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ne 18,Friday

나이가 들어갑니다

어김없이 한 살을 먹습니다. 설날에 떡국 먹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꼬박꼬박 나이를 먹습니다. 이제는 설날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해마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걱정이 이해되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무언지 알게 되면서 부터인듯 싶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이런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나 봅니다. 싫다는 데도 나이 한 사발 듬뿍 먹여 놓고는 무심하게 저만치 달려 갑니다.

분명히 바로 걸을 수 있는데 저절로 뒷짐이 지어질 때, 전화 속 상대의 얘기는 점점 작게 들리고 응답하는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질 때, 아침마다 뼈들이 마주치며 대화하는 소리를 들어야 할 때, 사무실에 핸드폰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나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할 때, 젊을 때는 좋아하지 않았던 진한 육수의 뜨거운 국물을 연신 들이켜며 ‘시원하다. 시원하다’ 를 외칠 때 문득 스스로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직원들이 연락도 없이 자기들끼리 모이는 것을 보고 생전 없던 섭섭함이 묻어날 때, 내 얘기 중에 ‘옛날에는’ 같은 표현이 수시로 들어갈 때, 상대가 말할 때마다 ‘뭐라고?’ 를 반복해야 할 때, 이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득 무릎이 아파지고, 허리도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면 어르신들이 생각납니다. 부모님이 기억납니다. 나를 키우면서 하셨을 노고와 그렇게 지낸 세월의 결과로 나이 들어 얼마나 몸을 움직이기에 힘드실 까 함에 생각이 미치니 죄송하고 한편 감사가 마음에 미칩니다. 우리가 욕하고 비난하며 찔렀던 그 세대가 우리의 현재를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개발경제 속에서 그들의 희생과 배고픔을 먹고 우리 세대가 자랐다는 것을 인정하고 무조건 비난하기 전에 먼저 감사부터 해야 된다는 생각도 갖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나 봅니다. 누군가는 꼰대가 되어 가는 것이라고 비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께 전화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쓰니까 이제 부서져 가는 거지. 지금 나이에 모든 것이 건강하고 온전하길 바라는 게 잘못된 거지.” 맞습니다, 어머니, 할 뻔했습니다. 아무리 맞는 얘기라 해도 어르신들 앞에서 이런 말에 장단을 맞추면 안 되는 것인데 워낙 맞는 말씀이어서 실수할 뻔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무너지고 삐꺽 거리는 것은 일단 자연스러운 것이니 받아들이기로 하고, 무엇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나이가 들어 뭔가 깨닫는 사람들이 여럿입니다. 유명한 족장 아브람은 무려 99세가 되어서야 야훼께서 자기에게 준 약속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립니다. 아브람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모든 나라의 아버지’ 라는 의미이니 스케일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손자인 야곱이라는 족장도 험난한 굴곡을 지나 나이가 들어서야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해 왔던 자기 중심적 인물에서 자기를 지켜왔던 것이 본인의 힘이 아니었음을 아는 인물이 됩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그가 받은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처음 이름인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 란 의미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라는 의미입니다. 또 이집트의 왕자라는 영화로 유명한 모세는 80세에 민족을 이끌어 낼 지도자로 택하여 집니다. 그는 열정의 인물이 아닌 온유함의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생을 보았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는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꿈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을 통해 유추해 본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진짜 꿈을 가질 때가 되었다는 것과 동일한 것 같습니다. 10대의 연두색 풋풋했던 꿈이 아닙니다. 20대의 빨갛게 달아오른 뜨거운 꿈도 아닙니다. 30대의 그것과도 색깔이 다르고, 40대와도 향기가 다른 꿈을 갖게 되는 거지요. 50대를 넘어 이제 제법 인생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인생의 모진 맛을 제법 보고 나서 갖는 꿈입니다. 공자 역시 논어의 위정(爲政)편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 깊이가 더하는 이치를 말함에서 결이 같습니다. 물론 훌륭한 분이어서 다르긴 합니다. 전 오십을 반절을 꺾어 넘겼는데도 불혹은 커녕 여전히 혹. 혹 하기 쉬운데 말입니다. 물론 공자는 자기의 일생을 통해 학문의 심화된 과정을 술회한 것이니 아무데나 붙여 해석하면 안되겠지만요. 하늘의 뜻을 알 듯(知天命), 그 들리는 바를 듣게(耳順) 되는 나이가 되면 꿈을 새롭게 가질 때가 된 거라고 말해야겠습니다. 그 꿈은 무엇을 하나 더 이루겠다는 꿈이 아닙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이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제대로 된 길에 관한 꿈입니다. 그래서 기왕에 시작한 것, 나이 먹어 이루고 싶은 꿈을 적어 봅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화(怒)를 더하기 보다는 친절을 더해가는 사람이 되기를 꿈 꿉니다. 네 편, 내 편을 구분하기 보다는 용납하게 되기를 꿈 꿉니다. 비난하기 보다는 칭찬을 더해 가기를 꿈 꿉니다. 받기 보다는 챙겨 줄 수 있기를 꿈 꿉니다. 지적하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기를 꿈 꿉니다. 내가 나서기 보다 다른 이를 세워주는 사람이 되기를 꿈 꿉니다. 나이가 들면서 무엇보다 욕심이 아닌 지혜가 늘어 가기를 꿈 꿉니다. 적다 보니 나이가 든다는 일이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 감을 기쁜 마음으로 인정해야겠지요. 그리고 나이가 먹어갈수록 새로운 꿈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여전히 노(怒)함은 넘치고, 분별의 눈은 어두운 자신을 돌아보며 올 해의 나이를 먹는 일에는 보다 진지해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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