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7,Saturday

꿈이 없어도 아, 삶은 기묘하게 전진한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집에 들어왔다. 분홍색 조봇한 혀, 빨간 살이 드러난 콧등, 유난히 털이 길고 숯이 많아서 안아 보기 전엔 얼마나 작고 따뜻한 지 알 수 없는 몸뚱아리, 조그만 몸에 심장은 어찌나 세차게 팔딱거리는지, 휴양림 들어가는 길처럼 굽이굽이 도는 귓속, 습도까지 감지한다지 신비롭기까지 한 흰 긴 수염, 야옹거리다가도 밥을 주면 들릴 듯 말 듯 작게 그르렁대며 좋아하는 녀석이 우리 집 안에 들어와 의문의 동거를 한 지도 어느새 5개월이 다 되어간다. 5개월 전 녀석은 무턱대고 우리 집 앞에 한참을 있더니 열린 문으로 마치 자기 집인 양 터프하게 들어왔다. 그때 녀석의 그 당당한 카리스마에 나는 쩔었었다. 녀석은 나방이 눈앞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면 우주 끝까지 쏘아 보내리라는 눈빛으로 나방을 따라 움직인다. 저녁 즈음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면 안온한 집은 언제 있었냐는 듯 홀로 총총 숲으로 떠나고 아침이 되면 기진한 몸으로 뒷다리를 끌며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하얗게 불태웠을 것이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 온 딸 (녀석은 암컷이다)을 맞이하듯 나는 눈을 흘기기도 하고 어디서 놀다 이제 왔냐며 혼잣말도 하면서, 급한 동작으로 그릇에 밥을 담아 얼른 내어 놓는다. 녀석이 허겁지겁 먹고 나면 다시 밤새워 놀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 딸처럼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나는 혀를 차면서도 녀석이 밤을 보내는 숲이 늘 궁금했다.

출근하다 말고 녀석이 밥 먹는 걸 엎드려 가만히 본 적이 있다. 녀석은 관절에 힘을 쓰며 나를 보고 정지 동작을 한다. 눈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반지의 제왕 사우론이었던가, 탑 위에서 빛나던 서치라이트 같은 그 눈에 나는 빨려 든다. 마스카라를 진하게 바른 것 같은 부리부리한 눈이다. 긴 털 휘날리는 털북숭이 녀석의 조상은 아마도 아주 긴 시간 동안 북방의 추위를 견뎠을 것 같다. 녀석도 내 눈을 뚫어져라 본다. 한참을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녀석은 천천히 한쪽 발을 살며시 든다. 제발 그냥 가라고. 네가 가지 않으면 자기가 가겠다는 뜻인가. 마주 보는 것을 포기하고 출근하려 현관문을 열면 등 뒤로 허겁지겁 녀석의 밥 먹는 소리가 들린다. ‘작게 된 것은 한때 큰 것’이었음이 틀림없다면 거대한 몸집과 억센 턱으로 먹이의 뼈를 으스러뜨리던 제 동족들의 기억을 녀석은 간직하고 있을 테다. 녀석은 작다고 깔보지 않는다. 거북이를 작다고 무시하지 않는 하마처럼, 녀석은 조그만 나방을 멸시하지 않고, 모기를 잡으려 검을 빼지 않는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의 도를 무시하며 작은 풀벌레와 개구리와 도마뱀을 잡으려 제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 붓는다.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는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쏟아 붓는 자연의 현현처럼 녀석은 나에게 왔는지 모른다. 먹이를 찾을 때까지 달리는 사바나의 치타, 단 하나가 살아남기 위해 수천 마리를 낳는 거북, 소멸할 때까지 몰아치는 걸 멈추지 않는 태풍과 다시 맑아질 때까지 구름이 머금은 마지막 한 방울의 비까지 쏟아내는 열대의 소나기와 녀석은 다른 모습의 같은 영혼인지 모른다. 나는 왜 나는 꿈이 없을까 고민하는 그대에게 말하고 있다. 모든 걸 걸지 않고 걸어본 적 없는 나는 녀석이 맥진한 채로 맞이하는 아침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도 모르는 그 언제를 위해 남기고, 모으고, 미루는 나는, 녀석 앞에서 감히 눈을 부릅 뜰 수 있는가. 고작 쏟아 붓는다는 것이 술자리에 가십이고,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화려한 파워포인트와 피곤함을 어깨에 걸치고 매일 아침 6시에 꼬박꼬박 일어나 기계적으로 돈 벌러 가는 것이라면 녀석과 나눌 교감의 자격은 있는 것인가. 나는 어디에도 미치지 못하고 미치려 해도 마음 놓고 미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흔 줄에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있으니 고양이가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그래, 오늘은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아빠가, 아빠는, 나는 말이다 사실은 아직도 뭘 해야 하는지 잘 몰라. 가끔 너희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본 건 그러니까, 미안하다. 답이 없는 질문을 했으니 너희들도 아무렇게나 답했을 거야. 이다음에 누군가 다시 그렇게 물어오면 그러는 당신은 뭐가 되고 싶냐고 반문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만 삶은 기묘하게 전진하니 그 믿음으로 우선은 살아보는 거야. 그래, 그러면 언젠가 자신을 쏟아야 할 때가 분명 오지 않겠니. 다 살고 가는 건 다 쏟아냈다는 말이니까 너희들이나 나나 무엇이 되는 데에 쓸데없는 난리를 치지 말고 시간을 밀치며 그저 끝까지 다 살아보는 데 집중하자.” 잘 사는 게 아니라 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자신을 남김없이 마지막까지 소진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숱한 상처 안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려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몰락을 선택할 줄 아는 삶이 아니겠는가. 주어진 삶 안에서 최대한 많이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다 사는 것이며 최대한을 사는 것이다. 끼끼(녀석의 이름이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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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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