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독서여유산 讀書如遊山

스무 살, 처음으로 산과 한 몸이 되어 다닐때, 학교에 간 날보다 산에 간 날이 더 많았다. 산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고,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소함이 좋았다. 산에 들어가는 일이 반드시 그 산 정수리 밟고자 함은 아니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 산꼭대기에 올랐거나 말았거나 하루를 산과 놀다 들어온 뒤 내 방 낡은 책상에 낮에 같이 놀던 그 산을 생각하는 일이 좋았다. 산을 내 집에 풀어놓으면 나는 마치 오래 묵은 책을 펴 들고 이리 저리 넘겨보고 냄새 맡아보고 가슴에 안았다가 종이를 촤라락 거리는 기쁨처럼 새롭고 아득했다.

산의 깊은 골짜기를 건너고 구비구비 돌아가는 오솔길을 걸어간다. 그러다 날 선 능선을 만나 두려움과 아찔함도 느낀다. 마침내 오른 꼭대기에 털썩 주저앉아 세상을 지겨울 때까지 마음껏 내려다본다. 그렇게 산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내려선 뒤에는 올라가기 전과 내려온 다음의 나는 달라져 있다.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의 설계도가내 몸에 새겨진다. 지금 발 디디고 선 이 땅이 영 낯설고 새롭게 보인다. 활자와 활자를 건너는 동안 새로운 눈동자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읽어 내리는 책과 같이 그렇게 오르고 싶더랬다. 꼭 그와 같이 이제는 재가 되어 버린 오래된 책 속에는 거대한 콩나무의 발아력을 가진 씨앗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산처럼.

옛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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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如遊山, 독서는 산과 함께 노니는 것과 같다.

工力盡時元自下 힘쓴 뒤 원래 자리로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같고,

淺深得處摠由渠 천천히 그러나 얕고 깊은 곳을 모두 살펴봐야 함이 또한 같다.

 

조선의 대제학 퇴계가 유소백산록 遊小白山錄에서 ‘처음에 울적하게 막혔던 것이 나중에는 시원함을 얻는다’ 라고 한 것은 책 읽고 공부하는 과정을 산행의 과정에 빗대어 한 말이다. 이 시대에 퇴계가 살아나 이 말을 했더라면 대번에 꼰대 아재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테다. 산에 오르는 것이나 책을 씹어 삼키며 읽어 내리는 일은 당최 힘이 안들 수 없는 일이고, 유튜브 영상이 대세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이미지가 상상을 넘어서는 시대라 맨땅에 꼭 붙어 땀 흘리면 오르는 일과 이미지 없이 텍스트 저변을 이해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지가 오래다.

옛 사람이었던 할머니는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지 말고 차라리 테레비나 보고 들어 앉았그라 말씀하셨다. 산에 다녀오면 머리 위까지 뻗은 배낭에 늘 팔 다리는 피 칠갑을 하고 환하게 웃고 들어오는 어린 손자가 안쓰러웠을 텐데 그 말씀을 뒤로 하고 푸른 배낭을 들쳐 메고 주말마다 떠났으니 그때 부린 고집이 저 불룩한 배낭을 볼 때마다 생겨나 돌아가신 할머니를 겹치며 스스로 미워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테레비를 보라는 옛 사람과 지금의 사람이 뒤바뀌어 산에 다녔으나, 한 사물에 깊이 빠져들면 그만큼 앎에 이를 수 있다는 격물치지 格物致知의 진실을 믿었던 바, 그 꼭대기에 올라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내 미래를 눈썹 위에 손을 얹고 한참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산은 여과 없이 보여준다. 배가 고파 동료들을 곁에 두고 아귀처럼 먹을 것을 향해 달려 드는 나를 보여주고, 무거운 무게에 힘들어 하는 악우岳友를 생각하기보다 내 어깨 무게만 생각하는 나를 보여준다. 내 아픈 무릎이 이 세상 가장 극심한 고통이라 생각하고, 내 목마름은 다른 사람의 갈증보다 늘 위에 올려 놓는다. 내 살에 부딪치며 떨게 만드는 추위가 다른 사람의 동상에 눈을 감게 만들고 내 이마의 땀은 더위로 탈진해 스러지는 동료를 멀뚱멀뚱 쳐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산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말한다.

책을 읽고 앎에 다가가면 갈수록 나는 작아진다. 한없이 평범하고 약해 빠진 나를 각성한다. 무한의 세계에 유한으로 살고 있는 미물임을 자각하게 하고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를 압살한다. 죽은 현자들의 말은 된장찌개 한 그릇 끓여내지 못하고 기라성 같은 철학자의 사유는 내 아이 부러진 의자에 못질을 도와주지 않는다. 책에 있는 모든 텍스트는 사실 쓸모 없음의 보고가 아닌가 싶지만 이런 흰소리를 지껄이게 하는 것도 잡스러운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덜 배운 자의 각성이니 책은 과연 사람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산과 비슷하고 산은 이렇게 책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실, 산이고 책이고 억지로 이어 놓은 이런 상사성相似性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산에 지혜를 얻건 책에서 앎을 건져내건 사람은 태어났다면 다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안에 어떤 훌륭한 삶이란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훌륭해 보이는 삶은 또 누군가에겐 형편없는 삶일수도 있다. 우리에게 행복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하나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란 없다. 그러니 부디 나이 먹었다고 영리하고 지혜로운 척하지 말자.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지혜롭게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다 산다는 건, 사사로운 소확행 류의 자유를 반복하며 사는 삶은 분명 아닐 테다. 그것은 나 생긴 대로 사는 것이고, 생긴 대로 산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지 않게 되는 것일 텐데 우리에겐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게 차라리 형벌이다. 그러나 책에도 그렇듯 산에도 가끔 절벽이 있다. 삶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음에도 기꺼이 대자유를 택하는 자의 무대장치 없는 거친 삶에 언제나 경배를. 집 따까리에 재산 쏟아 붇지 말고 두 발로 공부하고 여행하는 삶에 쏟아 붓기를. 홀로 걷는 산에 나와 별빛 사이에 아무것도 없기를. 온전한 나를 나 스스로 견딜 수 있기를. 절벽을 만나면 뛰어라, 독서여유산 讀書如遊山.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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