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몽선생의 서공잡기 베트남어판, 박지훈 작가

몽선생의 서공잡기 베트남어판, 박지훈 작가

건축가(건축학 박사), 작가,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정림건축 베트남법인의 법인장으로 청년연맹 산하 SAC의 파트너이며 씬짜오 베트남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물빛청년그룹과 아름다운 공동체, 행복의 집을 섬기고 있다.

베트남어로 Park tiên sinh sống giữa Sài Gòn이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몽선생의 서공잡기라는 책의 번역본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또 한국어 원본과 다른 점이 있나요?
‘몽선생의 서공잡기’(이하 ‘서공잡기’)는 2018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책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십년을 넘겼을 때 지난 시간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그간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방법으로 책을 통해 사이공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사이공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점들이나 신기하게 생각되었던 부분들에 대해 블로그에 올렸는데 이들을 정리해 발간했던 것입니다.
질문대로 ‘Park tiên sinh sống giữa Sài Gòn’(이하 ‘PSGS’)은 서공잡기의 베트남어 번역판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글을 거기서 옮겨왔으니까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다른 책이기도 합니다. 대상이 다르니까요. 서공잡기를 쓸 때는 한국사람들이 베트남에 대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기 바랬다는 목적이 있었다면 PSGS는 베트남사람들에게 그들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각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들 속에 어울려 사는 ‘박’이라는 한국인이 당신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집단 문화, 또는 사회의 모습들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어 하고요. 이를 통해 이방인인 우리를 주류인 베트남인들이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목적과 대상이 다르니 비록 많은 내용의 일치가 있다 하여도 아예 다른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도 생각됩니다.

Park tiên sinh sống giữa Sài Gòn이란 제목으로 바꾼 이유가 있나요?
‘몽선생의 서공잡기’라는 제목은 이 책의 취지와는 부합되지 않았어요. 새로운 제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이공에 살아요(Tôi sống ở Sàigòn)’라는 제목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몽선생이라는 별칭에 흥미를 느꼈던 듯해요. 하지만 몽선생의 의미를 베트남어로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았는지 어느 날 박띠엔신, 박선생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PSGS는 ‘박선생, 사이공에 살아요’ 또는 ‘사이공에 사는 박선생’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제목이 베트남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지느냐 하는 점이 궁금했어요. 결과적으로 박띠엔신이라는 표현에 대해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자기들에게는 잘 쓰지 않는 고리타분한 단어인데 그걸 외국인이 사용하는 거거든요. 우리로 치면 갓을 쓴 서양인을 대하는 느낌이라 할까요? 그래서인지 제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저를 박띠엔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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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어로 책이 발간된 후, 베트남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 책에 관한한 저는 외부인이에요. 최종 원고를 넘긴 것이 2020년 정월인데 바로 COVID-19 사태가 터졌어요. 출판일정에 대해서 알 수도 없었고 묻기에도 민망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2021년 10월 갑자기 발간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몇 일간지에 실린 기사도 보았고요. 저와 의논해 쓴 기사가 아니니 제 의사와 무관한 일들이었지만 거꾸로 베트남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보면서 이해를 하게 됐죠. 그 중 뚜오이쩨(Tuổi Trẻ) 인터넷판에 등록된 최초의 댓글을 아래에 소개하는 것으로 반응에 대한 답을 대신합니다.
“베트남에 대한 솔직하고 낙관적인 견해, 때로는 나의 이해가 외국인 저자에 비해 못 미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이공과 베트남을 많이 사랑해야 이런 독특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뚜오이쩨, 2021/11/10, Ngan)

베트남 분들이 가장 관심있어 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제가 베트남어 번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실력도 아니고요, 출판사에서 전해오거나 기사에 붙는 댓글 정도로 정황을 이해할 뿐이지요.
그런데 외국인이 함께 살면서 호의를 가진 눈으로 자기들의 생활과 사회를 뒤적여 보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갖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콘텐츠도 드물었던 것 같고요. 우리도 한국 사람이지만 외국사람이 한국의 문화나 관습 같은 걸 제대로 파악해서 말하면 신기할 때가 있지 않아요? 우리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이방인이 지적할 때 무릎을 치며 아, 우리가 그랬지 하는 것과 같죠. 그걸 편견의 눈초리와 폄하의 목소리가 아니라 애정과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비록 외국인이 쓴 글일지라도 공감대가 형성된다고 봅니다.
굳이 그들이 관심을 두는 점을 하나 꼽으라면 그림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에 나오는 카툰과 삽화는 모두 제가 그린 것인데 출판사도, 독자도 여기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제법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SOHA와 같은 베트남 인터넷 신문에서는 아예 제 그림을 메인처럼 다루어서 인터뷰기사를 올리기도 했지요.

베트남어 출판이 어려우셨을 꺼라 짐작합니다. 발간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기운 빠지는 답변이겠지만 사실 어렵지 않았어요. 실제로 제가 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저는 베트남에서 출판을 하리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게 가능한지도 몰랐고요. 그런데 모든 일은 우연 같은 계기로 시작되거든요. 한국말을 한국사람보다 더 잘 하시는 베트남대학 교수님께서 서공잡기를 읽으신 게 발단이었어요. 그 분이 저를 만나 베트남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으로 원고를 바꾸자고 제안하셨고 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 분 제안에 따라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일부는 추가하여 원고를 넘겨드린 일 밖에 없어요. 그 교수님께서 번역, 감수를 맡아 해주셨고 남부 1위 출판사인 NXBT의 부사장님과 자리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순식간에 기성작가 자격으로 계약을 맺고, 계약금으로 선인세를 받기까지 제가 한 일이라고는 서류에 서명한 일과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도 열심히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지켰던 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 책이 베트남에서 베트남어로 출판된 것의 첫 번째 공로는 그 교수님께 있는 것이지요. 그 분들이 왜 그렇게 열심으로 이 책이 나오는 일을 지원해 주셨느냐 묻는다면 제가 가진 소신이나 베트남을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하고 이를 밖으로 내놓을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마음을 모았기 때문임은 확실하겠지요. 물론 상업적인 가능성도 보았을 것이고요.

저번 칼럼에서 말씀하셨듯이 첫 저서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이번이 몇 번째인가요?
PSGS를 포함해 지금까지 다섯 권의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전의 네 권은 한국에서의 일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러 권의 책을 내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서공잡기 이후에 다른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COVID-19 때문이었죠. 무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였으니까 통제 받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구상해서 집필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제가 가지고 있던 콘텐츠를 다듬은 것이니까요.
동화인 ‘준하의 봄’은 아들을 위해 1997년에 썼던 짧은 동화를 POD 형식으로 출판한 거예요. ‘크룩스크리스티’도 10년 전에 써 둔 소설이었어요. 다듬지 않은 원고로 틀을 잡아 놓았었는데 내용을 더하고 앞뒤를 맞춰 책으로 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베트남, 체제전환국가에서의 도시개발’이라는 책은 박사과정 중에 논문을 위해 준비해 둔 자료가 많았는데 지도교수께서 일반인들을 위해 베트남 도시개발 입문서 같은 책을 냈으면 좋겠다고 한 제안을 미루고 미루다 그 때를 빌어 공저 형식으로 낸 책이에요. COVID-19가 출간의 일등공신이지요. 애쓴다 해도 일을 하기 어려웠던 2020년, 시간을 따로 낼 필요도 없이 기존에 써 두었던 원고의 정리에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제가 작가라고 불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이네요.

차기작도 구상 중에 있으신가요? 건축가로 현지법인의 책임자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작가가 되실 생각을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차기작의 질문에 대하여는 ‘예’이기도 하고 ‘아니요’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어요. 제가 가진 역량의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요. 그리고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지금은 ‘예’라고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명분도 없고 역량도 부족하니까요. 그렇다고 ‘예’가 아니라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정림건축이라는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설계전문기업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 회사가 베트남에 진출해서 정림베트남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지금까지 그 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원래 제 직은 건축가예요.
정림의 베트남법인은 말 그대로 바닥부터 성장한 회사입니다. 한국 본사의 DNA를 어떻게 베트남의 현지 풍토에 적합하게 결합하여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게 하느냐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10년 간 이 일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베트남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자격과 규모,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지요. 물론 토대를 만든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저희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림베트남은 올해로 제2기로 진입합니다. 현지에서 경쟁 가능한 조직을 일구어 냈기 때문에 이제부터 본사의 브랜드파워를 바탕으로 어떻게 동남아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설계/CM전문기업으로 포지셔닝 하느냐가 목표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요’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법인의 다음 걸음에 자신이 생기거나 지금은 해야 할 때라는 외부의 자극이 생긴다면 ‘예’라고 말할 겁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저도 알 수 없고요.
그런데 이런 대답은 무성의 해 보이니 질문을 살짝 고쳐서 답변해 볼 게요. 먼저 차기작으로 어떤 내용을 쓰고 싶느냐? 묻는다면 두 가지로 나눠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베트남 사회와 문화의 속성에 대해 한 걸음 더 깊게 들어가 보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진지하게 베트남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애정 어린 시각을 가지고요.
다른 하나는 한국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베트남을 알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정작 모르는 것이 많거든요. 이것을 제대로 살펴보는 시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신화, 언어체계 등과 베트남사람들의 실용성,개방성과의 연관성, 마을공동체 중심주의가 어떻게 아파트를 비롯한 주거형식의 발전 형태를 이끌 것인가와 같은 주제들에 대해 짚어보는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것들을통해 베트남을 바로 알게 하는데 일조하고 싶은 거죠.
두번째로 언제쯤 쓸 계획이냐? 한다면 글은 항상 메모하고 있으니 지금도 쓰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다만 내놓을 때가 문제인데 올해 1군 동커이의 책거리에서 작가와의 대화시간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에 대한 때를 감지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아까 외부의 자극이 있다면, 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런 경우가 자극에 해당되겠지요.
덧붙어서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제게 작가라는 과분한 호칭을 달아 주시고 저도 제 이력에 작가를 추가시켜두었지만 실상 작가적 소양과 통찰의 깊이는 가지지 못한 게사실이예요.그러니 작가라 할 때 좀 부끄럽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나 드릴 게요. 왜 글을 쓰세요?
질문에 무게가 있으니 다른 이야기로부터 풀어가야 할 듯합니다. 그건 제 삶의 방식과 연관되어 있어요.
제게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저는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고 싶다고 대답할 겁니다. 글을 쓰는 일은 영향력과 관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이 선언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이 제 정체성의 본질이고 가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세상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통로를 ‘은사(恩賜)’ 라고 합니다. 은사는 받은 것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이 각각의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죠. 거기에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돈 잘 버는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공부 잘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좋은 성품으로 교제를 잘할 수가 있는 것처럼요. 저도 은사가 있습니다. 삼십 대 중반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집중해 읽다가 이런 것들을 발견했지요. 또 때가 되면 어쨌든지 그것을 주인 앞에 내보여야 할 시기가 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달란트 비유라고 많이 알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저는 그 부분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 은사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참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놓아야 하는 거예요.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는 거지요. 제 삼십 대 후반과 사십 대의 모든 시기는 이 열매를 맺기 위해 토양을 일구고 거름을 주어 나무를 키우기 위한 훈련의 시기였습니다. 실패도 있었고 마음 아픈 사건들도 있었지만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은사를 찾고, 개발하고, 강화한 시간들이 현재의 저를 나타내는 거예요. 그 은사를 키우기 위해 건축가로 회사에 다니면서 다마스커스, 은사공방, 일하는 제자들의 객원기자, 큐티플래너 편집장, 팜피포털서비스, E 따뜻한 가족 프로젝트, 해비타트 휴머니티, 결손아동결연사업, 업무의 연장이었던 KOICA 원조평가 전문가 활동과 같은 일들에 이르기까지 참여하게 된 거예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죠. 이 일들은 다른 일들처럼 보이지만 모두 동일한 은사의 맥락에서 한 일들입니다. 글이나 그림은 이런 은사의 성과를 이루어가는 도구의 하나예요. 그러니 이것을 사용해서 지금껏 해 온 일과 같은 열매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씬짜오베트남에 기고하는 일도 마찬가지이고요.
혹시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까 하여 덧붙이자면 제가 말하는 열매나 그로 인한 선한 영향력이 어떤 무엇이 되기 위한 과정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유명인이 되거나 하는 거지요. 제게는 그런 희구가 없어요. 바꿔 말하면 제가 글을 쓰는 목적이 책을 내거나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작가라 불린다면 그건 글이라는 은사를 잘 가꾸어 성장시키는 중에 수고했다고 받는 선물 같은 것일 뿐, 본질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작가님은 베트남 청소년들에게도 여러 지원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를 돕는 일은 선한 영향력의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부터 여기서 얻는 소득을 어떻게 이 곳의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제가 잘나서 버는 게 아니니까요. 결과적으로 이 땅의 소산을 먹고 취하는 것이므로 조금이라도 나눠야 되는 거지요. 그 고민의 결론이 청년들에 대한 기여였습니다.
처음엔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오해도 받았고요. 그러다 청년연맹 산하의 SAC라는 조직을 만났고 지금까지 청년들을 후원하는 관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로 14년 째이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청년 후원이 열 일곱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제 든든한 가족입니다. 열매이지요.
후원은 장학금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관계의 형성이에요. 제 목표는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 스스로 같은 처지의 어린 학생들을 돕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서로 간에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물빛청년그룹이라고 부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닿을 때 저는 이런 부분의 이야기를 노출하고 말씀을 드려요. 자랑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저와 같은 방식의 후원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SAC에서는 이미 저희 사례를 하나의 성공적인 모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년, HTV의 특별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저희 사례가 소개되고 저 역시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끼칠 수 있는 기회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방식을 베트남사람들에게 소개해서 단지 돈으로만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장래에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후원의 방식을 전환시켜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외에도 사이공에서 한국인크리스천의 작은 모임이나 베트남 어린이들의 모임에도 관계가 되어 있어요. 모두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 성장, 시스템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분야의 프로예요. 원래 은사를 잘 개발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도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베트남 사회에서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늘에서 받을 상을 이 땅에서 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과제는 이 사례를 지혜롭게 공유해서 어떻게 함께 고민하고 성장시켜 시스템을 만들어 갈까 하는 것뿐입니다.

몽선생님께서는 저희 씬짜오의 주 칼럼리스트이시고, 지금 쓰는 칼럼도 많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만 계기가 있었나요?
호평을 받고 있나요? 잘 모르겠는데요? (웃음) 씬짜오 칼럼을 말씀하시니 시작했던 때의 인연을 다시 꺼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제가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 실질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 교민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씬짜오베트남이 제게 미친 영향은 컷죠.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흥미도 그랬고 길 이름이 영웅이나 사건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도 알게 해줬고요. 서공잡기를 썼을 때 그런 감사를 표시하고 싶어 한주필님께 책을 전했는데 덜커덕 칼럼니스트로 붙잡혀 버렸습니다. 애당초는 일년만 하겠다는 약속이었는데 어찌하다 메인 격인
짜오칼럼까지 넘겨 받게 되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자리이죠. 하지만 그 자리가 제 그릇도 아니고 제가 교민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미미하기 때문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은 공공성이 강조되기보다는 신변잡기적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멋있게(?) 탈출하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씬짜오베트남 편집진이나 한주필님도 서로 간에 미련 없이 감사하며 떠나보내 주지 않으실까 합니다. 거꾸로 묻고 싶네요. 인터뷰하시는 한기자님 생각은 어떠세요?

바쁜 일정 속에 이런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나의 활력소는 00이다! 라고 한다면?
제 경우에는 OO에 비전을 넣고 싶습니다. 나의 활력소는 나의 비전이다! 은사 얘기를 했죠? 은사는 비전의 통로이고 그 결과가 곧 열매, 다시 말해 선한 영향력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비전은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천은 크리스천이라는 제 정체성이고요. 그러니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거지요. 비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제 심장을 뛰게 하니까요.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열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꾸준해야 하고, 살펴야 하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요.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영향력의 결과를 얻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묵묵히 애써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는 제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일까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야 제 풀에 지쳐 쓰러지거나 실망하지 않게 돼요. 큰 그림 안에서 맞춰지는 조각그림으로서 내 일의 의미를 찾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가지 일 속에서도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호흡과 같은 것이니까요.

사실 본명이 따로 있으신데, 왜 예명을 몽선생으로 하셨는지요?
몽선생의 몽은 꿈 ‘몽(夢)’ 자예요. 꿈을 가진 사람이고 꿈에 대해 나누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필명은 아니었고 1997년 당시에 멀티플렉스라는 복합영화관을 설계기획하고 있었는데 당시 저와 함께 하던 공연기획자 분께서 함께 책을 내자고 하셨어요.
그때가 한국 영화시장에 멀티플렉스라는 개념이 들어온 초창기였으니까요.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몽선생이라는 예명 하나는 건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별명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질문하실 때 기대하셨던 것처럼 그다지 멋진 스토리는 없어요. 그리고 그때는 은사가 무언지도 잘 모르던 때였으니까요. 그냥 이름을 얻기 위해 분주히 살던 때였지요.

베트남에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저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모합선’입니다. 베트남에서 맺은 열매와 관계들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각각으로 있어도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그 가치의 힘과 능력이 증폭되도록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말하는 시너지 효과와 유사합니다만 그 보다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설명하는 하나의 몸과 여러 지체들이라는 개념이 보다 합당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청년들을 성장시키는 물빛청년그룹은 자체 내에서 순환되고 지속되는 섬김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 집단의 시스템 내에서 폐쇄적이지요. 이것을 제가 섬기는 어린이사역지인 행복의 집과 연결하는 거예요. 행복의 집도 그것 자체로 후원을 받고 생활을 영위하는 구조로 되어 있지만 둘을 연결하면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행복의 집 어린이들은 가족의 정에 그리운 아이들입니다. 이들과 이미 그같은 세월을 거친 청년들과 관계를 맺어준다면 일반적인 후원구조와는 다른 교감의 코드가 발생해요. 그 관계 속에서 어린이들은 형제가 된 청년들을 역할모델로 삼아 성장하고 청년들은 그들에게 멘토링하며 인도해주는 거예요. 상호간에 건강한 성장이 가능하도록 말이지요. 이런 것이 모합선 프로젝트가 만들어 가려고 하는 모습의 예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은사로 시작되어 만들어진 열매들을 확장시켜 다른 은사들과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를 사회적 관계의 망으로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베트남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저는 씨를 뿌리고 그림을 그리는 일로만 끝날지도 몰라요. 그래도 하는 거예요. 그것이 비전이고 은사이고 선한 영향력에 이르는 길이니까요. 참고로 ‘모합선’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구의 앞 음절들을 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과 항상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항상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곳에서 외국인입니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이 곳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하지만 잠시가 되건, 오랜 세월로 머물건 이 땅에서 베트남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 곳의 사람들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먼저 요구하는 것은 순서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마음은 닫아 놓고 한국과 비교하며 언성을 높이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보면 고혈압 외에는 남는 게 없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 곳에서 어울려 살아야 할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 화가 나고 답답해도 호흡을 고르고 편견 없이 바라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게 또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하게 되니 받아드리고, 받아 드릴만 하니 달라 보이고, 달리 보이니 애정이 가게 됩니다. 그래야 이 곳에서의 삶의 내용이 가치가 있게 될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곤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에는 그런 노력과 기대 속에 결국은 그렇게 되셔서 이국 땅일지라도 풍성한 삶을 누리셨으면 합니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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