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ne 13,Sunday

팬이 되었습니다

간만의 휴일을 맞았습니다. 제대로 게으름을 떨어 보겠다 작심하고 침대를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몸을 바로 했다 뒤집었다 방정을 떨었지만 찌를 듯 날카로운 사이공의 햇살, 스멀스멀 들어오는 열기가 기어코 몸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노트북도 핸드폰도 열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딱히 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뉴스 정도는 봐야겠지 싶어 콘텐츠 목록을 살피는데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배우 윤여정님의 오스카상 수상 소감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하품을 두어 번 한 후에 연결된 영상 보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아, 불과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수상 소감이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심장이 찌릿, 저렸습니다. 이걸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사들을 살펴보니 저 혼자 뒤늦은 반응이었습니다. 외신도 한국의 매체들도 앞다퉈 그녀의 수상소감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홀로 감춰진 보석을 발견한 게 아니라 남들이 다 알아 본 보물을 뒤늦게 알아채고 뒷북치기에 열심인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사를 뒤져보니 뉴욕타임즈는 ‘몹시도 딱딱했던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2021 오스카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The Best and Worst Moments of the 2021 Oscars)’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님의 수상 소감을 ‘최고의 수상 소감(Best All-Around Acceptance Speech)’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지에서는 ‘최고의 수상 소감상’ 이 있었다면 윤여정이 2관왕을 차지했을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왔답니다. 같은 신문의 카일 뷰캐넌 기자는 2022년 오스카 시상식 진행을 윤여정님에게 맡기자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는데 그 뿐 아니라 허핑턴포스트의 제나 아마튤리 기자 역시 트위터에 윤여정과 올리비아 콜먼(2019년 여우주연상 수상자)을 내년도 오스카상 공동 진행자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왜 그녀의 수상 소감에 유수의 언론과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일까요? 기사를 보니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녀의 공감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트위터에서는 이날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나온 브래드 피트에게 “반갑다(Brad Pitt, nice to meet you)” 인사하며 너스레를 떤 윤여정님을 지구상에서 가장 공감력이 높은 사람(apparently the most relatable person on Earth)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시상대에 오르면서 브래드 피트에게 “드디어 우리 만났네요. 털사에서 우리가 촬영할 땐 어디 계셨던 거예요? 만나서 정말 영광이에요.” 하고 농을 던졌습니다.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의 제작자였습니다. 그녀는 가벼운 농담으로 그들의 관계를 실어 보내며 좌중을 하나로 묶어 집중하게 했습니다.
두번째는 여덟 차례나 후보에 오른 글렌 클로즈 등 다른 배우들을 거론하며 그들의 노고를 높이 산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경쟁자를 제치고 월계관을 차지한 승자의 여유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달린 동반자로서의 따스한 격려였습니다.
세번째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인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자신의 국적과 이름을 명확히 함으로써 최근 미국 내 사회문제인 동양계 혐오 분위기나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마치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일하는 엄마로서의 당당함은 여성과 일에 관한 이슈를 내세우지 않고도 충분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를 일하게 만든 아이들이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저는 시상식에 나타난 그녀의 매력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키워드로 평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정체를 흐리지 않는 겸손, 겸손을 잃지 않는 솔직함, 솔직함을 빛나게 하는 유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어우러지게 하는 품위입니다. 그것을 그녀의 수상 소감과 함께 적어 보았습니다. 이 칼럼에서 큰 따옴표로 옮긴 수상 소감은 매체에 올라와 있는 자료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먼저 그녀가 가진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에서 왔고 제 이름은 윤여정입니다. 유럽인들 대부분은 저를 ‘여영’이나 또는 ‘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지만 오늘만큼은 여러분 모두를 용서하겠어요.”
그리고 겸손입니다. “저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를 이기겠어요? 저는 그녀의 영화를 수없이 많이 봤습니다. 다섯 명의 후보가 모두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잖아요. 우리끼리 경쟁할 순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은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죠. 여러분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네요.”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고, 서로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말한 이 대목은 다른 경쟁자들을 감동하게 했지만 아마 제일 감동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저였을 것입니다.
그녀의 솔직한 표현들은 유머로 인해 빛이 났습니다. 브래드 피트와 인사를 나눌 때에도, 자기 소개를 할 때에도, 다른 후보자들과 마음을 나누고자 할 때에도, 이 모든 것의 사이사이에는 유머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사람들이 이 동양의 작은 여성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도록 했습니다. 유머와 재치 있는 입담에도 시상식장의 그녀는 가볍지 않은 품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을 어우러지게 하는 품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저는 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수상자로 호명되어 일어섰을 때 시상대로 오르는 그녀의 걸음을 위태롭게 했던 나이,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두 가지 질문을 하면 앞의 질문을 잊어버리는 나이, 옆에 앉은 여배우에게 출연료를 얼마 받았지? 하고 물어볼 수 있는 나이, 사십대의 감독에게 존경을 말할 수 있는 나이, 그리고 자기의 가는 길에 대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삶의 비밀을 알게 된 나이입니다. 그 나이를 받아들이며 세월에 당당하고 동시에 겸손했던 그것이 그녀를 우아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배우 윤여정님은 한국시간 4월 26일 미국 로스엔젤레스 유니온 스테이션역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작품 미나리를 보지 않았지만 이 수상소감 하나로 그녀의 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벌써 몇 번째 시상식 수상 소감을 다시 보기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칠십 사세, 그녀의 매력이 세상을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녀를 영글게 한 주인공, 세월과 그녀의 나이에 찬사를 보냅니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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