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몽선생( 夢先生)의 짜오칼럼-친구‘親舊’

 

얼마 전 저녁식사를 겸한 모임 자리가 있었습니다. 드물게 식당이 아닌 집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멋진 분위기였습니다. 짧아 아쉬운 피아노 연주도 들었습니다.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르게 병은 비고 웃음으로 빈 공간을 채워 가며 잔의 수를 늘려갔습니다. 업무로도 고향으로도 아무런 접촉점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년배도 아닙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찾을만한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 모임을 나가면 문제가 벌어지곤 합니다. 젠 체하기 좋아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제가 유독 그 모임에서는 실수다 싶을 정도로 먼저 흥에 취해 버립니다. 아무리 단단히 무장을 해도 금새 해제되어 실없는 소리를 연신 웃음에 달고 쏟아내게 됩니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시는 음료에 무얼 타는 것도 아니고 자리에 오미크론 같이 전염성 강한 무얼 뿌려둔 것도 아닐 텐데요. 그러다가 문득 ‘친구’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친구’는 한자어로 ‘親舊’라 씁니다. 한자 그대로 보면 오래되다 는 뜻을 품으니 세월을 담보로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는 대부분 오랜 시간을 통해 함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같은 추억을 나눈 사람들의 관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親’에 ‘親’을 더한 ‘친’한 ‘친’구란 표현에는 고향에서 어린시절 천둥 벌거숭이로 자랐던 이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하며 인생 고민과 개똥 철학과 저잣거리 상소리를 나누었던 사람들 사이에 설익은 생각과 모자란 경험치를 열정으로 꾹꾹 채워 살았던 시절이 담겨 있습니다. 우정도 사랑도 설익었지만 그만큼 상큼하고 진지했고 순수했던 시간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시간이 멈춥니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도 이름을 부릅니다. 별명이 터져 나옵니다.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근엄하신 회장님도 그저 배불뚝이일 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친구들이 더욱 그립지만 고향은 바다 건너 멀고, 비행기만 타면 갈 수 있는 거리 라지만 막상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일을 당해보니 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행복한 일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개념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적 코흘리개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흩어지고 그 중에 일부는 베트남이든 아니면 더 먼 나라로 떠나가 살고 있으니 어릴 적부터 함께 하고 청년의 때를 같이 보낸 기억을 공유했다고 해서 친구라 한다면 아마도 지금 시대에 친구를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에 나와 타향에서 맺은 관계 속에서 새로이 친구 그룹이 형성되곤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친구가 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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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반백을 꺾어 살고 보면 나이라는 것이 부질없는 숫자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나이가 많아도 청춘 같을 수 있음을 항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는데 나이가 제한 요소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출생연도를 따지고 학번을 맞춰보며 위아래를 정하는 것은 그거 아니면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서열놀이에 불과합니다.

우리 옛 말에도 다섯 살 차이는 친구처럼, 열 살 차이는 형제처럼 지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조들 가운데 친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오성(鰲城)과 한음(漢陰)도 실제로는 5살 차이가 났다 합니다. 잘 아시는 정도전과 정몽주도 다섯 살 차이였습니다. 이 경우는 나중에 사생결단을 낸 적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영화의 친구와 이미지가 맞아 보입니다. 그 중 제가 아는 가장 심한사례는 권율과 이항복입니다. 둘 사이는 장인과 사위인데 평생을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하지요. 나이가 열 아홉 차이가 납니다. 친구 사이도 다섯 살 아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오성이 바로 이항복이었으니 그럴까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좀 심해 보이지요.

우리나라가 유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으로 해서나이 차가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현대사회에 들어서 오히려 더 엄격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표현 때문에 유교적 질서가 나이로 지켜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해입니다. 이는 사회적 질서를 위해 예의를 갖춘다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르지무조건 어른의 말은 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이런 서열 문화가 군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끼리는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인식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잘못된 인식입니다. ‘망년지교(忘年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사귐에 있어 나이가 문제될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날 저녁의 모임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이 조차도 문제 되지 않는, 그래서 더욱 세상적인 품위나 이해관계의 득실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들, 그럼에도 대화의 오고 감에 운이 맞아 떨어지고 말의 섞임이 흥을 돋워 절로 즐겁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막걸리 한 잔에, 포도주 세 잔에도 쉽사리 취해 버립니다. 계산이 따르지 않으니까요. 쉽게 취하니 뒷말이 나올 듯하지만 흉허물이 없으니 걱정 또한 없습니다. 그러니 이 관계가 더욱 새삼스럽게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즐거이 추태(?)를 부렸으니 다음 연락이 오면 또 기쁜 마음으로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친구의 정의를 바꾸어야 할 듯합니다. 베트남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전 세계에서 맺은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흉이 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에서 얻은 새로운 친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親舊’가 아니라, 친할 ‘친(親)’자에 입 ‘구(口)’자를 쓴 ‘親口’로 바꿔 쓰려고 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며 흉허물 없이 말하고 즐거워하는 사이이니까요. 그래도 서로의 덕을 위해 과한 건 피해야 하겠지요. /夢先生

혹시나 하여 찾아보니 ‘親口’라는 한자어가 실제로 있더군요. 가톨릭 용어라 하는데 ‘숭경의 대상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거나. 평화와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입을 맞추는 일’(옥스포드 랭귀지 한국어사전) 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혹시 가톨릭 신자 분이시라면 제가 새로 풀어 쓴 친구의 한자 의미에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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