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황홀한 일상

가상화폐, 주식, 아파트, 매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욕망의 광기가 오랜 팬데믹으로 턱밑까지 올라온 인류의 불안 같다. 남의 얘기를 열심히 퍼 나르고 단편적인 사실만을 옮기는 데 급급한 이들이 근래는 사뭇 경박해 보인다. 더는 이전과 같은 정상적인 일상을 맞이할 수 없다는 초조함인지 억눌린 상황 뒤에 터져버릴 희망의 복선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욕망은 바이러스보다 빨리 퍼져 온 세상은 투기의 대상이 된 것 같다. 그 광기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너도나도 욕망의 전차에 올라타는 기폭이 되고 성급함이 장악한 세상에서 이제 잔잔한 일상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마침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식과 아파트 얘기가 아니면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다. 어떤 말이나 사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제 경박함을 드러내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런 경박함이 일상이 되었으므로 함께 경박하지 않으면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뒤쳐지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게 웃지 못할 일에 동조하며 웃어야 하는데 억지 웃음이 그저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슬픈 것이다.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생이고,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 삶은 참으로 허망하고 무상한데, 그렇게 방금 얘기해 놓고선 재빨리 표정을 고쳐 지난 번 산 주식이 두 배로 오른 것과 버린 셈치며 가지고 있던 아파트의 값이 올랐다는 데 얼굴을 무너뜨리며 기뻐하는 걸 보면 어찌하여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이 고작 그런 것들 밖에 남지 않았을까 하고 슬픈 것이다.

일상은 사라지고야 말았는가, 다시 황홀한 일상을 위해 혹 기함 하겠지마는, 집으로 가자.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 집으로 가자. 꽉 막히는 푸미대교를 지나고, 오토바이로 넘쳐나는 하이바쯩 거리를 뚫고 아내에게로 가자. 아내에게로 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듣고,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며 팔을 끝까지 뻗었다가 몸을 뒤틀고 고개를 젖히다 먼 별을 보며 감탄한다. 차에 밟혀 내장이 터진 채 길가에 널브러진 개구리를 아무 느낌 없이 지나치고 가끔 떨어진 프렌지파니 꽃을 주워 냄새를 빨아 마시고 다시 조신하게 버린다. 산책하며 집주인 욕을 하기도 하고 지난 날 고마운 사람을 불러내 지금은 어찌 지내나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 단촐한 의식 같은 하루의 마무리가 그저 똥 같은 삶을 그래도 살만한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오랜 동지처럼 서로의 마음을 토닥이는 아내와의 잡스러운 대화는 하루 중 큰 기쁨이다. 우리는 하루를 기만으로 산다. 나조차 나를 속였던 자기기만의 하루를 보내며 나인 것 같지만 내가 아니었던 나에게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하루는 내가 없었고 내가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성급함, 바쁨으로 아무렇게 흘러간 하루는 빼앗긴 하루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게 놔두어선 일 년을 빼앗기는 게 시간문제다.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 Thomas Mann이 ‘마의 산’ Der zauberberg 에서 사라지는 시간에 대해 내 놓은 명쾌한 답은 속도와 단조로움의 역설 속에 사는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판다.

“대체로 내용이 재미있고 신기한 경우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즉 시간이 짧아진다고 생각하는 반면 단조롭고 내용이 없는 경우는 시간이 잘 가지 않고 더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내용이 없고 단조로운 것은 사실 순간과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지도 모르나 아주 커다란 시간의 단위일 경우에는 이를 짧게 하고 심지어 無 같은 것으로 사라지게 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이 풍부하고 재미있는 경우는 시간과 나날이 짧게 생각되고 훌쩍 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 단위를 아주 크게 하여 생각해 보면 그럴 경우 시간의 흐름에 폭, 무게 및 부피가 주어진다. 그리하여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빈약하고 내용이 없으며 가벼운 세월보다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우리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시간의 병적인 단축 현상이다. 그리하여 나날이 하루같이 똑 같은 경우 오랜 기간이 깜짝 놀랄 정도로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이다. 매일 똑 같은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완전히 똑같다고 한다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체험되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거나 또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체험되고 나중의 세월은 점점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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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날 방도는 나조차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사건의 시간들을 자주 만드는 데 있다. 그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으로 놓여나는 유일한 해방의 이 시간들, 내 앞에 당면한 일들을 눈 여겨 보고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시간, 나와 지금 대화하는 사람의 생각 속을 들고나며 반어와 유머가 난무하는 말들로 근사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내가 봤던 세계들의 진의를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닫고 비로소 아, 감탄하는 시간, 이 시간을 어찌 마다 할 것인가. 술자리를 늘 거절하여 미안하지마는 친구여, 나에겐 볼 일이 있는 것이다.

산수유 꽃 날리던 날, 시원한 계곡 끝에 편평한 바윗돌을 찾아 허리춤 차고간 술을 꺼내고 병뚜껑에 나눠 마시며 드러누웠던 날, 하늘에 흰구름,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살에 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계곡 물 소리, 연두색 풀꽃들, 노란색 산수유 꽃에 끊임없이 웃어재끼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지만, 세상에, 그녀와 그런 웃음이 있었다. 유성이 비처럼 내리던 밤, 큰 놈과 침낭을 나눠 덮고 방금 꺼진 모닥불 잔불 냄새 맡으며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을거라,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마침내 눈이 커졌을거라,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말을, 세 번 내뱉으며 침낭 자크를 올리고 경이로운 하늘을 봤지. 추운 겨울 감탄하며 침묵했던 5분, 그렇게 가슴 뛰고 재잘대던 침묵도 없었을 테지. 두 해 전, 우리 10년 뒤 어떤 모습일지 하얀 종이에 그려보자고 딸이 말했다.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얼얼했던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간을 더 달라, 더, 더 하며 마침내 완성한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던 때,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그림을 설명하며 딸은 환한 얼굴이 되고 이미 댄스 가수가 되어 있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먼데서, 다른 사람들과 젠체하며 꿈을 얘기했었다. 내 앞에 딸아이의 모습으로 다가와 앉아 있던 신을 몰라보고선 말이다. 아, 그래서 얼얼했던 것이다.
나에게 욕망이 하나 있다. 주식과 아파트와 연봉과 집의 평수가 침범하지 않는 일상을 늘려 나가는 것, 한번뿐인 짧은 내 삶이 나보다 긴 수명을 가진 것들로 인해 훼손되지 않게 하는 것, 내가 죽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에 내 단명함이 갉아 먹히지 않게 하는 것이 내 일상의 욕망이라면 욕망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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