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고대사 미스터리(1) 고구려편

지난 이야기
700년 역사를 지닌 고구려와 백제가 사라지고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민족이 활동하던 영토가 축소되어 아쉽지만 단일민족의 개념이 생기고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수 문제의 30만 대군은 전염병 때문에 고구려 침략에 실패 했는가?
먼저 중국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에 기록된 고구려 침략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수 문제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섰지만 전염병이 번져 회군했다. 또한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나라 해군도 풍랑을 만나 철수 했다. 고구려 정벌에 나선 군사들은 열에 여덟 아홉은 죽었다.” 수서의 기록이 좀 이상합니다. 세계 전쟁사 어디에도 전염병으로 90%의 군사가 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수서의 기록과 비슷 합니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우리나라 사료는 빈약하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중국 사료를 많이 참고한 결과 중국 측 기록과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이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역사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해동고기, 구 삼국사, 서곽잡록 등 우리나라 기록들을 참고했고, 우리나라 기록과 중국 기록이 다를 경우는, 우리 기록을 우선 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31년 “조선상고사”를 조선일보에 연재 했는데 수 문제의 고구려 침략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수나라 군대는 전염병 때문에 철수한 것이 아니라 요하 전투에서 강이식 장군의 기마병에게 패해서 도망갔고, 수나라 해군 역시 고구려 해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된 것이지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니다” 신채호 선생은 처음으로 우리에게 강이식 장군의 이름을 소개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 내용의 진실 공방이 많습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양제의 113만 대군은 진실인가, 중국의 과장인가?
앞서 소개한 수나라 역사서 수서 기록을 살펴 봅시다. 수양제가 113만 전투병과 보급병 등 2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 했으나 실패하고 대부분이 전사했다. 요동성에 6개월 간 발이 묶인 수양제는 별동대 30만 5천을 뽑아 수도 평양성으로 진격했지만 보급 물자를 실은 수나라 해군은 고구려 고건무 (훗날 영류왕) 장군에게 괴멸되어 군수품 보급을 받지 못하자 수나라 별동대는 군량 부족으로 철수했다. 철수하는 도중에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의 공격을 받아 전부 전사하고 2700명만 살아서 도망쳤다. 수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user image

중국의 일관된 전쟁 역사의 기록은 중국이 패배한 전투는 축소하고 승리한 기록은 과장하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정직하게 기록합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수서는 당 태종 이세민의 지시로 편찬 되었는데 380년 동안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건국은 긍정적으로 기록합니다. 하지만 수양제를 폭군으로 기록해야 수양제의 폭정에서 백성들을 구제하고 당나라를 건국한 정당성이 있으니까 수양제의 패전 기록도 정확하게 기록 했습니다. 하지만 당 태종은 고구려를 극도로 싫어해서 고구려 장수들의 이름은 고건무 (훗날 영류왕) 을지문덕을 제외 하고는 전부 기록이 없습니다. 반면에 패전한 수나라 장수들의 이름은 수서 열전편에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또한 수나라의 패전 내용만 기록하고 전투 내용은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수양제의 100만 대군은 6개월 동안 요동성에 묶여 있었고 이로인해 전쟁의 흐름이 바뀝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동성주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수나라 군수 기지인 영주를 선제 공격하여 수나라 보급선을 길게 늘여 고구려 승리에 기여한 장수의 이름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진실인가?
필자가 학창시절 배운 내용입니다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나라 제독 내호아는 고건무 장군에게 괴멸되어 수나라 육군에게 보급품을 제공하지 못했다. 우중문 우문술이 거느린 수나라 육군은 식량 부족으로 퇴각하는데 살수를 (지금의 청천강) 건널때 강 상류를 막은 보를 터트려 수나라 30만 대군을 수장시키고 겨우 2700명만 살아서 도망쳤다.” 과거 교과서에 등장한 살수대첩 내용입니다. 21세기 들어서 전쟁사를 전공으로 하는 역사 학자들이 생겼고 이들은 미스터리 역사를 분석 했습니다. 토목 건설 전문가는 1400년 전 기술로 청천강 상류의 몇 억톤 강물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수나라 대군이 살수를 건널 때 상류의 보를 터트려 수장 시키는 것은 더욱 허구 입니다. 청천강 물이 상류에서 하류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2~3일 소요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이 기록한 고 당 전쟁의 기록은 진실인가?
1) 전쟁 초기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645년 4월 2일 전쟁이 시작되어 6월 1일 까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을 차례로 함락 시키고 백암성은 항복합니다. 요하를 따라 늘어선 요하 방어선 7개 성 중에 4개가 무너졌죠. 구당서에는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을 치하하고 포로 700명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은 요동성이 함락되자 당 태종 이세민은 포로와 요동성 백성 4만명을 노예로 끌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모성은 수비군 2천명 정도의 작은 성 입니다. 하지만 개모성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이세적의 전공을 부풀린 의도가 있고 포로 700명을 석방하여 고구려 군에 합류 시킨다? 전쟁 중에는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2) 주필산 전투에 관한 구당서의 기록을 살펴 봅시다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고구려는 구원병 15만을 보냈다. 당 태종은 4만 군사로 3면 협공작전을 펼쳐 욕살 고연수와 욕살 고혜진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를 괴멸 시켰다. 당나라 군대의 힘을 절감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했다. 하지만 당 태종은 항복한 고구려 군사 15만을 풀어 주었다.” 중국의 기록은 의문 투성이 입니다. 4만의 군사로 삼면 협공하여 15만 대군을 괴멸 시켰다? 그런데 괴멸 당하고 남은 군사 15만명을 석방했다? 요동성 함락 후 백성들 까지 노예로 끌고가는 당 태종 이세민이 15만명을 풀어준다? 평양성으로 돌아간 군사들은 다시 당나라와 싸울 것이 뻔한데 앞뒤가 안맞는 기록이네요.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봅시다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대로 고정의가 지휘하는 15만 구원병을 파견했다 고정의는 부장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는 식량도 부족하고 병참선도 길어서 장기전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굳게 지키다가 적이 퇴각할 때 후미를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다 그러나 2명의 젊은 부장 욕살 고연수와 욕살 고혜진은 당나라 군대를 얕보고 또한 전공이 탐나서 자기 휘하의 소수 군대를 끌고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다 이세민의 대군에게 협공 당하여 군사 절반은 죽고 절반은 항복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남아있던 우리나라 기록을 참조하여 지휘관은 대로 고정의 라고 기록합니다. 다만 군사 숫자는 15만으로 구당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 같습니다. 요동 방어선과 평양성을 지키는 군사를 제외하고 15만 군사를 파견한다? 당시 고구려 인구가 300만 정도인데 15만 구원병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구당서 기록은 당 태종의 전공을 부풀리기 기록입니다.

•참고사항 : 대로 고구려 1등급 관직, 욕살 고구려 5등급 관직

주필산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와 구당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안시성 구원군의 지휘관은 대로 고정의가 맞는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군의 지휘 임무를 젊은 장수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맡길 연개소문이 아닙니다. 게다가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은 고구려 5등급 관직으로 한개 성 수비군 1만 정도를 지휘하는 품계 입니다. 따라서 전쟁 경험이 풍부한 1관등 대로 고정의가 지휘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구원병의 규모 역시 미스터리 입니다. 당시 고구려 인구가 300 ~ 350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고구려 병력은 30만을 넘기 힘듭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요동 방어선에 전 병력의 60% 이상 배치 합니다. 그리고 평양성 수비군과 신라를 견제하는 남쪽 국경 수비군을 제외하면 삼국사기 구당서 등에 기록된 15만 구원병은 과장된 듯 합니다. 아마도 기록의 절반 정도인 7~8만 구원병 정도가 출정했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직속 부대를 데리고 출전해서 패한 군대를 제외하고도 5만 이상의 고정의 본대가 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설을 전제로 해야 안시성 전투에 대한 의문점이 어느정도 해결됩니다. 주필산 전투는 우리와 중국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투입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후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진국 (발해)를 건국합니다.

다음 이야기
안시성 전투를 지휘한 장수는 안시성 성주 양만춘 일까요? 또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 맞을까요? 고대사 미스터리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One comment

  1. 우리측 역사책에는 고구려 멸망 후 우리 민족의 활동영역이 축소되었고, 단일민족의 개념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한국은 통일신라라고 부르지만, 북한은 후기신라라고 부르는데 (저도 북한의 후기신라 표기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고구려 멸망후 겨우 30여년 공백후 발해가 건립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활동영역이 축소된건 고구려 멸망후가 아닌, 발해멸망 후가 정확하며, 그 후 고려밖에 나라가 남지 않아서 고려부터 단일민족의 개념이 성립되었다고 보는게 옳지 않나 합니다.
    또한 신라의 통일이라긴 보단 당나라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당한게 사실이지 않나 합니다.
    당과 손잡기 얼마전에도 백제에 의해 여러 성이 점령되어 고구려에 구원요청했던 신라가
    갑자기 국력이 강화되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힘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