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19,Friday

사이공의 그래피티 또는 낙서

‘그래피티(graffiti)’라는 예술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피티는 다양하게 불리는데 거리 미술이라 하거나 도시예술이라고 의미가 확장되어 불리기도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단순히 벽 그림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옳을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스프레이 아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로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이나 문자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업적 광고가 만들어낸 별칭이기에 그리 탐탁치 않지만요. 그래피티가 여러 용어로 불리거나 해석되는 것은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성격의 다양성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래피티는 화실이나 전시장과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제도권의 예술이 아니라 공간의 제약이 없는 ‘거리의 예술(street ar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피티에 심취한 어떤 부류는 미술의 기원을 그래피티에서 찾기도 합니다.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나 고대 이집트의 벽화가 모두 그래피티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뿐 아니라 자유로운 공간으로부터 전시장이라는 제도와 액자라는 공간으로 한정되기 전까지의 모든 미술 활동, 예를 들어 중세교회건축의 타일 모자이크나 스테인드글라스와 결합된 그림들, 건축물의 벽을 장식하는 프레스코화 등 건축과 일체화되었던 미술이 모두 그래피티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논리는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하지만 건축과 더불어 도시 공간의 한 이미지(경관)를 이루어 냈던 미술의 세계가 회화, 조각, 건축 등 각자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분화되면서 오히려 다양성과 풍부함에서 축소되거나 제한되고 심지어 퇴보를 가져왔다는 점에 대하여는 동의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래피티는 다양한 매체와 공간을 활용함으로써 예술과 도시가 하나처럼 여겨졌던 미술의 자유를 외친다는 측면에서 비록 불법적인 거리 낙서의 한 형태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가져왔습니다.

 

user image

이런 그래피티가 현대 미술의 한 분야로 다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간 그래피티는 합법적이지 못한 속성이 강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합법적인 벽 그림이 도시환경 미화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여졌다면 그래피티는 산업자본주의사회 속에서 미국의 흑인 힙합문화나 갱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비주류문화 또는 반사회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이런 그래피티가 인정받는 데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와 키스 해링(Keith Harring)과 같은 사람들의 노력이 컷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강렬한 표현방식을 배경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래피티를 단순히 낙서로 무시하지 않고 거리 미술문화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피티 신봉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절된 과거의 영광과 정통성의 부활인 셈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피티에는 비합법적 요소가 강합니다. 유수한 아티스트들이 현재 뉴욕과 같은 메트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들의 화폭이 사유재산이나 공공기물이 되는 탓에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의 영화에서 흥미로운 그래피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 파프롬홈(Far from home)’에서였습니다. 영화 어밴저스 마지막 편에서 세상을 떠난 아이언맨을 추모하는 그래피티들이 그것입니다. 이 그래피티들은 멘토였던 아이언맨을 추억하게 하는 동시에 그의 빈자리와 더불어 피터가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무게를 느끼게 되는 역할을 합니다. 영화에 나타난 그래피티는 태그(tag)와 그라프(graff)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태그는 상표 같은 것이고, 그라프는 빠른 속도의 이미지 작업입니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태그는 1960~1970년대에 스프레이와 마커를 이용하여 열차나 벽면에 닉네임을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부터 유래됩니다. 태그의 발전에는 그래피티가 불법이라는 점이 한몫 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노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애칭이나 별명, 이니셜 등을 서명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태그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늘게 되면서 그래피티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작가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그래피티 아티스트라 하기 보다는 ‘writer’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활동도 ‘writing’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태거라고 부릅니다.

 

호찌민의 거리에서도 이런 태그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이걸 그래피티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동물들이 자기 영역 표시를 하 듯 곳곳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공사 현장 펜스들과 더불어 도시를 어수선하고 흉물스럽게 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예술행위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불과 열 명 내외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작업에는 그래피티의 속성인 자유 넘치는 개성도, 표현의 참신함도, 사회고발도 없습니다. 그저 배설의 쾌감이 낙서로 드러나 보는 이에게 던지는 불쾌감만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추한 낙서입니다.

그래피티 작가가 공적인 장소에서 비합법성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작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희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래피티에도 보이지 않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호성입니다. 홀로 만의 창작일지라도 자기가 작업한 벽의 작품을 응시하는 시선들과 교감 되는 사회공동체 내의 상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피티에는 시대 또는 지역공동체와 나누는 정신이 있습니다. 심지어 스파이더맨 영화에서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래피티는 비합법성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인 정신을 담은 자유 예술의 하나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시 환경이라는 것은 건물과 길, 그것이 이루는 공간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는 사람의 활동이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시는 공동체의 상호 교감과 행위가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사이공 거리의 그것들은 도시 환경을 이루는 다양한 행위의 한 표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물의 금이 간 유리를 그마저 깨뜨리고 있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태거라고 부르는 것은 진짜 태거들의 명예를 해치는 것으로 여겨져 주저됩니다. 그들은 사이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잖아도 뜨겁고 버글거리는 이 도시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의미 없는 사이비 태거들의 낙서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습니다. 아니면 제대로 된 그래피티 작가, 태거의 등장이 언제나 일지 기다려 볼까요. /夢先生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