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9,Friday

나의 사람들아, 나는 잘 살고 있노라

 

 

근래 베트남 코로나 소식이 한국에 제법 자세하게 알려졌던 모양입니다. 소식을 접한 지인들의 연락으로 지난 주는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반가운 목소리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전화기를 붙잡고 밀렸던 말들을 즐겁게 쏟아냈습니다. 거긴 괜찮냐는 안부와 지내기에 어떠냐는 말에 넉살을 보태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젠 올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새삼, 여기가 베트남이라는 자각이 일어나더군요. 어쨌든 고맙지요, 긴 시간 떨어져 있으면서도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와 주시니 반갑기가 그지없었습니다. 한번 떠나와 봐서 그런지 다시 떠나는 데는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중에 돌아오라는 친구들의 목소리는 역마살을 소환하는 부지깽이 였지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불붙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힘겨웠습니다.

그렇다고 이곳 생활이 힘들거나 싫지는 않습니다. 어딜 가든, 어디에 살든 고민과 불안은 생기기 마련이니 자잘한 불안들을 늘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잘 살기 위해선 사는 곳이 중요하겠지만 다 살기 위해선 어디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살든 우리 삶은 ‘임시’이자 과정이고, 또 영원이자 찰나입니다. 한국에 있건 베트남에 있건 ‘산다’는 동사의 동질성은 같고 ‘존재한다’ 동사의 허망함도 다르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한 살아야 하고 사는 한 불안과 기쁨과 고통은 늘 둘러멘 배낭처럼 따라다니니 보고 싶은 사람들 만나면서 만고에 허당인 내 속내를 죄다 드러내 보이고 웃고 사는 게 제일이지요. 당장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을 이리도 둘러 말하다니요. 자주 뵐 수 없는 나의 사람들에게, 다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잘 지내고 있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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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집에 세바스티앙이라는 프랑스 아재가 삽니다. 제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를 닮았습니다. 고향도 까뮈와 같습니다. 지난 제 생일 언저리에 그 집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했는데 대화 중에 제 생일을 알게 됐고 자기 집에 잠시 다녀오더니 기타를 가져와 알 수 없는 샹송을 연주해 줬습니다. 그리곤 생일 선물이라며 자신의 기타를 저에게 주더군요. 과분한 것 같아 사양했습니다.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해달라는데, 더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지난 토요일, 비가 쏟아지는 저녁, 퍼붓는 빗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히기를 소심하게 바라면서 오랜만에 기타를 들고 마당에 나갔습니다. ‘날아라 병아리’를 멱을 따며 불렀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자이언츠 경기 전에 아들과 캐치볼을 했습니다. 만 13살 남자아이는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하루가 다르게 구속이 세집니다. 직구와 변화구를 마구 섞어 던지더니 이제는 공을 받는 제 손이 아플 지경입니다. 절대 아픈 티는 내지 않습니다. 의연한 척, 안 아픈 척하면서 저도 아들에게 지지 않으려 더 세게 던집니다. 어리석은 애비 같으니, 어깨가 아파 낮잠 자는 체하며 드러누웠습니다. 그날 저녁, 자이언츠가 9회초 6점차를 뒤집으며 대역전극을 펼칩니다. 여기 호찌민에는 억수같은 비가 내리지만, 화창한 부산에서 9회 역전하는 자이언츠 경기를 보는 건 큰 기쁨입니다. 저 잘 지냅니다.

하루를 온전히 노는데 바친 아이가 밤에 지친 몸으로 들어올 때, 햇빛에 건조됐던 아이의 머리 냄새가 저는 좋습니다. 이렇게 놀던 아이들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안타까워 재미있는 일 하나를 생각해냈습니다. 집 앞 야자나무에 자일(등산용 로프)을 연결해서 작은 짚라인을 만들었는데요, 혹시나 싶어 들고 다니던 등산장비가 이곳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영락없는 짚라인입니다.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옆집, 뒷집 아이들 할 것 없이 몰려와 짧은 짚라인을 타고 또 탔습니다. 첫 개시 전, 제가 만든 짚라인이 안전한지 보기 위해 제일 처음 장비를 걸고 타고 내렸는데 제 몸뚱이가 갈피를 못 잡고 마당에 풀들과 함께 뒹구는 모습을 보고 다들 배를 잡고 웃습니다. 고소함을 느꼈는지 허리를 꺾고 웃어재낍니다. 저리도 어설픈데 ‘에베레스트는 어째 갔나?’ 하더군요.
고민과 불안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없애거나 애써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괴로움을 찬찬히 마주하면 괴로움은 자신을 알아줘서 고맙다는 듯 모습을 감추더군요. 잘 사는 건 괴로움도, 고민도, 불안도, 기쁨도, 즐거움도, 그리움도, 떠나고 싶은 마음도 보고 싶은 마음도,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마주치면 마주치는 대로 찬찬히 마주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자신 있게 잘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질문하고, 세계는 침묵하는데 질문과 침묵 사이의 끝없는 대결이 삶이고 이때 생겨나는 것이 부조리’ 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는데 한 마디로 없는 답을 두고 끊임없이 답을 찾아 헛발질하는 게 삶이라는 말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 삶의 길은 수정되고 철회되거나 만회되고 보완됩니다. ‘꼭 그리 될 것이니 틀려도 괜찮다, 모르면 묻고, 부족하면 배우면 된다, 잘하고 있으니 너무 애쓰지 마라’ 고 내 어깨를 스스로 어루만집니다.

그렇게 시간을 밀쳐내고 나아가다가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나겠지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때까지 아프지만 마세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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