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9,Friday

‘조지 거쉰’ (George Gershwin)의 랩소디 – 두번째 이야기

20세기 초중반 무렵, 미국에서 두각을 나타낸 클래식 음악가들은 대부분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유럽을 뛰쳐 나온 망명인들이었다. 본래 클래식 음악은 유럽에서 태동한 후 유럽이 몇 백년 동안 꽃 피워온 문화적 유산이다. 따라서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이 온전히 자국의 흙과 정신을 대변할 순수 토종 미국 클래식 음악가를 배출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런 시기에 등장한 조지 거쉰은 미국인들에게 정서적 단비같은 존재였다. <랩소디 인 블루>와 <피아노 협주곡 F장조>, 그리고 다수의 뮤지컬과 수많은 팝송 및 영화음악 등을 성공시키며 단기간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된 거쉰은 어느덧 유럽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국제적인 음악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오래 묵은 마음의 숙제가 있었는데, 바로 유럽 정통 클래식 작곡기법을 마스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유행가나 양산하는 작곡가로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쉰은 클래식의 본 고장인 유럽으로 달려가는데…

파리의 미국인
1928년 3월, 거쉰은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유럽 정통 클래식의 냄새를 현장에서 맡고 싶어서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식 음악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제게 당신의 주특기인 관현악 기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 라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당신은 이미 일류 미국 작곡가인데, 왜 나를 모방해 이류가 되려고 하십니까?” 또 다른 일화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던 이야기이다.
레슨을 요청하는 거쉰에게 스트라빈스키는 “거쉰님~ 혹시 작곡으로 버는 일년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고 물어왔다. 일년 수입이 약 10만불 정도 된다고 답하자 스트라빈스키는 “아이구~!! 제가 거쉰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수입을 올리는 인기작을 쓸 수 있는 겁니까?”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화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는 거쉰이라는 음악가의 캐릭터 때문이리라.
그는 유명해진 이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노력형 작곡가였다. 라벨과 스트라빈스키가 손사레치며 거부한 덕택에 거쉰의 파리 여행은 그의 다음 흥행작 <파리의 미국인 An American in Paris>의 마중물이 되었다. <파리의 미국인>은 일종의 자전적 스케치로 거쉰 본인이 보고 느낀 파리의 모습을 묘사한 ‘교향시’이다. 거쉰은 이 곡에 대해 설명하기를, ‘파리를 방문한 미국인이 도시를 거닐며 거리의 다양한 소음을 듣고, 이국적인 프랑스의 분위기에 매료된 인상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다.
유머러스한 랩소디 성격의 이 곡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택시 호른(Parisian taxi horn)’의 사용이다. 거쉰은 파리의 거리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파리 여행 중 구입한 택시의 경적을 뉴욕 초연 무대에 올렸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뚫고 쉴새 없이 울리는 빵빵!! 빵빵 !!. 정말이지, 신선하고 이색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파리의 미국인>은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 협주곡 F장조> 보다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훨씬 세련된 발전을 이룬 곡으로, 1920년대 파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살스럽고 에너지 넘치게 그려져 있다.

포기와 베스
<1920년경, 흑인 빈민가 ‘캣피쉬 로우’. 사내들은 주사위 도박에 열중이다. 건달 크라운은 정부 베스와 함께 나타나 도박판에 끼어들어 언쟁을 하다가 어부 로빈스를 찔러 죽이고 도망간다. 베스는 마약의 유혹을 물리치고 앉은뱅이 거지 포기와 함께 새 삶을 살아간다. 다리가 불편한 포기를 남겨두고 이웃들과 함께 키티와 섬으로 야유회를 간 날, 베스는 피신 중인 크라운을 만나 숲속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1주일 후 포기에게 다시 돌아와서 거듭 사랑을 확인한다. 어부 제이크와 그의 처 클라라 등이 태풍에 조난을 당한 날, 크라운은 둘 앞에 나타나서 조롱을 하다가 포기에게 찔려 죽는다. 다음 날, 형사는 크라운의 검시에 입회시키기 위해 포기를 강제로 데리고 간다. 1주일 후 포기는 무사히 돌아오지만… 베스는 없다. 마약 밀매인 스포팅 라이프가 마약으로 베스를 유혹하여 뉴욕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포기는 자신을 보호해준 이웃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불구의 몸으로 베스를 찾기 위해 멀고 먼 뉴욕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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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흑인 빈민촌의 비극적인 현실과 인종차별의 사회적 문제를 건드린 오페라, <포기와 베스 Porgy and Bess>의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거쉰이 남긴 최고의 걸작으로, 오페라와 뮤지컬이 혼합된 ‘포크 오페라(민속 오페라)’이다. 1935년 9월 30일 뉴욕 콜로니얼 극장에서 초연된 <포기와 베스>는 전 출연진이 흑인 배우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이유로 언론의 도마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게… 거쉰의 오랜 숙원이었던 오페라 작품인데, 그는 왜 하필 인종차별문제에 불을 지피는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게 되었을까?
작곡배경은 다음과 같다. 1924년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던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 ‘오토 칸’은 오페라와 클래식에 상당한 애호가였다. 그는 “미국만의 위대한 오페라는 재즈 오페라가 될 것”이라며 거쉰에게 오페라를 써보라고 권유 했다. 경력 초기에 발표하자마자 실패했던 오페라 <블루 먼데이>는 거쉰에게 쓰라린 흑역사였고, 그로 인해 오페라 작곡에 대한 자신감이 하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페라라는 장르는 거쉰의 인생에 있어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에베레스트였다.
그러던 중 1926년, ‘듀보스 헤이워드’의 소설 <포기 Porgy>를 읽고 감명받은 그는 흑인들의 소외된 삶과 애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관심은 가장 미국적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통해 시각화, 청각화 되었다. 거쉰이 이전작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은 <포기와 베스>의 뉴욕 초연은 센세이션이었다. 미리 언급한 바와 같이, 출연하는 배우가 모두 흑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헤이워드의 소설 배경이 흑인 빈민가였으니 흑인들이 연기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흑백의 차별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던 미국에서 흑인들만이 연기하는 오페라라니. 백인들이 연기를 위해 까맣게 분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 100 % 흑인으로만 구성한 오페라라니!!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인들은 이 오페라를 가리키며 극혐이라고 손가락질 해댔다.

그런가 하면, 도박과 마약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흑인 하층민의 삶을 다뤄 백인에 의해 흑인의 삶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흑인 음악가들과 청중들은 소리 높여 이 오페라를 보이코트 하기도 했다.
“그래 ! 열심히들 싫어하고 혐오해라. 이것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미국의 민낯이요, 실상이다. 그리고 자고로 ‘재즈’는 흑인들의 소울을 타고 나와야 제 맛을 내는 법이니 더 이상 인종을 들먹이며 태클 걸지 말고, 다양한 미국의 현실 중 한 부분을 진솔하게 재현한 순수 미국 오페라라는 점에 집중해라”. 거쉰의 심정은 요런 게 아니었을까? 미국에서 최초로 탄생한 재즈 오페라 <포기와 베스>는 이런 저런 논란들을 뒤로 한채 흑빛 다이아몬드가 되어 찬란하게 반짝여 나갔다. 아니,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1막에 등장하는 아리아 ‘썸머 타임 Summer Time’을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바로, 어부의 아내 클라라가 아기를 재우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가사가 읽어 보니 이 한 곡의 아리아에 <포기와 베스>의 주제가 오롯이 담긴 듯 하다. 소리없는 염원이 들린다. 애잔하지만 힘이 있다.

여름날, 물고기는 펄쩍 뛰고, 목화는 자라나 사는 게 편해
아빠는 부자고, 엄마는 예쁘니 쉿 아가야, 울지 마라
어느 아침 넌 깨어나 노래를 부르겠지
그리고는 날개를 펴고 하늘을 가질 거야
그날 아침이 올 때까지 엄마 아빠가 옆에서 지키고 있으니
너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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