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18,Saturday

삼국통일 이야기 – 2편

지난 이야기
중국의 혼란기를 통일한 수나라는 창업주 수 문제와 아들 수 양제 2대에 걸쳐 4번이나 고구려를 침략 했습니다. 그러나 4전 4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승리한 고구려도 엄청난 국력을 소모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일반 백성들 입니다.

고구려를 4번이나 침략한 수나라는 무모한 전쟁으로 멸망합니다. 이때부터 중국에는 “요동랑사가” 라는 노래가 유행합니다. “요동에 (고구려) 가서 헛된 죽음을 당하지 말자” 라는 내용입니다. 중국의 백성들도 고구려 침략은 힘들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승리한 고구려도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고구려 보다 20배의 인구와 50배의 경제력을 가진 중국과의 전쟁을 4번이나 이긴 고구려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지만 승리해도 중국보다 더 지쳐갑니다. 무엇보다 전쟁을 겪는 백성들의 삶은 너무 고달프죠. 아마도 7세기 초 중반을 살던 고구려 백성들은 전쟁을 숙명으로 알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백제와 신라는 국지전을 벌였으나 고구려는 항상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면전을 치르고 승리했죠.

수나라의 멸망
수나라는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4년 후 618년 멸망합니다. 같은해 수 양제의 종친인 (이종사촌) 대장군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합니다. 당나라가 건국된 618년 고구려에는 영양왕이 사망하고 영양왕의 이복 동생 고건무가 고구려 제 27대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영류왕 입니다. 당나라를 건국한 당 고조 이연의 외교 정책은 유화적이라 고구려 침략 의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 고조의 차남 이세민이 정변 (현무문의 변)으로 정권을 탈취하자 고구려는 긴장 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이 황제로 등극하자 고구려 영류왕은 사신들을 보내고 당나라 비위를 맞추며 외교력으로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쟁때 잡은 포로들을 서로 교환하고 당나라에 조공도 보내지만 당 태종 이세민은 북동의 강자 고구려를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 당 태종 이세민 주변의 모든 국가들을 굴복시켜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수나라를 물리친 고구려도 굴복시켜 중국의 영웅이 되고 싶어합니다. 반면 고구려 영류왕은 수나라의 침략을 몸소 경험한 고구려 장군 출신입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물리쳐도 피해를 더 많이 당하는 쪽은 고구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강성파 무장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며 당나라와 일전을 각오한 상태입니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를 치다.
642년 강성파 무장 연개소문 일파는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100여명의 온건파를 죽입니다. 고구려 정변 소식을 들은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혼란기를 틈타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당 태종의 30만 대군은 전부 정예병으로 편성되어 수 양제의 100만 대군보다 훨씬 더 위협적 입니다. 당나라 육군은 두 갈래로 요하 상류와 중류를 건너 고구려 성들을 공격하고 해군은 비사성을 (현재의 대련) 공격합니다. 중국의 영웅 이세민과 고구려의 연개소문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전쟁은 필연적 입니다. 전쟁의 명분이 필요한 이세민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정권을 차지하여 고구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으니 불쌍한 고구려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이세민 자신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내고 자신을 반대하는 수천명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 입니다. 하지만 이세민이 내건 명분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서기 645년 2월 당 태종 이세민은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10대 후반부터 전장터를 누빈 이세민은 성동격서 및 위장공격에 능한 사람입니다. 선발대 이세적 군대는 요하 상류를 건너 고구려 신성을 공략하고 중군 장군예는 회원진을 지나 요하 중류를 건너 요동성 공략에 나서죠. 당 태종 이세민은 본대를 이끌고 요택의 늪지대를 건너 요동성 공략에 합류합니다. 또한 당나라 해군은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대동강으로 가는 척 하다가 방향을 돌려 발해만으로 상륙하여 비사성을 (현재의 대련) 공격 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 정변을 인정하지 않는 군부 세력도 꽤 존재 했습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태에서 공격 루트를 변경한 이세민의 변칙공격에 고구려는 전쟁 초기 제대로 대응을 못합니다. 당나라 선발대 이세적 군대는 요하 상류를 건너 고구려 최북단 성 신성을 공략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세민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하 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을 볼 면목이 없었던 이세적은 신성의 남쪽에 있는 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 시킵니다. 개모성은 700명이 수비하는 작은 성입니다. 게다가 개모성은 목책 성 입니다. 요동성에 (현재의 심양) 도착한 당 태종 이세민은 “이세적의 개모성 함락을 치하하고 포로 700명을 풀어 주었다” 라고 신당서라는 당나라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믿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이세민은 요동성 공략에 집중 하지만 좀체로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습니다. 당시 요동성은 돌로 만든 석성이 아니라 토성 입니다. 요동성 옆에 흙 무더기를 쌓은 후 투석기를 이용하여 성안에 기름통을 날리고 불화살로 요동성을 불바다로 만듭니다. 요동성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10만 당군을 맞이한 1만 고구려 수비군은 거의 전멸하고 20일을 버티던 요동성은 결국 함락 됩니다.
요동성이 함락되자 4만 백성 중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전부 당나라 노예로 끌려갑니다. 고구려 건국이래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불패의 요동성이 함락되자 당 태종 이세민은 자신감이 넘치게 됩니다.
한편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요동성 함락 소식을 듣고 겁이 나서 이세민에게 항복 합니다. 또한 당나라 수군이 비사성을 함락 시키고 이세민의 본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요하를 지키는 방어선 중 요동성 비사성 백암성 개모성 등 4개 성이 두 달만에 이세민의 수중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요동 방어선은 안시성 건안성 두개 성이 남았고 요동 방어선을 지원하는 오골성이 (현재의 봉황산에 있음) 버티고 있었죠. 645년 6월 당나라 군대는 집결하여 안시성 공략에 나섭니다.

허둥지둥 도망친 이세민
한편 고구려 요동군 사령부는 요동을 방어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냅니다. 요동성을 지키려고 신성의 수비군 1만과 국내성 오골성 군사 4만 등 총 5만의 지원군을 파견하여 당군의 후미를 공략하여 많은 타격을 입혔죠. 비록 요동성은 함락 되었으나 이세민의 전략에 많은 제동장치 역할을 합니다. 협공을 염려한 이세민은 평양으로 직행을 주장하는 도종의 의견을 물리치고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세민은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연개소문이 파견한 고구려 지원군을 만나 전투를 벌입니다. 이 전투를 주필산 전투라고 하는데 50년 후 대조영이 당군을 격파한 전투도 주필산 전투입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698년 발해를 건국합니다.

주필산 전투에 관한 중국측 기록인 구당서의 기록을 살펴 봅시다. “당 태종 이세민은 주필산 전투에서 5만 군대를 이끌고 삼면에서 협공했다. 고연수 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 15만 대군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 궤멸 당했고 15만 고구려군은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세민은 말갈군 3천은 생매장하고 (말갈군은 남의 나라 전쟁에 개입하여 천자의 나라 당나라에 대항한 죄를 물어 생매장 했다고 함) 고구려군 장수와 군관 60명을 제외한 군사 15만명은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전쟁 중에도 중국 황제는 덕을 베풀었다” 어린애가 들어도 하품할 역사 왜곡입니다. 중국 측 기록의 왜곡에 대해서는 삼국통일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당시 안시성에는 2만 정도의 수비군이 있었는데 당나라 군대 30만이 2만의 안시성 군대에 패하면 당 태종 이세민의 체면에 손상이 가니까 신당서에는 구당서 내용을 고칩니다. 이세민의 처남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안시성을 지키는 군대는 최소 10만이 넘고 안시성 백성들도 협조하니 이기기 힘듭니다. 게다가 고구려 지원군의 후방 교란이 염려됩니다. 이에 당 태종은 철군을 결정하고 비록 적군의 장수이지만 안시성 성주의 충성심과 빛나는 전공을 치하하고 비단 백필을 하사하고 철군했다” 참 중국답게 기록합니다.

이렇게 3번의 큰 전쟁에서 고구려에 패한 중국은 창피를 당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3명의 황제 중(진시황제, 한 무제, 당 태종) 한명 입니다. 때문에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 기록보다 더 왜곡된 측면도 있고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역사 왜곡에 개입한 기록들도 많습니다.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까지 선물 하면서 여유롭게 처신하던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가장 지름길 이지만 죽음의 늪지라고 알려진 요택의 늪지를 허둥지둥 통과하여 장안성으로 돌아갑니다. 자치통감의 기록을 봅시다.
“당 태종의 원정때 30만 군사 중 전사자 2천명을 위해 황제께서 친히 위령제를 지냈다. 이에 전사자의 가족들이 자식 잃은 슬픔도 잊고 황제의 은혜에 감동했다” 참 중국은 대단합니다. 패전국 군사의 사망율이 1% 미만이네요. 하지만 이세민은 전쟁 후유증으로 패전 3년 후 사망합니다. 이세민은 죽기 전에 아들 이치에게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고 사망합니다.

다음 이야기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고구려는 70년 동안 만신창이 되도록 중국과 싸우던 때에 백제는 무왕 의자왕 2대에 걸쳐 신라와 죽기 살기로 싸웁니다. 다급한 신라는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와의 외교로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합니다. 그 와중에도 신라는 중국과 전쟁 중인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합니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야기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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