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나이 듦의 소고(小考)

얼마 전 누군가 보낸 카톡영상에서, 젊은 알바생에게 반말을 하는 어른에게 알바생 역시 반말로 응징하며 무례한 어른을 바보로 만드는 코믹한 패러디 물을 보았다. 그것을 보낸 이는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영상으로 보낸 모양인데, 이를 받아 본 어른은 웃지 못한다. 왜 이 사회는 이렇게 어른들을 바보 취급을 하는 영상을 만들어 공유하며 기성세대를 부정하려는 것인가?

이 영상을 보낸 이가 70이 된 노인네라는 점이 더욱 아이러니 하다. 그는 자신도 그 패러디 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영상을 다른 이에게 보냄으로 자신은 좀 다른 부류라는 것을 자위하며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인가? 아마도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세대 갈등일 것이다.

한국전쟁 직 후, 어려운 환경 속에 빈곤한 성장과정을 거친 기성세대와 전쟁의 흔적을 전혀 느끼지 않은 안정된 시대에 태어나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행운의 젊은 세대가 너무나 다른 가치관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를 접어둔 채 서로를 외면하며 깊은 갈등의 골을 쌓아가고 있다. 이런 갈등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의도도 한몫을 한다. 각각의 진영이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갈등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이런 현상을 방치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좀더 나은 공동의 미래를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대들의 미래가 될 늙은이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나이 듦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가 망가지고 정신이 시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젊은이들은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각 세월의 매듭마다 다 특유의 가치와 분위기, 나름의 난관 등 각각의 시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정 문화를 경험하며 살게 된다.
40을 넘기면서 이제는 청춘이 사라졌다는 회한으로 한동안 술독에 빠져 살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래도 동시에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없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홀로 서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술회하던 친구였다.
필자 역시 50이 되면서 생이 반환점을 돌았다는 숫자의 나이로 인한 당황스러움 그리고 젊은 시절 외면하던 트로트 가요가 정겹게 들리기 시작하는 감성의 변화를 겪었다.
60이 되면 더욱 심각한 번뇌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손에 쥔 것은 초라하기만 하다는 절망감에, 지나온 삶은 짧아지고 하룻밤은 한없이 길어지는 경험을 시작한다.
이렇듯 세월을 보내면서 매 순간마다 느끼는 특유의 감성과 지혜 그리고 문화가 따로 존재하는데, 그 누가 이것을 가치없다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이 든 인간들 역시 젊은 그대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나이에 맞는 대우와 존중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나이든 사람은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늙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을 지나야 저녁이 되듯이 늙음 역시 젊음을 거쳐 생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젊음은 늙음에 대한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늙음을 무시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늙음이란 우리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표다. 아무리 화려하던 여름의 초록도 언젠가는 가을단풍이 되고 또 낙엽으로 지게 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늙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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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자존 역천자망 順天者存 逆天者亡
천리(자연)에 순종하는 자는 번영과 생존을 누리고,
거스르는 자는 패망한다는 맹자님의 말씀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생각보다 많다.
적어도 삶에서 보존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안다.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인다고 그대로 반응하거나 수용하지 않는다. 마음에 담아 상처가 되고, 들어서 득이 없는 것은 그저 흘려 보낼 줄 알게 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번뇌도 그저 생각만 돌리면 안락한 평화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늙음을 채운 세월이 전해주는 지혜다.
친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도 알게되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평생의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기에 매 시간 정성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뜨거운 육체적 갈망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 역시 세월이다.
나이가 들면 비로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
철없이 맑은 아침 이슬도 아름답지만, 붉은 저녁노을의 성숙한 포옹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길가에 흔한 들꽃들의 재잘대는 소리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줄 알고, 메를 넘어온 바람이 전하는 소식을 읽을 수 있고, 차가운 겨울서리가 어린 새싹의 생명수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생명의 귀함을 알기에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려 노력한다.
자연에서 영혼을 찾아내는 이러한 공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겪은 기쁨과 슬픔, 사랑과 우정, 책과 음악, 일과 여행 그리고 그것을 통해 느낀 쾌락과 고통의 체험을 통해서만 비로서 갖게되는 감성적 교감 능력이다. 지혜로운 늙음은 치열한 젊음의 결과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또한 나이가 든 사람은 용감하다.
그들은 죽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고 그와 맞서서 싸우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공포를 직면하고 사는 노인과 영원한 젊음을 믿는 청년과는 삶의 시야와 지혜가 같을 수는 없다.
결국 나이가 든다는 것, 노년이 된다는 것은 인생의 한 과정일 뿐이다. 다른 과정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매시간 새롭고 낯 설은 상황을 마주하기도 하고 또, 나름대로의 의미와 과제를 갖는다. 그들도 삶의 경외로움과 여전히 성장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들의 과제가 죽음을 성찰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젊은 그대들과 다르다고 결코 무가치 한 것은 아니다.

<천개의 눈에는 천개의 세상이 있다>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제목처럼 세상의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각자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줄 모른다.
그런 천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함께 공존하기 위하여는 서로를 존중하고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공감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런 공감의 세계에서는 늙음이나 젊음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젊음과 늙음이란 단지 시간적 차이만 존재하는, 원론적으로 같음일 따름이니, 상대를 부인한다는 것은 곧 나를 부인하는 것이고, 늙음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한가지다. 젊은 그대들이 그러하듯이, 늙은 사람 역시 그대들 못지 않게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늙은이 함부로 대하지 마라, 그대 자신을 타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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