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November 30,Monday

전쟁을 통해 배우는 베트남의 역사 제 11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대불항쟁1945~1954년

1946년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일제의 봉기로 프랑스 식민군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이번 호에는 딩빙푸 전투로 베트남군의 저력과 힘을 만방에 알리며 프랑스군을 몰아내기까지 10여년강의 대불 할쟁과정을 살펴본다.

19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지배아래 있던 베트남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의 비시정부 아래 식민정권을 유지하다 일본군의 진주로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바오다이가 명목상의 국가원수, 즉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되어 있었다. 한편 1941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한 호찌민은 30년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베트남 독립동맹’(비엣민; Việt Minh)을 결성하고 유격대를 조직, 일본과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한다. 비엣민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변변한 개인화기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식민지 조국을 당당한 독립국가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용사들이었다.

시대적 배경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연합국은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해 북쪽은 장개석정부의 중국군이, 남쪽은 영국군이 주둔하도록 합의한다. 당시 베트남독립연맹은 중국군이 진주하기 전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안남의 윙조(阮朝)를 전복시키고 베트남전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8월혁명’(Cách Mạng Tháng Tám)이었다. 아울러 호찌민은 그 여세를 몰아 1945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 하지만 당시 북쪽에 진주한 중국군은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고, 프랑스는 끌레르 장군의 지휘 아래 육군 5만명을 남부에 파병해 북부로 진군한다. 이 상황에서 호찌민은 먼저 중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정부와 협상을 시도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승인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전쟁 발발
한편 1946년 1월 베트남 전역에서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호찌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랑스는 국민투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2만 명을 상한선으로 못 박았던 합의를 무시하고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병력을 15만 명으로 대폭 확충한다.이처럼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그해 11월 23일, 북부의 항구 하이퐁 만에 입항하는 선박에 부과하는 관세에 관한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양국간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군은 하이퐁에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더군다나 12월 19일 대통령 관저를 포위한 프랑스군이 호찌민(Hồ Chí Minh) 대통령과 보윙얍(Võ Nguyên Giáp)장군을 체포하려하자, 비엣민이 일제히 봉기한다.

전쟁 초기 게릴라전
전쟁의 초반 거의 맨손이나 다름없었던 비엣민은 도시지역에서 쫓겨나 게릴라전을 벌인다. 1947년 2월 후에가 함락된 후에도 프랑스의 무조건 항복요구를 거부하고 산악지대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이어간다. 그 결과 마침내 1947년 가을 비엣밧 지역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비엣민 군은 이듬해부터는 반격으로 전환하고 식민지배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반격을 시작한다. 이에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다. 한편 이 사이에 프랑스는 바오다이 왕을 복위시켜 1949년 6월, 남부 사이공에 친프랑스 괴뢰정부를 수립한다.

총 반격!
1949년 10월 중국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북경측의 군사적 지원이 가능해 지자 하노이 정부측은 1950년 1월 총반격에 나섰다. 그 결과 프랑스 지배 하의 홍강 삼각주의 상당 부분은 호찌민 정부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1950년 12월까지는 통킹지방의 북부 산악지역이 거의 완전히 장악되었다.(프랑스군 전사자 1만 6천 명) 한편 1951년 2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전국대회에서 비엣민은 제국주의 타도, 독립과 통일의 완수를 외치며 사기가 고조된 것에 반해 프랑스의 살랑 장군은 1952년 10월, 3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홍강삼각주에 투입하고서도 병력부족과 보급의 난조로 베트남정부군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어 1953년 7월에는 나바르 장군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이미 프랑스군은 병력이 크게 모자란 데다 정보면에서도 호찌민군이 프랑스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크게 열세에 있었다.


전쟁의 하이라이트 딩빙푸(Điện Biên Phủ) 전투
당시 얍 장군은 라오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라오스를 이용해 중부 베트남을 우회하여 코친차이나의 비엣민 게릴라 부대와 힘을 합쳐 사이공의 바오다이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것 이었다.

November. 1953

딩빙푸, 운명의 결전지
당시 1만 1천 명의 프랑스군은 베트남 서북부 산간지역인 딩빙푸에 주둔지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요새는 너무나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비행기로만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바르 장군은 프랑스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을 통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며 자만에 빠져 있었다.

March. 1954

비엣민, 식민군 포위
초기에는 장비의 열악함으로 인해 베트남 독립군의 희생이 컸지만, 전투가 장기화될수록, 독립군은 프랑스 식민군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얍 장군의 군대는 보병사단 4개, 기갑사단 1개로 총병력은 5만에 달했다. 게다가 우거진 밀림과 산악지형을 통한 은폐를 통하여 호찌민 정부군은 프랑스군에게 발각되거나 저지 당하지 않고 포위를 완수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몇몇 언덕에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비엣민 군은 다섯 갈래로 나뉘어 동쪽과 북쪽을 포위했다. 그곳에서 비엣민 군은 프랑스군의 진지를 훤히 들여다보며 효과적인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July. 1954

무조건 항복
2개월에 걸친 치열한 격전 끝에 5월 7일 프랑스 식민군은 장비가 열악한 베트남 독립군이 패주하자, 그만 방심해 딩빙푸에 들어섰고, 순식간에 전군대가 포위되면서 수많은 프랑스 식민군이 항복하고 만다.

딩빙푸에서의 승리는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종식시켰다. 즉, 이 전투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대인도차이나 정책은 철수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반공을 명분으로 남베트남에 개입한 미국은 1955년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정권을 탄생시켰고, 그 결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 베트남이 다시 통일되는 데는 이후 20년의 시간과 수백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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