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4,Wednesday

고전에서 길어오린 ‘깊은 인생’ – 어쩌면 지금 여기인지 모른다

 

 

아테네에 들어와 살기 전에 그는 시노페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는 바다에서 나포되어 아테네로 끌려와 노예로 팔려졌다. 노예 시장의 경매대에 올려졌을 때 그는 군중 속에서 세니아데스라는 사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세니아데스를 가리키며,

‘나를 저 사람에게 팔아라. 저 사람은 스승이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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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예 판매상에게 말했다. 이야기가 되려 했는지 세니아데스는 감히 주인을 선택한 이 이상한 사람을 그의 노예로 샀다. 노예로 살면서 그는 세니아데스의 아들들을 가르쳤고, 가족의 일원으로 존중받았다. 그의 말 대로 주인의 스승이 된 노예가 된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경멸했으나 또한 존경했다. 아무도 그의 웅변을 당할 자가 없었다.

그의 이름은 디오게네스다. 정확히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다.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방귀를 뀌고 똥을 누고 오줌을 갈겨 대고, 대로에서 자위행위를 한 사람. 명성을 경멸하고 건축물에 대하여 입을 삐쭉대고 날고기와 생야채를 먹고 태양아래 누워 창녀들과 시시덕거리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자기 앞에서 꺼지라고 말한 바로 그 사람. 그는 디오게네스다. 견유주의犬儒主義의 첫 계보로 통한다.

견유주의 직역하면 개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With a dog이 아니라 like a dog이겠다) 그는 우리의 탐욕과 욕망을 질타하고, 무소유를 통해 끝없는 야망의 족쇄와 사슬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라고 온 몸으로 주장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와 플라톤이 만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둔 적이 있다.

플라톤은 저녁 식사에 친구 몇 명을 초대했다. 연회장에는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침상이 놓여있었다. 디오게네스가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침상 위로 뛰어올라가 발로 쿵쿵 밟으며 외쳤다.

“내가 플라톤의 자존심을 짓뭉개고 있노라”  그러자 플라톤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의 자존심이 훨씬 더 크니 당연하지요”

자연의 삶을 따르는 노자가 공자의 인공적인 인의를 비웃듯이,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비웃었다. 쓸데없는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길들이기와 사육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인데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늑대를 개로 만들고, 인간 자체를 인간에게 최선의 가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계몽이냐고 따져 물었던 역사적 첫 사람이었다. 혹자는 니체를 견유주의자라고도 했고 실제 니체는 ‘나는 디오게네스를 좋아한다’ 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을 가축으로 만들어 가는 인간들의 ‘문명’을 거부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낫질하는 속도 보다 더 빨리 자라는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소진되는 직장인들, 명령 대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가로등의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고, 또 불을 끄는 일을 하다’ 죽는 삶이 인생이냐고 묻는 것이다.

플라톤과 디오게네스는 동시대 아테네에 살았던 인물로 플라톤은 디오게네스에게 일종의 자존의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그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플라톤이 어느 날 길 거리의 더러운 물로 샐러드를 씻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말했다.

“만약 디오게네스 당신이 당신의 사유를 왕과 나누었다면 아마 지금 당신은 그 샐러드를 스스로 씻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에게 대답한다.
“자신의 샐러드를 자기가 씻을 수 있다면 권력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울그락 불그락 해진 플라톤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의 샐러드를 자기가 씻을 수 있다면 권력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다. 디오게네스, 그의 가치는 세상 범부의 가치들과는 달랐다. 남들이 버리는 것들이 자신에겐 소중했고 남들이 가지려 악다구니를 쓰는 것들에는 귀한 것이 없었다.
오늘날 견유주의자들의 미덕, ‘소중한 것은 소중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이렇게 생겨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상에도 어느 순간 유머, 웃음, 여유 같은 가치들이 사라진 것 같다. 어제 잠자리 들기 전 아이의 표정, 오늘 함께 밥을 먹었던 아내의 눈빛이 기억나는가? 비싼 장난감과 고가의 핸드폰이 어린 아이들 손에 들려져 있는 건 그들과 나눌 소중한 일상을 소중하지 않은 핸드폰과 맞바꾼 건 아닌가?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없지만 돈 때문에 자유를 팔 수는 있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장 드 라 퐁텐’ Jean de la Fontaine의 호통이 뼈아프다. 아마 그도 견유주의자였던 모양이다.

‘개가 나에게 말했다. 넌 그럼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달려 갈 수가 없단 말인가?’

오늘 낮, 호찌민에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빠르게 지나는 오토바이 사이로 여유롭게 천천히 걸어가는 우리들의 견유주의자를 본다. 그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와 같을 테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 붓는 날 한 사람이 천천히 빗속을 걷고 있었다. 뛰어가던 사람들이 돌아보며 외쳤다. 왜 뛰지 않소? 걸어가던 사람이 대답했다. 앞에도 비가 오고 있지 않소.”

우리가 돌진하고 있는 목적지는 어쩌면 지금 여기인지 모른다. 디오게네스는 기원전 5세기부터 끊임없이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설계도를 손에 쥐고도 해독할 줄 모르는, 아주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스마트한 까막눈들을 혀를 차며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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