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October 21,Wednesday

민심은 천심! 1, 2차 베-명 전쟁


베명전쟁은 크게 쩡(Trần) 왕조 말 나라를 찬탈한 호귀리와의 전투 및 이후 명나라에 복속된후 민중봉기를 일으킨 레러이와의 2차 전투로 나누어진다. 1차 전투는 명나라에 패해 베트남이 다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2차 전투는 민중봉기를 통해 다시 국권과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이 두 전쟁은 결국 민심을 얻어야 전쟁의 승리도, 나라의 독립도 쟁취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호귀리와의 1차전 (1406-1407)
14기 말 쩡 왕조(Triều Trần)시대의 실권자 호귀리( 왕을 압박하여 왕위를 찬탈한다. (1400년) 과감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호귀리는 베트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수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왕조를 찬탈했다는 이유로 민심은 이미 그에게서 떠난 상태였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트남을 호시탐탐 노리던 중국이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쯩푸(Trương Phụ) 대장군과 20만 대군을 파병한다.

당시 호귀리는 군을 재편성하고 전력을 세우는 등 항쟁의 의지를 굳게 한다. 특히 당시 베트남의 전략무기였던 대포 ‘숭텅꺼’(súng thần)는 명나라의 것보다 우수했다. 그는 또한강 하류와 협곡 여러 곳에 쇠사슬과 쇠말뚝을 박아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특히 땅빙(Tản Viên;Hà Tây)산에서 다(Đà)강, 홍(Hồng)강, 룩(Luộc)강, 타이빈(Thái Bình)강, 룩여우(Lục Đầu)강 일대 400km에 걸쳐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명나라군은 파죽지세로 베트남땅을 진격해 들어오고 마침내 1407년 11월 20일 요충지였던 다방(Đa Bang)성진지도 무너진다. 호귀리는 서둘러 탕롱(Thăng Long)으로, 다시 홍(Hồng;Nam Định)강 하류까지 밀려갔다가, 결국 1407년 6월 끼안(Kỳ Anh ;Hà Tĩnh)에서 붙잡혀 중국으로 압송된다. 그 결과 전쟁이 발발된 지 반년도 안되어 베트남은 다시 중국의 식민지가 되고만다.

한편 사가들은 당시 패전의 이유에 대해 “나라의 극심한 혼란과 천재지변, 민심이 반”을 들고 있다. 당시 호귀리가 민심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의 아들 윙쭝(Nguyên Trừng)이 아버지께 고백한 말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폐하, 적군의 공격은 조금도 무섭지 않으나 민심이 우리를 떠난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결국, 그는 천부적인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당대의 영웅호걸이었음에도 결국 지나친 야심과 민심을 외면한 댓가를 혹독히 치르게 된다.

레러이와의 2차전 (1418~1427)

당시 호귀리 부자는 명나라로 압송되어 갔지만, 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나라는 베트남 민족을 굴복시키기 위해 강력한 압제정책을 폈다. 먼저 중국의 문화를 대거 유입하여 그들을 동화시키고자 했고, 철저한 감시와 검열이 일상화되었다. 특히 죄인을 산 채로 불태운다든가 (티우 송-thiêu sống),
내장을 꺼내 나무에 걸어두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으깨 기름을 짜는 등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공포정치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열망이 더욱더 강렬히 타올랐다.

민족해방의 열기로 충만하다! – 람성 봉기

한편 레러이(Lê Lợi)와 18인이 람성(Lam Sơn -Thọ Xuân,Thanh Hoá) 산에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하고, 명나라로부터 민중을 구하기 위해 봉기를 모의한다.(1416년) 이후 이곳으로 전국 각처에서 영웅 호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훗날 하노이 동관
(Đông Quan)에서 명군을 패퇴시킨 구국의 영웅 윙짜이(Nguyễn Trãi)도 이 시기에 합류한다.

레 타이 또(Lê Thái Tổ 黎太祖 1385년~1433년)
본명은 레 러이(Lê Lợi: 黎利)로, 람성 봉기를 일으켜 민중을 20년간의 명나라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마침내 왕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베트남의 최장기 왕조인 허우레 왕조를 창건하여 6년간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49세에 지병으로 사망한다. 현재호치민시 1군에 그의 전적을 기리는 레러이 거리가 있다.

밟으면 밟을수록 강해진다!

람성 의병은 1418년 2월 7일 봉기했다. 당시 레 러이(Lê Lợi)의 군사는 2천 명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변변한 군복이나 무기조차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은 한 끼 식사로 때우는 날이 다반사였다. 특히 비록 초반에는 군사 수가 100명도 남지 않을 정도로 치명타를 입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중의 지지가 강화되고 군사수도 보강된다. 당시 명군은 뇌물과 회유작전을 병행했는데 이 틈을 타 겉으로는 굴복하는 듯하면서 성을 쌓고 방어진을 구축하는 등 착실히 전력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뇌물공세가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되자 1425년 8월 명군이 총공세를 감행하는데 이때는 이미 광 빈(Quảng Bình), 광 찌(Quảng Trị), 트어 팅(Thừa Thiên) 등 탄 호아(Thanh Hoá)에서 하이 벙(Hải Vân) 능선까지 완벽한 진지가 구축되고, 보병, 수병, 기병, 상병(코끼리부대)에 이르기까지 람성의 병사수도 수만에 달한 상태였다. 바로 이때(1426년)부터 람성군의 주동적 공격이 시작되고 전투의 성격도 민족해방 운동으로 바뀐다. 한편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명나라도 5만의 병사를 추가로 파병한다. 1426년 9월 람성군은 1만여 명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맞대응했고, 그 결과 또옷동 (Tốt Động; 지금의 하따이성 부근)에 매복해있던 람성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후퇴했으며, 다시 쭉동(Chúc Động)에서 나머지 6만여 명의 명군이 몰사한다.

이처럼 레 러이가 베트남군의 수배에 달하는 적군을 지략과 용맹과 단합심으로 물리치자 명군은 다시 15만 명을 추가로 보낸다. (1427년 10월) 당시 명군의 리우탕(Liễu Thăng) 장군은 병사 10만과 함께 광서(Quảng Tây)에서 동관으로, 목탄(Mộc Thạnh) 장군은 병사 5만을 이끌고 벙남(Vân Nam)에서 라오까이를 지나 동관으로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리우탕이 이끄는 병사들은 산세가 험한 찌랑(Chi Lăng) 협곡에서 2차, 3차의 게릴라공습으로 거의 전멸하고 결국 적장은 목을 자살하고 만다. 또한, 목탄(Mộc Thạch) 장군 역시 이 같은 패전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아나다 병사 2만 명 이상을 잃는다.(1427년 10/8~11/3) 전투에서 레 러이는 마침내 명나라의 야욕을 완전히 꺾고 베트남 민족 해방의 대업을 이룬다.

시대별로 살펴보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전쟁들

● 흥브응 Hùng Vương 과 안증왕시대 ( ~ 938년)
진나라 등 역대 중국왕조와의 항쟁기 (기원전 2, 3세기)
비엣 떤 (Việt Tần ) 전투
하이바쯩 Hai Bà Trưng 봉기
바찌우 Bà Triệu 봉기
응오 전투 밧당 Bạch Đằng 강에서
● 중세 봉건시대 (939년~1858년)
송나라와의 1차 항쟁 (981년)
송나라와의 2차 항쟁 (l075~1077년)
몽고-원나라와의1차항쟁 (1258년)
원나라와의 2차 항쟁 (1285년)
원나라와의 3차 항쟁 (1287~1288년) 밧당
Bạch Đằng 전투 (1288년 4월 9일)
명나라와의 항쟁 (1406~1427년)

씸 (Xiêm; 태국)과의 항쟁 (1784~1785년)
베중전쟁 (1858 ~ 1945년)
● 1945~ 현재 (근, 현세)
프랑스 식민주의자와의 항쟁
딩빙푸 (Điện Biên Phủ) 전투1954년 3월 13일~5월7일)
베트남전쟁 (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
호찌민운동 (1975년 4월 26일 ~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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