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28,Tuesday

‘위대한 소수자’ 레너드 번스타인

‘위대한 소수자’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그는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이 미국의 일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을 점령하고 있던 20세기 초, ‘미국 출생은 대형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작가, 해설자로서 장르의 경계없이 전방위적으로 활약한 만큼 그를 수식하는 표현이 다채롭다. 모던 재즈 뮤지컬로 브로드 웨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선구자. 정열적으로 춤추듯 지휘하는 자유로운 영혼. 청소년 음악회와 텔레비젼 진행자로서 클래식의 대중화에 앞장 섰던 방송인. 매일 담배를 100개비 이상 피웠던 골초 피아니스트. 그 무엇보다도, 유럽의 카라얀과 더불어 20 세기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미국 태생의 거장. 새로움과 다양성을 모색하며 언제나 ‘최초’의 길을 걸었던 열정의 아이콘 ‘레너드 번스타인’, 그의 자취를 들여다본다.

유대인의 아들 ‘루이스’
번스타인의 아버지 새뮤얼은 우크라이나의 독실한 유대교 집안 출신이다. 원래 랍비(선생)가 되려 했지만, 러시아 군대 징집을 피해 1908년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망명 초기에 어시장에서 허드렛일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그는 유대인 특유의 사업수완을 발휘해 미용재료사업으로 성공한 후 동향 출신의 유대인 제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종교적 규율이 엄했던 유대인 가정에서 새뮤얼은 아들 루이스(번스타인의 어릴 적 이름)를 사제로 키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다행히 루이스의 고모가 어느 날 피아노를 선물하면서부터 적막 강산이던 집안은 음악으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피아노를 두드려대는 아들의 음악성을 진작 알아챘지만 못본 척하고 있던 새뮤얼은 루이스가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로 진학하겠다고 하자 적잖이 실망했다. 가업 승계는 고사하더라고도 배고픈 음악인의 길을 선택하려는 아들이 걱정 되었다. 하지만 새뮤얼은 무작정 반대할 게 아니라 조용히 아들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루이스, 아니 번스타인은 그렇게 하버드로 진학했다.

하버드를 넘어
번스타인이 하버드에서 철학, 미학, 문학, 언어학, 사회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의 최고 권위자들에게서 배우고 있던 당시의 미국 음악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었다. 바야흐로 아방가르드적인 학파의 예술가들이 18-19세기 음악사조의 한계를 개혁하려 적극적으로 움직이던 시기였는데, 이런 음악적 신세계는 번스타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그 가운데, 하버드 재학 시절에 만난 그리스 출신의 지휘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는 번스타인에게서 지휘자가 될 자질을 발견해 커티스음악원 지휘과 교수 ‘프리츠 라이너’를 소개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미국 출생인 번스타인은 독일권에서 활동한 유럽 출신의 두 지휘자로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의 정신과 전통을 배울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라이너의 추천으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보스턴 심포니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와 교류하게 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지휘자를 등에 업은 번스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클래식 음악의 심장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행운은 ‘준비된 자’의 것
행운이 갑자기 찾아왔다. 1943년 11월 12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자 ‘브루노 발터(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 지휘자)’가 연주회를 하루 앞두고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뉴욕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로진스키’ 역시 폭설로 인해 자신의 농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비상사태에 놓인 뉴욕필은 음악회를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타로 설 지휘자를 물색하다가 공연 당일 오전에 부지휘자인 번스타인에게 지휘봉을 넘기게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던 번스타인은 침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브루노 발터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리허설도 못하고 무대에 올랐다. 사실 명칭만 부지휘자였지 실제로는 오케스트라 지휘 경험이 거의 없었던 병아리 지휘자 번스타인은 온 몸에 경련이
날 것처럼 벌벌 떨며 지휘했지만,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깨고 기적처럼 멋진 공연을 선사했다. 마치 그 연주회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처럼. 이 날의 연주는 CBS 라디오 중계 방송을 타고 미국 전역으로 퍼졌고,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일간 문화면에 ‘신예 지휘자 번스타인’의 드라마틱한 데뷔 연주회가 대서특필됐다. 미국인들은 망명한 유럽의 거장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고 자라 공부한 ‘MADE IN USA’ 라는 이유로 번스타인에게 열광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번스타인은 1년 뒤 피츠버그 오케스트라를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그 후론 꾸준히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가장 미국적인 음악가
번스타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뒤숭숭해진 미국 사회에서 급진파 정치인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시련을 겪었다. 유럽여행을 위한 여권 갱신이 거부되기도 했고,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CBS로부터 방송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열렬히 환호하던 미국의 대중들이 등을 돌린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상과 활동이 왜 미국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일까’. 답은 이거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경제공황이 끝나고 찾아온 풍요로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전쟁이나 이념 따위의 골치아픈 일들은 뒤로 하고 그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미국인들에게 사회 자본주의니 계급투쟁이니 하는 케케묵은 말은 거부감만 일으킬 뿐이었던 것이다. ‘아! 불안감을 주는 사상은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현 미국 사회와 공존하지 못하는구나’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현재의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진보당을 지지하던 그는 곧바로 민주당의 열혈지지자가 되었다. 호감 가는 얼굴, 하버드 출신, 유창한 언변, 소탈한 성격 등은 그가 시련을 벗어나 더욱 큰 스타 음악가로 성장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어 주었다. 더불어,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유대인들의 티켓파워 덕분에 번스타인은 얼마 가지 않아 가장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현장에서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연주해 세계인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선사했다. 평생 줄 담배를 달고 살았던 그는 당시 폐암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세계 역사의 산증인이 된 기쁨에 고통을 잊고 환희를 만끽했다. 일평생 자유를 염원하며 곡을 쓰고, 지휘하고, 글을 쓰고, 해설했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10개월이 지난 후 영면의 길로 떠났다. 이민자의 아들, 유대인, 동성애자, 즉 3중으로 사회적 소수들 중 한사람이었지만 번스타인은 이 모든 것을 음악의 힘으로 극복해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음악가로 남아 있다.

‘볼테르’의 지성에 매료되어, <캔디드 CANDIDE>
작곡가로서의 번스타인의 입지를 확고하게 한 오페레타 (또는 뮤지컬)로,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풍자 소설 <캉디드>을 각색한 작품이다. 볼테르의 캔디드는 1956년 초연 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아 73회로 종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 리바이벌 된 이후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2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초연 이후 상연 될 때마다 가사가 조금씩 수정, 가감되어 수많은 버젼이 있다. 줄거리는 18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 북서부 베스트팔렌에 위치한 남작의 성에서 살던 순수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주인공 ‘캔디드’가 자신의 연인 ‘퀴네공드’와의 결혼 문제로 성에서 추방되어 겪게되는 여러가지 고난들 즉, 군입대와 전쟁, 탈출, 파도와 지진으로 인한 자연재해까지 파란의 생을 경험하며 낙천주의의 삶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게 고민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번스타인에게 캔디드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작가 볼테르의 지성에 반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신이 잠시나마 정치적인 활동을 했던 이유는, 캔디드의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오늘날의 불관용 때문에 부당한 희생을 당한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로하는 볼테르의 이상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소 체념적으로 끝나는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와 달리 번스타인의 <캔디드>에는 브로드웨이식의 익살과 활기가 가득하다. 너무나도 인기있는 캔디드의 대표곡이 있다. 바로 여주인공 퀴네공드가 부유한 보석상인으로부터 아름다운 보석을 받고 부르는 아리아 ‘보석의 노래(Glitter and Be Gay ; 기쁘고 즐겁게)’이다. 제목은 ‘기쁘고 즐겁게’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눈부신 보석과 귀금속을 통해 위안을 얻고 있는 여주인공의 복잡한 심정을 나타나는 노래이다.

미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
1957년 뉴욕 브로드웨이 윈터가든극장에서 초연해 성공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1950년대로 옮겨 각색한 것이다. 굵직한 줄거리는, 빈민가 웨스트 사이드에 사는 폴란드계 이주민의 아들인 청년 토니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마리아가 서로 첫눈에 반하는데, 토니가 속한 갱단 ‘제트파’와 마리아의 오빠가 속한 갱단 ‘샤크파’가 충돌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비극으로 치닫는다는 스토리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뉴욕 뒷골목 이민자들의 암울한 현실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과 화해를 주제로 한 뮤지컬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맘보, 차차차, 우아팡고 등 남미 음악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게다가 쿨재즈, 락앤롤, 클래식한 오페라 스타일이 모두 혼합되어 있다. 현대적 음악 양식을 고전적인 작곡 기술과 융합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음악, 가사, 안무, 사회 문제 반영 등으로 이전까지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비해 한 단계 진보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 나아가, 뮤지컬도 오페라 못지 않은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작품은 너무나 유명해서 인기곡도 많다. 토니가 댄스 파티장에서 나와 어두운 거리를 거닐며 혼자 부르는 노래 ‘Maria’, 샤크파 청년들이 푸에르토리코 여성들과 맞대결하는 장면의 ‘America’, 마리아가 드레스 가게에서 토니를 기다리며 부르는 ‘I Feel Pretty’, 토니와 마리아가 결혼을 약속하며 부르는 노래 ‘One Hand, One Heart’ 등이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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