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나는 왜 더 잘하지 못할까’ 자책하는 그대에게

[고전에서 길어 올린 ‘깊은 인생’]

물론 일상은 고달프다. 가끔 힘에 부쳐 숨 쉴 때마다 절망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저 아래로 처박히는 느낌은 수시로 들락거린다. 모두가 나보다 잘난 것 같고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수록 나는 점점 낮아지는 것 같다. 그런 일상에서 꿈이고 지랄이고 언감생심이고 나로 살아가는 인생은 하루하루 멀어지는 것 같다. 생긴 대로 산다는 건 만만한 게 아니었던 게다. 그런데도 나는 왜 더 잘하지 못할까 자책한다. 그러나 그대 보아라. 삶은 그저 똥이다. 산해진미 지나간 끼니가 지금을 배부르게 할 수 없는 건 내가 먹은 모든 것이 똥이 되었기 때문이다. 밥뿐이랴, 내가 했던 생각, 입 밖으로 뱉었던 이야기, 쏘다닌 길, 분노했던 일들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모두 버려지고 잊히고 사라졌다. 삶은 죽었다가 재생산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세포와 같고 양껏 먹었지만 똥으로 내려간 음식과도 같다. 그런 똥 같은 삶에 우열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아라. 지금을 억지로 살고 있다면 그대가 가려는 이 길은 그대의 길이 아니다. 그 길로 간다고 해서 무언가를 움켜잡을 수 없는 길이다. 그것은 매끈거리는 비닐 장판에 들러붙은 머리카락과 같다. 아무것도 아닌 한 올을 움켜쥐려 걸레로 떼려다 못해 손가락으로 떼어보려고 하지만 착 들러붙은 머리카락은 손톱으로도 쥐어질 리가 없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쥐어도 안 잡힌다.’ 비극이다.

‘인생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거라고 시인 예이츠는 말했다. 그때 독한 담금질이 필요하다. 주름 없는 인생에서는 배울 게 없다. 상처 없는 미끈한 장단지로는 아무도 업을 수 없다. 육근은 고통스런 물리적 힘에 의해 튼튼해지고 뜨거운 태양과 태풍을 견뎌야 사과 한 알이 여문다. 삶을 잘 사는 법은 석, 박사를 했다고 알아지는 게 아니다. 그저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온 몸으로 사는 법 외엔 방법이 없다. 그래야 ‘나’라는 거대한 시 하나가 탄생한다.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 가는 허약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을 우대하고 우리는 더 잘하지 못해 안달한다. 그것은 허약한 구조에 올라탄 사람들이 우리를 가두려는 저열한 논리임을 알아야 한다. 더 잘하고 더 이기고 더 벌고 더 잘 살려는 중압감이 인생을 망친다. 완벽을 추구하면 완벽한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완벽에는 늘 부정적인 마음이 따라 다닌다. 완벽을 추구하면 미 완벽이라는 슬려지는 필연적으로 나온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잘 한 부분의 완벽은 보이지 않고 조금 모자랐던 점, 부족했던 부분만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10%의 부족이 90%의 완벽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대로 나타난다. ‘저 사람은 다 좋은데 이거 하나가 안 좋아’ 라는 평가는 실은 좋은 건 보이지 않고 좋지 않은 한 가지만 크게 보려는 부정적 마음이다. 90점 받은 해맑은 아이는 보이지 않고 틀린 10점의 아이로만 보인다. 완벽은 인간을 갉아먹는다.

user image

“ 잘 살려 애쓰지 말고
다 살도록 해라. ”

사람들은 ‘나 자신이 중요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 하며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 말하지만 그럴수록 개인은 사라지고 크고 약해 빠진 집단으로 엉겨 붙는 것 같다. 잗다란 행복을 위해 서로를 위로하는 작은 개인만이 남아 헛발질을 남발한다. 그것은 연약하고 슬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위험이다. 세상에 퍼진 광범위한 불행을 박차고 일어나는 위험 말이다. 사는 법에 관해선 약사여래 같은 처방이 없다. 더러는 분노에 못 이겨 울어야 하고 더러는 벼랑 끝에 세워놓고 무릎을 벌벌 떨어야 한다. 들판에 서지 않고 안온한 온축 위에서 어린 아이 같은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일은 의미가 없다. 다만, 언젠가 만날 나를 위해 잘난 사람들 틈에 있는 나를 온전히 지켜라. 그들로부터 내가 훼손되는 걸 내버려 두진 마라.
그들 틈에 살며 내 자신이 마모되면 ‘나’ 또한 사라진다.

그대는 조금 늦게 필 것이다. 조급해 하지 마라. 늦은 만큼 살 떨리는 환희가 기다리고 있다. 움츠렸다 활짝 터져버리는 황홀 말이다. 그 전에 그대 안에서 걸려든 것은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잡지 못하거나 물러서거나 피하면 꽃을 피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굴욕의 시간에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이것저것 매달리며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품고 또 품고 응축하고 또 응축해서 어느 날, 어느 순간 그대 안에 걸려든 그것을 놓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키우는 것이다. 그때는 반드시 온다. 잘 살려 애쓰지 말고 다 살도록 해라. 그전에 그대 주변을 먼저 살피라.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대에게 맞닥뜨려진 것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대를 꼭 붙들고 지키면서 말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