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9,Friday

한국어는 제 1외국어

제목으로 삼은 ‘한국어는 제1외국어’ 라는 표현이 사뭇 생소합니다. 우리가 아는 제1외국어는 그냥 ‘영어’ 였습니다. 지금은 유치원 이전부터 영어를 가르친다는데 저는 중학교에 와서야 다른 나랏말로 영어를 처음 대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니 제2외국어라는 교과과정이 있음도 알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독일어와 일본어 중에 선택하도록 했는데 저는 독일어를 택했습니다. 지금도 정관사 변화, 부정관사 변화를 암송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대학입시는 영어로 보았습니다. 제2외국어로 시험을 택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제1외국어를 입시 과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왜 그렇게 2 외국어를 열심히 했나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제1외국어가 갖는 위상이 있으니까요.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을 보니 다른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한국에서 영어는 부동의 제1외국어입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한국어가 제1외국어가 되었답니다. 반갑지만 참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국어가 영어와 같은 반열에?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베트남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휘몰아치던 올해 초,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의 다섯가지 제1외국어에 한국어와 독일어를 추가하여 모두 일곱 언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하였습니다. 이제 베트남에서는 정규외국어교과과정에 한국어가 포함되며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의 외국어 과목으로 한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 효과가 얼마나 다르냐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제2외국어를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제시하는 범위 내에서 학생이 선택하도록 하는데 (사실 지금도 그런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때는 그랬습니다) 베트남은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외국어를 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느 학교에서 한국어를 교과 외국어로 지정하게 되면 그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은 자동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거지요.

이 일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국어는 2017년부터 중등학교 시범교육과목으로 선정되었고 2019년에는 제2외국어로 정식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다 2021년에 이르러 제1외국어 교과과정으로 승격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베트남에서 한국어 교육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한국학과가 처음 개설된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교는 1993년부터 한국어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처음에는 동방학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독립하여 한국어문학, 한국문화사회학, 한국경제정치학의 3개 학과를 가진 단과대학으로 성장했습니다. 인사대학교가 한국어학과가 아닌 한국학과로 출발한 것은 한국의 잠재적 가능성과 지정학적 중요도, 그리고 베트남과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면에서 긴밀한 관계가 예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았습니다. 지금은 국제관계학이라는 넓은 틀에서 베트남과 한국의 발전적인 미래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한국학과와 이 곳에서 수학한 인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한국어 숙련자를 양성하는 한국어학과를 두고 있는 대학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한국학과와 한국어학과를 망라하여 한국어를 정식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는 대학교는 전국적으로 32개 대학에 이릅니다. 한국어 석사과정으로서는 2018년 개설된 하노이국립외국어대가 대표적입니다. 다른 대학들도 석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한국학과는 90년대 중반 이후 한류 바람을 타면서 인기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한국 기업의 현지 진출이 늘어나면서 한국어가 가능한 인력의 수요가 급증하니 덩달아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입니다. 베트남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는 한국어 교육에 대한 수요를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왔고 현재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지정한 나라는 모두 41개 국입니다. 최근 인도를 비롯하여 러시아, 터키, 태국과 같은 나라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1외국어로 가르치는 나라는 베트남이 최초이며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기쁘기도 하지만 앞으로 가야 할 먼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난관도 있습니다. 먼저 대다수 초등학교가 영어를 제1외국어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위해 정부와 기관, 기업과 국민이 함께 힘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베트남 교육훈련부와 협력 협약을 체결해서 교과서와 학습자용 익힘책, 교사용 지도서의 개발, 교원 양성, 한국인 교사 파견 등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부디 이런 일들을 통해 한국어 교육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들이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보다 현지에 있는 우리의 관심이 먼저 요구됩니다. 뜻밖에도 베트남의 한국인들, 몇몇 한베 가정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결정의 의미를 거의 모르는 듯합니다. 그러니 교민 매체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귀를 열어 주고 자부심과 더불어 2세들이 비전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한국에서 스페인어가 2외국어로 열풍이 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배우는지조차 모릅니다. 좋은 소식에 찬 물을 끼얹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런 기회를 소중히 알고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한국 드라마에 염증이 나고 K팝에 나오는 예쁜 소년들에게 식상할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양선택 정도라면 한국어 교육은 전공필수에 해당됩니다. 그만큼 위력적인 파급효과를 몰고 올 수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영어가 아닌 한국어를 배우고 자란 베트남의 청소년들, 대학입시를 한국어로 선택하여 치룬 그들은 한국을 어떻게 여기게 될까요? 한국어가 통용되는 곳에서의 비즈니스는 어떨까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가 베트남에서 열리려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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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도 열매부터 수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밭을 갈고 누군가는 씨를 뿌리는 비전이 있었기에, 누군가는 물을 뿌리고 누군가는 뙤약볕 아래 돌보는 수고가 있었기에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사대를 비롯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학들에는 적은 급여에도 열심히 가르치는 한국인 강사들이 있습니다. 혹자는 시간 당 몇 만 동의 급료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에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일은 봉사이기도 합니다. 받는 돈에 더해 자기 돈과 시간과 재능이 들어갑니다. 그런 일의 대가로 학교에서 큰 것은 아니더라도 비자의 편의를 봐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자랑할 만합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일하는 기업인들이 늘어가고 한류가 인기를 얻으면서 작금의 결과를 촉진시켰을지라도 화려한 번성의 잎들 아래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뿌려져 양분이 된 이런 이들의 노고의 땀방울도 배어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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