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서구를 향한 한국문화의 얼굴 K-Pop

 

2012년 강남스타일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믿기 힘들어 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빌보드 챠트에 한국에서도 이단아 취급을 받던 싸이라는 가수가 2위에 오르고 그의 유튜브 신청 기록이 신기록을 깰 정도로 각광을 받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한국의 대중음악과 세계의 음악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야말로 일시적인 현상으로 스스로 진단하며 우리 노래의 세계시장 접근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조였을 뿐이다. 일단 미국에 얼굴을 내민 K-POP은 블랙핑크, BTS 등 한국의 선남선녀 가수팀으로 본진을 이루고 미국 시장을 교두부로 하는 세계시장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특히 BTS의 활약은 너무나 대단했다.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The Queen이 공연했던 전설의 웸블리 경기장을 3일 연속 가득 채우는 기록을 세우고, 그들의 콘서트가 벌어지는 곳곳마다 전 세계인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우리가 1990년대, 80년대 서양 팝 그룹들이 전세계를 휩쓸던 팬덤을 그대로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하기 시작한 것이다. K-Pop의 화려한 등장이다.

어떻게 K-pop은 이런 수준으로 성장했을까?
이번 스폐셜 리포트에서 K-pop의 세계적인 인기의 비밀을 알아봤다.

세계속의 K-Pop
세계 시장에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특히 K-pop의 약진은 수치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K팝 음반은 글로벌 음반 시장의 불황 속에서도 홀로 선전 중이다. IFPI(국제음반산업협회)에 따르면 2013~2019년 글로벌 음반 시장 규모가 연 평균 5.7%씩 감소했지만 K팝 음반의 판매량은 연평균 28%씩 성장했으며, 코로나19로 인하여 오프라인 공연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올 상반기에도 K-pop 음반 판매량은 전년대비 41.9% 상승했다. 세계적으로 한국 시장 자체의 크기로 9위를 기록할 정도로 국내시장의 기반도 괜찮은 편이다. 이러한 높은 성장이 동반되면서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대한 평가도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분출하는 한류를 새로운 문화의 흐름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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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콧대 높은 영국의 월간지 모노클(Monocle)은 “한국 음악과 영화, 드라마가 한국의 강력한 소프트파워가 됐다”고 했다. K컬처 산업이 영향력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평가다. 그러나 한국 콘텐츠 산업 규모는 598억달러(2018년 기준)로 글로벌 시장(2조3000억달러)의 2.6%에 불과하다. 미국 연예매체 더할리우드리포터는 “한국은 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새로운 힘”이라고, 모노클은 “한국이 엔터테인먼트 혁신에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획사의 하나인 하이브 사의 이타카 홀딩스 인수는 한 단계 더 올라선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글로벌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K컬처 산업의 경쟁력이 새로운 ‘혁신 모델’로 주목 받으면서 미국의 콧대 높은 엔터테인먼트 기업마저 한 수 접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K-pop이 어떠한 발자취를 걸어왔는지를 알아봤다.

K-Pop의 역사

  • 1990년대 이전
    이때의 한국음악은 60~70년대 경제가 성장하면서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현대적인 대중문화 산업의 본격적인 기지개를 피기 시작한다.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문화시설의 확충이 발생했고, 소득이 늘어나면서 음반판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도 당시 다른 3세계 국가들처럼 국제적인 슈퍼스타 영미팝의 영향이 여전히 지대하게 존재하였으나 이 시기 이후 대한민국에서 대중음악계는 팝송을 아류 작으로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서 인기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록 음악을 기반으로 하던 조용필을 선두로 송골매, 부활, 시나위, 들국화, 백두산 같은 밴드들이 대한민국 록 음악 장르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다만 조용필이나 들국화, 송골매가 록 위주이면서도 1970년대 선배 뮤지션들의 영향으로 포크나 여타 장르의 성격을 띄기도 하는 다양한 형식의 밴드 음악을 했다면,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부활, 시나위, 백두산은 신대철, 김태원, 김도균등 소위 3대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던 이들이 만든 밴드로, 영국의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하드 록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부활은 웅장한 밴드사운드와 발라드를 접목, 시나위나 백두산은 직접 헤비메탈을 연주하며 한국 록 음악의 장르 분화도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저호황으로 더욱 발전한 경제에 힘입어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서 나이키 신발을 구입해서 신고, 가수들의 음반을 구입하고, 공연을 보러 다니는 10대가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함으로써 이들을 겨냥한 상품이 쏟아지고 1980년대 후반 댄스 음악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고, 이렇게 생긴 초기의 팬 층이 향후 한류로까지 발전하는 K-POP의 토대가 된다.
  • 1990년대 K-pop 초기 황금기
    지금은 K-pop의 초기 황금기로 불리지만, 1990년대 초창기에는 지금의 베트남처럼 체계도 잡혀 있는 시장이 아니었고 음악가의 수도 소수였다. 그러나 1990년대 K-pop은 당시 경제발전과 더불어 사회가 민주화 과정을 밟아가면서 표현의 자유 확대와 더불어, 10대의 구매력이 확대 되면서 80년대 나이트클럽 DJ나 이태원 문나이트에서 댄스를 추던 많은 사람들이 제작자 및 작곡가 그리고 가수 등으로 뛰쳐나온 시기가 되었다. 당시 이른바 5대 작곡가로 불리던 김창환, 최준영, 주영훈, 윤일상, 김형석 중 김창환과 최준영이 대표적인 DJ 출신 작곡가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작한 유대영 역시 유명한 DJ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아이들을 이루던 양현석과 이주노는 유명한 댄서였고, 현진영과 와와도 유명한 댄서 출신 가수였다. 무엇보다도 현진영의 경우 현재 K-POP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이수만이 이끄는 SM의 1호 가수였다는 점에서 서서히 현재 K-POP의 원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전의 가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 데뷔했던 가수들은 대부분 이미 다른 분야에서 활동을 하거나 혹은 즉석으로 캐스팅 되어서 가수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은 기본적으로 연습생 시기를 거쳐서 소속사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서 데뷔한다. 즉, 준비된 사람들만이 데뷔를 한다는 점이다. 또한 활동 역시 회사의 전문적인 계획 아래 운영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앨범이 나오는 시기의 텀도 이전 가수들에 비해서는 굉장히 긴 편에 속했다. 그리고 팬클럽이라는 구조도 본격적으로 회사에서 관리하는 체제로 들어갔다. 즉 팬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고 이 체제는 2020년대를 지나는 현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K-POP의 가수 생산 체제이기도 하다. 또한 소속사 내에서 주요 작곡가가 있어서 이른바 소속사 스타일이라는 게 처음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트레이닝을 받고 등장한 대표적인 보이그룹으로는 H.O.T, 젝스키스, 신화, god가 있었고, 걸그룹으로는 1997~1998년 이후부터 등장하여 베이비복스, S.E.S., 핑클 등이었다. 이들을 이른바 1세대 아이돌이라 부른다. 이들은 199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누렸고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1990년대에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10~20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면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은 10대가 시장 전체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이런 현상은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1998년 한국영상음반협회(RIAK. 現 한국음반산업협회)측은 음반 시장에서 10대 취향(댄스, 랩, 힙합)이 차지하는 비율을 80% 이상으로 추정했다. 20대가 15%를 차지하고 나머지 연령층이 전체 5%를 가지고 나눠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10대의 음반시장은 2천8백24억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음악에서 아시아 한류의 초창기가 이때 시작된다. 클론(가수)은 대만에서도 큰 인기를 끌기도 했고 NRG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으며 대만의 배우, 인기가수 서회옥이 199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히트곡들을 많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류라는 단어의 기원을 보면 1997년경부터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국 TV드라마와 대중가요가 인기를 얻으며 한류가 발생했는데, 당시 대만에서 ‘하일한류(夏日韓流, 여름에 한국 바람이 불어옴)’, 중국에서 ‘일진한류(一陣韓流, 한국 문화 마니아들)’ 등의 표현이 국지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2000년대 케이팝, 일본의 주류음악이 되다
    2000년대는 해외진출부터 시작됐다고 평가하는 게 지배적이다. 2000년 2월 H.O.T가 베이징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중국의 한 신문이 “한류가 중국을 강타했다”라는 헤드라인을 뽑으면서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부터 일본 가요계로 진출하여 오리콘 차트를 제패하면서 대성공을 거둔 BoA는 한국의 K-POP이 일본 진출의 길을 열기 시작하는 초석이 되기도 했다.  2005년, 동방신기의 일본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물론 이땐 한류 4대 천왕 같은 배우에 대한 팬덤 층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지만, K-POP에 대해선 극소수의 마니아층만 있었지 팬덤이라 불릴 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동방신기 역시 보아처럼 맨땅에 헤딩하는 케이스로 진출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7년, 동방신기는 일본 정상급 아이돌 그룹으로 성공하게 되고, 뒤이어 BIG BANG 등도 진출하게 되면서, 일본 젊은 층 사이에선 K-POP 가수들이 일본 아이돌 그룹에 비해 댄스와 가창력, 외모가 뛰어나다는 인식과 함께 글로벌 최신 팝 트렌드를 인종문화적 친근감이 있는 한국 아이돌들이 소화해내면서 트렌디하다는 인식까지 합쳐져 신한류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다.
    걸그룹의 진출도 본격화되는데, 일단 카라가 현지화 전략이 통하면서 일본 활동을 성공적으로 시작했고, 뒤를 이어 소녀시대도 크게 히트하는 등, 이들이 진출한 2010년을 전후해 일본에선 본격적으로 K-POP 아이돌 그룹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이후의 걸그룹 러시도 눈에 띄었는데 f(x), 2NE1, 원더걸스, 티아라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의 파급 효과로 한국 음악 외 한국 음식, 패션, 화장품 등도 일본 여성들에게 각인되는 효과를 보였는데, 이면에는 유명 모델들의 블로그나 패션지에서 한국산 화장품을 소개해주는 것도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일본에서의 경험은 추후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특히 팬덤을 기반한 소비물품의 판매가 음식, 패션, 화장품 등으로 연결되어서 일본내에서 한국식 화장법이 일상적인 유행이 될 정도로 발전한 것 은, 나중에 서양권에서도 겪게 되는 K-pop열풍과 더불어 K-Beauty상품의 판매급증 현상의 연습으로 보아도 될 정도다. 아울러 소니 픽쳐스 및 덴츠 같은 홍보사와의 협업 같은 경험은 K-pop 업계 종사자들의 인맥 증가와 더불어 타국 진출의 경험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즉 K-Pop의 일본에서의 성공은 세계무대 진출의 연습장 역할을 했던 것이다.

  • 2010년대 아시아에서 세계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주류음악장르로 거듭난 케이팝은 2010년대부터는 한국과 문화접점이 적은 지역으로 진출이 활발해 진다. 처음에는 동아시아 다음으로 어느 정도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있는 동남아시아지역에 진출했지만. 2012년 까지는 주로 아시아권에서 활동하던 케이팝 가수들이 세계로 진출하게 되는 배경은 바로 강남스타일이다. ‘강남스타일’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아무래도 한류의 흐름을 완전하게 바꾸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강남스타일은 대단히 역사적인 곡으로, 2010년대 들어서 K팝이 아시아의 매니아 문화를 넘어서 구미권으로까지 진출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결정적으로 뚫어 놓은 곡이다. 2000년대까지는 소녀시대, 카라 등의 국내 아이돌의 주된 활동 무대는 어디까지나 국내였고, 가끔 일본이나 중국 등의 가까운 아시아로 공연을 가며 알음알음 팬층을 확보하는 정도였다. 가끔 국가적인 차원에서 밀어 주는 때도 있었으나 거진 실패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싸이 본인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전 세계적인 광풍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강남스타일 전과 후의 한류 붐은 그 양상이 완전히 달리지게 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뜬 경우 국내야 곡 자체로 평가 받으면 그만이지만 외국에서는 외국어(특히 영어)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통역을 쓸 수 있겠지만 이 경우 구미권에서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다), 싸이는 외국 유학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언론 매체 등에서 발표할 수 있었고 곡의 수명이 매우 길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없었다면 이후에도 한류는 일부 매니아 문화 정도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강남스타일이 북미권 및 전 세계에 K팝 문화 봇물을 터뜨리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대홍수를 위한 고속도로를 뚫었다는 점이고, 이후의 한류 콘텐츠의 유행(K팝, K드라마, K무비, K푸드, 더 나아가서 한국어 학습 열풍 등)은 이 고속도로를 타고 순탄히 물이 밀려들어온 형국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구미권에서는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기도 한다. 단순히 한국의 음악을 넘어서 한국 문화의 세계 진출 그 자체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강남스타일의 문화적 상징성은 그 어떤 한류 콘텐츠와도 비교할 수 없다.
    싸이의 뒤를 이어 등장한 BTS는 우리 국민들의 기대치를 훌쩍 넘어버렸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서구권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하더니 북미-유럽 등 전세계적으로 팬덤이 불어나면서 KPOP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싸이가 일회성으로 보여줬던 화제성을 넘어 BTS의 팬덤이 엄청난 수준으로 증가했으며, 각국의 주요 언론들도 이에 대해 보도를 쏟아내며 그들의 인기는 시너지 현상을 받으며 더욱 높아진다. BTS는 원 히트 원더였던 싸이와는 다르게 장기간에 걸쳐서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BLACKPINK, 엑소 등 서구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그룹들이 늘어나며 케이팝이 유명세를 타며 서구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해외에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치인이나 유명인에게 케이팝 들어봤냐는 등의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 2020년대 K-Pop 마이너 장르에서 세계음악의 주류가 되다
    특히 방탄소년단은 2020년 중반에 낸 신곡 Dynamite를 통해 21세기 최초로 빌보드 차트 HOT 100에서 1위를 한 아시아 아티스트이자, 비영어권 가수 최초 & 전세계 5번째로 Hot 100, Artist 100, Billboard 200차트 모두 1위를 석권한 아티스트가 되는등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10월 중순에는 빌보드 차트 핫100 1위, 2위를 동시 석권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을 세운 것은 역대 빌보드에 입성한 가수들 중에서도 비틀즈, 비지스, 아웃캐스트, 블랙 아이드 피스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걸그룹 BLACKPINK도 셀레나 고메즈, 카디비 등 미국의 인기 팝스타와의 콜라보가 성사되는 등, 아시아 바깥에서 입지를 점차 넓히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2021년부터 BTS의 소속사 HYBE는 블랙 아이드 피스와 저스틴 비버의 소속사 SB Projects를 한국의 산하 그룹으로 인수하게 될 정도로 K-pop과 K-Entertainment 산업은 세계주류를 노릴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K-pop은 어떻게 해서 세계 주류음악으로 떠오르게 되었나?
2020년대의 K-pop은 확실히 주류에 속하게 된 문화 컨텐츠가 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초반 서구권에서는 이것을 여성들의 매니악한 문화로 봤고, 또한 당시에 홍보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어서 2011년 경 SM 엔터테인먼트가 SM타운 파리 콘서트를 개최하며 ‘케이팝의 최고봉 SM’이라는 식의 언플을 엄청나게 했으나 사실은 무료티켓을 뿌리고 기자들을 전세기로 파리까지 데리고 가서 만들어낸 거품에 지나지 않았고, 실질적인 성적도 아예 없었다. 그러다 2017년부터 방탄소년단과 같은 보이밴드의 활약을 비롯해 후속 한국 그룹들의 빌보드 차트 진입 등 주류 시장에 진출할 여지가 많아졌다. 대표적인 예로 블랙핑크가 방탄소년단에 이어 K-POP 그룹 두 번째로 빌보드, UK 싱글, 앨범차트에 중상위권으로 이름에 올랐다. 과거 K-POP의 이미지는 일본의 ‘아니메’나 인도의 ‘발리우드’와 비슷했으나, 대중적으로 반응이 오는 노래들이 많아지면서 위의 두 개와 비교하기엔 대중성에 대한 파이가 꽤 커진 상황이다. 그러면 K-Pop의 어떠한 면이 서구 Z세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전문가 들은 4가지 요인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요인1. SNS를 잡아라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주목하는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혁신적 경쟁력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우선 철저히 SNS를 통한 디지털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꼽는다. 특히 일본과 비교한다면 일본의 문화전략이 인터넷 보다는 저장메체인 DVD나 CD판매를 통한 수익과 그리고 콘서트와 락페스티벌 참가를 통하여 주류문화계를 찌르는 방식으로 진출하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수익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면.

K컨텐츠는(영화, 드라마, 음악 포함)모두 기획 단계부터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홍보와 소비자(팬덤) 확대가 우선된다. 수익화 역시 인터넷 산업의 다양한 공짜 비즈니스 모델을 충실히 따른다. 4K급 초고화질 뮤직비디오도 음반 발매와 함께 인터넷상에 완전 무료로 공개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즉 95%는 공짜로 제공하면서 5%의 충성 고객으로부터 수익을 올리는 방식을 충실히 따른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의 디지털 콘텐츠 시장 규모는 미국·중국·일본·영국에 이은 세계 다섯째 규모로 성장했다.이것이 한국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실리콘밸리’라는 말까지 듣는 이유다.

요인2. 인적자원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K-pop의 또 다른 혁신 경쟁력은 인적자원의 다양성을 추구한다이다. K팝은 1990년대, 80년대 DJ로 활동하던 프로듀서와, 미국교포 및 한국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고 데뷔하던 이들로부터 인적자원의 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외국인 아티스트의 영입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2010년도에는 EXO와 2PM, 슈퍼주니어, 트와이스, 블랙핑크 등 주요 아이돌 그룹에서도 오디션을 통과하고 당당히 멤버가 된 외국인들이 많이 활동을 하면서 더 이상 뉴스에도 안 나오는 수준이다. 또한 노래를 부르는 스타뿐만이 아니라, 제작사 내에서도 인적자원의 다양한 것이 일반적이다 우선 SM엔터테인먼트는 1998년부터 해외 작곡가를 영입, 최근에는 400여 명 이상의 해외 작곡가를 관리하면서 매달 수백 곡의 샘플 곡을 받고 있고, YG엔터테인먼트의 핵심 프로듀서 테디는 미국 교포 출신이다.

요인3. 보편성을 추구한다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해외 진출에서 매우 중요하다, 각 나라마다 문화적인 요소가 조금을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사람이 먹고, 자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K-pop 아니, K-culture의 비즈니스 모델은 항상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 CJ ENM의 이선영 CP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흥행할 수 있는 코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등, 사전 기획 단계부터 해외 판권 판매를 목표로 철저히 준비한다”고 말할 정도다. 이러한 점은 일본과 중국 등 해외시장에서 현지 소비자의 이질감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하면서 동시에 문화가 이전에는 매우 달라서 진출하기가 어렵다는 서구권에서도 통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성과다. 전문가 k-pop의 이러한 진출전략을 “새로운 것을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이미 익숙한 것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이라고 평한다.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힙합과 R&B, EDM(전자 댄스 음악), 댄스 팝 등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여러 장르가 결합하면서 개 생산해서 전 세계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k-pop자체만의 특색이 적고, 한 음악 안에 미국과 유럽, 일본 팝(Pop)의 요소들이 모두 들어가 세계인이 호응할 수 있는 ‘보편성’을 구축한다는 점은 평론가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오히려 BTS와 블랙핑크 같은 아이돌들이 세계적으로 뻣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요인4. 극단적 효율성의 제작 문화
대중의 관심을 즉각 사로잡을 수 있는 콘텐츠를 저비용·고효율로 제작하는 방식이 뿌리내리며 형성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1990년대 이후 작은 한국 시장을 놓고 대형 방송사와 케이블 채널 등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인 영향이다. K팝의 제작 시스템도 다르지 않다. 아이돌 그룹의 경우 2000년대 초부터 SM과 DSP, JYP, YG 등 대형 기획사 간 경쟁이 고조되면서 외모와 노래뿐 아니라 완벽한 군무까지 요구하는 높은 잣대가 자리 잡았고, 4~5년간 훈련 과정이 일반화했다. 연예 기획사는 체계적인 인재 육성과 발굴을 통한 트레이닝 시스템의 ‘공정화’도 실천했다. 연습생들은 고난도의 트레이닝 속에서 지속적인 경쟁을 통해 극소수만 데뷔하는 데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비인간적이라는 비판도 있고, 극단적 효율화를 추구하는 표준화된 시스템을 통해 ‘팔릴 만한’ 콘텐츠와 스타를 양산해 내는 것이 개성은 없다는 비판도 많지만, 이것이 바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강력한 경쟁력으로도 인정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쟁력이 증명된 것이 바로 일본 소니뮤직이 JYP와 손잡고 만든 니쥬(NiziU)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 2019년 일본 순회 오디션으로 뽑은 연습생을 한국에서 훈련시켜 한국에서 제작한 노래로 지난해 10월 데뷔, 29일 만에 일본 최고 인기 가수만 나오는 NHK의 연말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까지 나가며 일본의 국민 아이돌로 등극했다.

케이팝은 주류가 될 수 있을까?
케이팝이 미국과 유럽 시장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K팝과 한국 드라마·영화를 10대와 이민자 그리고 소외된 자들의 문화로 폄하하는 분위기도 남아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문원 대중문화 칼럼니스트는 “지금은 잊힌 일본 영화와 스웨덴 팝이 각각 1950~1960년대,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했다, 즉 이때 이 나라의 문화가 유행한 것처럼, 2020년대 적어도 10년 간은 한국의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중문화가 더 세계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00년대부터 세계적인 어필을 읽어간 일본 같은 사례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일본 대중문화의 몰락이 일본 시장자체의 비대화로 인하여 더 이상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니까, 문화 컨텐츠의 보편성이 상실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영화건 케이팝이건 우리 대중문화의 힘은 보편성과, 작품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한국적인 것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적인 것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갈라파고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말을 잘 새겨 듣자. 그게 케이팝이 전세계로 더 뻗어나가, 이들의 미국 및 영국에서의 수상이 더 이상 뉴스가 아닌 일상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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