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30,Friday

백돌이의 설 명절

설 휴무가 되었음에도 어디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세도 꺾이지 않았고 백신이 나왔어도 불안감은 여전했습니다. 베트남은 그나마 몇 안 되는 방역 성공국가였지만 최근 불거진 확산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호찌민에서 방콕 생활을 해야 하는 설 연휴가 되었습니다.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창졸지간에 가족과 떨어져 독거인(獨居人) 신세가 된 사람들은 물론 가족여행을 취소해야 했던 부모들에게도 이 긴 명절은 형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날을 맞춰 골프장 가자는 약속을 하는 것이 이 휴가를 잘 보내는 몇 안 되는 옵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한 테도 그런 제안이 쌓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러고보니 골프를 배우고 필드에 나가기 시작한지 어느덧 사 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남들은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싱글도 한다는데 저는 명실상부한 백돌이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간신히요. 그런데 독거인들 구제해 가며 명절을 지내다 보니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백돌이 눈에 뭐가 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재미가 생겼습니다.

가장 먼저는 풍경을 보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예전엔 도착하면 몸 풀고 드라이버 꺼내 들기 바빴습니다. 충청도 기질은 어디 가고 필드에 서기만 하면 급해지는 마음은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언제나처럼 첫 타석에 마구처럼 휘어지는 슬라이스를 날리고 ‘뽀~올’ 하며 힘차게 외치는 캐디들의 합창을 들을 때의 자괴감이란! 이 한 타로 그날 백돌이의 18홀 여정에는 더 이상 뵈는 게 없어집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 볼 대신에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새롭습니다. 잔디를 밟는 감촉이 좋습니다. 햇살 사이를 쓸고 가는 바람이 고맙습니다. 이렇게 좋을 수가요! 조급한 마음을 다독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러고보니 왜 골프선배들이 이 운동을 빗대어 인생을 얘기하는지 쬐끔 알 것 같았습니다. 왜 경기 후 내내 그 얘기로 술잔이 오고 가는지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골프로 칼럼의 주제를 잡아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런 고수들처럼 인생을 꺼내 들어 논할 수준은 못되지만 백돌이에게도 이번 명절 기간이 헛되지 않은 듯합니다.

백돌이가 안 것이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그 홀의 첫 공을 기가 막히게 쳐서 모든 이가 굿 샷을 외쳐도 다음 타격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반대로 블루티에서 친 드라이버 샷이 레드티를 간신히 넘겼어도 두번째 샷이 그 데미지를 극복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번 홀에 파를 했어도 다음 홀에서는 양-파를 할 수도 있고 거꾸로 이번 홀에 벙커에서 탈출을 못해 멘탈이 붕괴된 채로 더블 파 선언을 받았다 할지라도 다음 홀에서 버디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일희일비할 일이 없습니다. 결론은 그 홀을 마칠 때 나는 것이니까요. 결국 골프는 한 타, 한 타를 성실하게 쌓아가야 하는 ‘하나’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홀의 하나가 중요합니다. 둘째는 그렇게 한 타를 소중히 여겨 초반 아홉 홀에서 기가 막힌 성적을 냈다고 해서 후반도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고수들은 전, 후반이 한결같겠지만 전 엄청난 차이를 냅니다. 원래 몸이 늦게 풀리는 27홀형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연습은 몹시 귀찮아 하면서도 ‘오늘 왜 이러지’를 연발하며 변명거리를 찾는 전형적인 백돌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초반에 볼이 맞을 때는 거꾸로 긴장됩니다. 너무 좋은 점수로 사고 칠까 봐요. 그런데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습니다. 초반 점수가 끝까지 유지되는 법이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18홀을 도는 동안 전 과정을 순탄하게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데 조금 잘되면 자꾸 잊고 까불게 됩니다. 그래서 백돌이를 못 벗어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전반 성적이 좋았다고 자만도 말고, 후반에 망쳤다고 실망할 것도 없이 마지막 홀을 마칠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겠구나 생각합니다.
셋째는 골프장을 걸으면서 느끼는 건데 이처럼 개인이 가장 많은 면적을 점유하는 운동이 또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골프는 사이즈가 큽니다. 경기 도구도 많고요. 그런데 경기는 거꾸로 작아져야 유리한 것 같습니다. 호쾌한 드라이버 보다 안정된 세컨드 샷이 중요하고 그 보다 홀로 가까이 붙이는 정교한 어프로치가 더 중요하고 그보다는 퍼팅이 더 중요한 것처럼요. 그렇게 본다면 골프는 디테일에 집중해야 하는 운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베트남 사람과의 관계도 화끈한 것 보다 섬세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라이버로 크게 한방 질러 주는 것보다 그들의 방식에 정확하게 어프로치하고 세밀한 퍼팅으로 마음을 터치해야 홀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번째의 결론은 작은 것을 놓치지 말자입니다. 이걸 알면서도 연습장에는 가면 왜 드라이버로 먼저 손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골프장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십니다. 차가워진 대기를 가르며 스윙을 합니다. 잘 맞을 때는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럴 때는 치고나서 저절로 피니시 동작에서 멈춘 채 그 자세로 이, 삼 초 멈춰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폼 납니다. 아…, 언제나 이렇게 맞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세컨드 샷을 위해 아이언을 꺼내 들고 보니 저기 벙커가 노려보며 기다리고 있네요. 긴장됩니다. 이상하지요? 왜 벙커가 부르면 벙커에 박아 넣고, 왜 물이 곁에 있으면 그 넓은 페어웨이를 두고 물에다 공을 날리는지. 물에 공을 끌어당기는 자력이 있다는 얘기를 믿고 싶습니다.

이번 명절은 우울했지만 한편으로는 골프의 참 맛을 보지 못했던 백돌이가 그 맛의 한 끝에 살짝 혀를 대어 본 기회를 갖게 된 명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욕심이 생기네요. 기왕에 보기 시작했으니 올해는 이 운동의 맛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치 비즈니스를 하듯 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작은 것에 집중하자는 다짐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런데 설 명절 마지막 날은 정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호찌민에서 골프 치시는 분들은 모두 모이신 것처럼 붐볐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니까요. 그것이 또다른 골프의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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