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30,Friday

어른

3월이다. 새해가 시작 된지 2개월이 지났다.
왜 일년은 12개월일까? 십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마치 1년은 원래 10개월 이었는데 그동안 10개월을 잘 보냈으니 수고했다 하며 덤으로 2개월을 던져준 듯하다.
더구나 음력을 함께 사용하는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음력설이 지나야 진짜 한 해가 시작된 듯이 느껴지니, 서양친구들과는 달리 년말 년시의 시점이 감정적으로는 조금 다르다.

동양의 시간은 그렇게 서양보다 2개월 이상은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 새해가 시작된 지 이미 3개월 째인데, 이제서야 지난 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나이가 들면서 늦어지는 것은 드라이버 스윙 속도 만은 아니구나 싶다.
그렇게 지난 해가 지났다. 지난 해는 유난했다. 마치 죽어가듯이 살아왔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한 남자의 일생에 팬데믹이라는 생소한 세월이 더해졌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생겨나 우리를 놀라게 만들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생을 다 맡기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그곳에서 사는 이가 모른다는 무책임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세상을 모른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아서 탈이다.
앞에서 말한 일년 12개월, 12진법 역시그 중의 하나다. 그리고 12진법을 만든 문화는 수메르인들이 세운 바빌로니아 문명으로, 그들은 현대인의 기술로도 발견하지 못하는 우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점토 글을 번역해보니 그것이 구약성경과 같았다고 하니 진짜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는 세상을 정말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매번 만나는 사건마다 문제로
등장하며 머리를 쥐어 짜내게 만든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는 위해 남겨둔 성경 말씀이 있다. 이 역시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이리 위로가 될 줄 몰랐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닥쳐도 결국은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할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면 될 것을 참지 못하고 안달을 부리며 살아왔구나 싶은 회한이 든다.
돌아보니 그렇다, 이런 저런 세상의 위협에 굴복 당하지 않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돌아보면, 참으로 불운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우매한 선택을 오히려 으스대며 살았다.
그래도 그런 부족한 인간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사랑으로 함께 한 가족과 친구들, 또 그들과 일과 사랑으로 엮이며 음주가무도 즐기며 기억에 남는 멋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즐거움 속에서도 힘겹고,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슬픈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슬픔보다 더 많은 기쁨을 느끼며 살았다는 것이 감사할 일이다.

인간의 정서적 성숙도는 보낸 세월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나이에 따른 자각과 정서적 성장이 육체보다 덜 성숙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에 인간들은 세월이 주는 자연스런 외향에 저항하며 육체적 젊음의 회귀를 자신에게 요구하게 된다. 다시 육체적 젊음으로 돌아가려는 불가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늙어 질수록 사람은 더 어려진다고 말하며 그 불가함을 조롱한다. 아무튼 어려지건 말건 공식적으로 나이가 또 한 살 늘었다.

이제는 어른이라는 표현마저 어르신으로 한 단계 격상된 대접을 받는다. 한국은 참 좋은 나라가 맞다. 나이만 들면 일단 대접을 해주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르신으로 사회적으로 제공하는 혜택만을 누리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면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다. 사회적으로 받는 대접만큼은 사회에 돌려주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받는 만큼 보답을 하는가?
요즘같이 변화가 심한 세상에서 나이가 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사회적으로는 비생산적인 소비집단으로 전향된 마당이라 그들의 사회적 용도가 생산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열등하기 마련이다. 그런 형편에서 그나마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나 꼽으라면 한 살이라도 적게 살은 사람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는 것인데 사실 그 마저 쉽지가 않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한 쪽이 젊은 층이고 퇴화된 부류가 어른들이니 오히려 누가 누구를 가르칠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우리는 사회의 주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고 인정해야 할 일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젊은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교훈이고 사회적 역할이다.
이제까지 주로 명령을 하며 살아온 인생을 조금 바꿔, 남자로서의 자부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변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오더에 순종하고, 설사 맘이 안 드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불편한 심기를 거칠게 드러내거나 혹은 억지로 참거나 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관조하며 자신의 감정을 좀더 부드럽게 다루는 요령을 배워야 한다.
나쁜 말을 듣고 더 이상 분개하지 말고 아무 것도 듣지 않은 척 하는 것도 익혀야 한다.
분노하고 저항하고 흥분하고 감격하고 자극을 받는 것은 더 이상 어른으로 불리우는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젊은 심장의 몫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일, 탄생과 죽음 그리고 소멸로 이어지는 세상의 원리를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순순히 수긍하며 다가오는 세월의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

불계공졸 (不計工拙) 이라는 말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작품 첫머리에 찍는 두인으로 사용한 것인데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잘되고 못됨을 따지는 것조차 불가한 상태를 의미한다.
공자가 나이가 70이면 종심이라 했다. 즉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여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인데 불계공졸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는 의미다.

한 세상, 잘 살건 못 살건 이미 다 살아왔다. 그 삶이 좋았는가 나빴는가는 따질 일이 아니다.

“단지 그 삶에 최선을 다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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