 만들고 미래로 인도하는 부사다. 니체의 ‘어쩌면’이라는 부사를 두고 데리다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ce qui n’est pas encore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ce qui n’est plus 을 완전히 현재적으로 말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즉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과거를 다시 유동하게 하는 말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도래하도록 당기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라는 부사는 지금 여기에 도래할 사건을 사유하게 하는, 도래하는 것을 맞이하는 실천적 단어다. 어쩌면은 율법에 대한 의심이자 율법의 효력 정지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참으로 도래하는 철학자를 수식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율법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것, 가치에 가치를 다시 묻는 이른바 가치의 전도는 ‘어쩌면’을 조용히 되 내이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행복하고 싶은가? 세상이 불행으로 간주하는 곳으로 전진하라. 기어코 찾아낸 자신의 행복은 숨겨라.
“귀중하고 손상되기 쉬운 어떤 것을 숨기고 있어야 할 사람은 무거운 쇠테가 박히고 푸른 이끼가 많이 낀 낡은 포도주통처럼 평생을 투박하게 둥글둥글 굴러다닌다. 그의 섬세한 부끄러움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니까. 그리고 무로 향하는 조각배에 올라타자.

“저기 조각배가 떠 있다. 길은 아마도 저 너머 광대한 무로 나 있으리라. 그러나 그 누가 이
어쩌면이라는 것에 올라타려 하겠는가?”
-선악의 저편,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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