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4,Wednesday

자충수 自充手

또 호찌민 행 저녁 비행기가 연발을 하는 모양이다.
보딩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게이트는 굳게 닫혀있고 직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인천에서 호찌민 가는 비행기는 매번 이렇게 늦는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안내 방송도 없다. 누구에게 얼마나 늦을 것이냐고 묻고 싶어도 직원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이제는 막 나가자는 거지? 그래 얼마나 늦나 보자. 벌써 출발 시각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게이트는 잠겨있고 가끔 목에 이름표를 단 친구들이 게이트 앞에서 신분증을 비추고 비밀번호를 눌러 게이트를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 할 뿐 아무도 늦은 사연에 대하여 안내방송은 커녕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출발시간이 한 10여 분 지나서 기장과 부기장으로 보이는 친구 둘이서 의기양양하게 들어간다. 아 저 친구들은 이미 출발이 늦는다고 통고를 받은 모양이구나. 그러니 저렇게 느긋하게 이제야 나타나지.

통상적으로 출발이 늦으면 체크인을 할 때 오늘 어느 정도 늦게 출발을 하니 양해해 달라는 안내도 하더구먼, 오늘은 아무리 서둘러도 30분 이상은 늦을 것 같은데 왜 미리 얘기를 안 해 주었을까? 아~ 이놈의 비행기 안 탈 수도 없고 매번 이렇게 늦는데, 탈때마다 이렇게 참을성을 새롭게 시험대에 올려놔야 하는가?
그리고 한 20여 분 지나니 그제야 승무원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한다. 아 이제 출발할 수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반갑기도 하지만 또 한편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뻔뻔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오는 승무원들이 미워 보인다.
이렇게 늦으면 좀 미안한 얼굴이라도 보이고 걸음이라도 빨리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게이트 앞에서 보딩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무도 불평을 하는 사람이 없다. 둘러보니 대부분 베트남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출발하여 이곳에서 잠시 내렸다가 다시 타는 승객인 모양이다. 그러니 이미 늦게 출발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는 탓이라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체념하고 창밖을 본다. 긴여름 햇살은 여전히 창문을 따갑게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 그래도 인천에서 출발하는 승질 급한 한국 사람들도 있을 건데 왜 이렇게 아무도 늦은 것에 대한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래, 아마 이제 한국사람들도 세월호 사건 덕분에 안전을 우선으로 하자는 생각이 깊어져서 좀 늦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정비를 마치고 가는 것이 좋다고 이미 마음으로 수락한 모양이구나싶다. 그래도 저들의 태도, 늦게야 등장하면서도 마치 관중들의 시선을 즐기는 주인공처럼 의기양양한 저 승무원들의 태도 말이다. 의례적으로 좀 늦을 뿐이야 하는 저 태도를 어떻게 고쳐 놓을 수 없을까? 하긴 저 승무원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비행기 늦장 출발이 뭐 저들이 늦게 와서 그런 것도 아닌데 저들을 탓할 수 는 없겠지 하면서도 슬슬 스며 오르는 울화가 자꾸 얼굴을 찡그리게 만든다.

불안한 나
욱하는 나
나도 내가 궁금해


안 되겠다. 이번에는 본사에 심각한 컴플레인 레터라도 써서 이렇게 일상화되어 버린 늦장 출발을 고쳐놔야겠다. 이것들이 아주 승객을 우습게 봐요.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 해.
출발 시각이 30분이 지나서야 천천히 게이트를 준비하는 안내 직원들을 뱀 눈으로 째려보며 응어리진 마음을 달래본다. 결국, 정확히 한 시간 늦게 출발하는 셈이다. 급기야 이제 보딩을 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그런데 역시 늦은 것에 대한 사과 멘트 한마디 없다. 억지로 누르고 있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도저히 그냥 묵과하고 넘길 일이 아니다 싶다.
잔뜩 화가 치밀어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딩 패스를 내밀고 좌석표를 받아 든다.

안내 직원에게 불평할 일은 아니니 혼자 눈 흘김을 하는 소심한 응징을 하고는 비행기 안으로 좌석을 찾아갔다. 좌석에 앉자 단정한 유니폼의 승무원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 반가운 미소에 화가 담긴 칼날을 꼽을 수는 없고, 그래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왜 이리 늦는 겨? 이 비행기는 왜 이렇게 매번 늦어? 한 번도 제시간에 출발하는 적이 없구먼. 통상 몇십 분 정도 늦더니만, 이제는 아예 한 시간이나 늦네. 글구 안내방송도 없고 말야. 이번에는 아예 본사에 빅 컴플레인을 할 작정이야. 매번 이렇게 늦을 거면 아예 시간을 늦게 조정하든가 하지 말이야. 이 비행기가 현지에 도착할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간인데 이렇게 늦으면 기다리는 사람도 불편하고…”

승무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한 시간 동안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며 화를 삼킨 울분을 풀어놓고 있는데 마침 옆자리의 지인이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듣다가 한마디 던진다.

“아 오늘은 제시간에 출발인데요. 아마 시간은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내가 시간을 잘못 봤다고?
아뿔싸, 이건 뭐가 잘못되었구나. 순간 얼굴에 긴장감이 오른다.
그때서야 시계를 들여다보니 7시가 맞다. 출발 시각 10여 분 전이다. 승무원과 케빈 매니저가 불평을 늘어놓는 내 말을 참을성있게 들으며 의아해하던 표정에 실소가 핀다.
아 ~ 뭐야, 그럼 내가 혼자서 난리를 치고 씩씩거린 거야?
아니 왜?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가 출발 시각인 7시 10분에 못 미치고 있건만 왜 내가 한 시간이나 일찍 게이트에 와서 출발이 늦는다고 혼자서 공연히 붉으락푸르락 한 것인가?
그러고 보니 게이트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고객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걸어오던 승무원들, 늦은 출발에 대한 안내 멘트가 없는 일 등 모든 의문이 풀린다.
그건 그렇고, 이 망신을 어찌하나. 거참, 일단 승무원과 케빈 매니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다. 미안해요. 내가 정신이 없네.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생사람을 잡다니. 미안해요. 매번 조금씩 늦어 버릇이 되어 오늘도 늦는구나 하고, 화가 쌓인 게 그만 엉뚱하게 이런 실수로 나타난 것 같다며 안 해야 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승무원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며 위로의 미소로 사과를 받아 주지만 내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서 식을 줄을 모른다.

뭐야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왜 시간을 한 시간이나 빠르게 보고 있었지? 손목에 찬 시계는 정확히 제시간을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 치매가 올 나이는 아닌데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런 실수를 해서 자기 도끼로 자기 발을 찍나 그래.
정리가 안 돼서 계속 혼자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옆자리 지인이 위로한다. “그럴 수도 있지요. 뭐, 시간을 잘못 본 건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나처럼 불평을 늘어놓은 다음에 깨닫지는 않겠지.

바둑에서 자충수를 둘 때처럼 자신의 멍청함을 깨닫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둑판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칠뜨기같은 자충수를 두고 한술 더 떠서 자충수인 줄도 모르고 남 탓을 한 것이다. 참으로 멍청한 일이다.
자충수를 둘 때는 어떻게 해? 그래 다 털어놓고 포기를 하고 빨리 다른 곳으로 시야를 돌리는 거다. 죽은 돌을 자꾸 들여다보고 아까워하고 자책을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는일이다. 언젠가, 어디서인가 이 자충수를 충당할만한 꺼리가 나타날 것이야.

객쩍은 미소로 스스로 위로하며 옆자리 지인과 대화를 나누지만, 거참, 털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아~~비행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작성자 : 한 영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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