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May 26,Thursday

몽선생( 夢先生)의 짜오칼럼- 나의 아버지, 아들의 아버지

 

 

오래전 아들과 함께 대학로의 소극장을 찾았습니다. 당시에 제법 입소문을 탔던 뮤지컬이었고 내용도 좋았던 터라 아이와 함께 보기로 했던 것이죠. 시간이 꽤 지나 극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아들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습니다.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아들의 무게가 전해졌습니다. 작은 덩치가, 조그마한 머리가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고 가슴을 밀고 내 안의 깊은 어딘가를 지긋이 눌러왔습니다. 눌려 우묵 해진 자리에서 생각이 흘러나왔습니다.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그가 아이를 갖고 아이와 더불어 어딘가를 찾아 함께 했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를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요? 두터운 추억의 더미로 덮인 책장을 넘기 듯 상념에 빠질까요? 혹은 아무 기억의 자취도 남기지 못한 채 바람처럼 잊혀질까요? 그해 아들은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대부분의 아들들은 머리와 몸이 한참 자라갈 때 아버지와 마찰을 빚기 마련입니다. 부자지간이 아니라 남성 대 남성으로 여겨지는 첫 고비입니다. 그 언덕을 넘고 나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집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요. 이런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풀어 보기 위해 찾은 단어가 ‘자비’였습니다.
부모의 은혜라면 당장 ‘효(孝)’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부모의 은혜를 표현하는 용어의 출발은 본시
‘자비(慈悲)’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승본생심지관경 (大乘本生心地觀經)』에 따르면 “아버지가 베푸신 은혜가 높아 태산과 같고, 어머니가 베푸신 은혜가 깊어 바닷속과 같다. 그러한 아버지의 은혜를 ‘자은(慈恩)’이라 하고 어머니의 은혜를 ‘비은(悲恩)’이라 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에서 자’를, 어머니의 은혜에서
‘비’를 따서 ‘자비’라는 말이 생겼으므로 이것이 부모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자(慈)’는 ‘마이트리(maitri)’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왔습니다. 마이트리는 ‘미트라(mitra)’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인데 고대 인도-이란어족의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신은 계약과 맹세의 신이기도 한데 그 이름이 ‘서약’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여기에는 친구 곧 우정(友)의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계약과 친구의 관계를 곰곰 생각해보면 이해가 갑니다. 계약은 성실과 신의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고 우정 또한 성실과 신의를 바탕으로 돈독해지는 것일 테니까요. 이로써 ‘자’를 모든 인간에 대한 최고의 우정을 갖는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마찰을 빚는 것은 대개 기대 때문입니다. 또 자기가 거쳐온 수많은 날들의 난관과 좌절을 부디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끝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하는 일마다 마음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걱정스러워서 입니다. 그럼에도 서로 부딪치는 이유는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어서 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키는 ‘자’에 해결의 실마리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어머니의 그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자’가 의미하듯 우정이 됨으로써 완성됩니다. 그것도 최고의 우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우정은 신뢰라는 이름의 기초로 받쳐져야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자비’의 남은 한 글자 ‘비(悲)’의 원어는 ‘카루나(karuna)’입니다. ‘친절, 동정, 연민’을 뜻하는 동시에 ‘신음’이라는 깊은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인생은 고해(苦海)다 했는데 말 그대로 인생이란 고통의 신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바다입니다. 이런 세계에도 위로가 있습니다. 고통을 받아 본 사람은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고통받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으로 신음을 내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내는 신음이 얼마나 깊은 누름에서 새어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눌 수 있습니다. 고통을 나눈다고 그것이 반이 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진실한 위로는 그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어주는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이와 같이 표현됩니다. 같이 아파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비란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최고의 우정이며 고통을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타인은 우리의 자녀이고 또한 우리의 부모입니다.
아들은 미류나무처럼 자라는 절정의 시기를 분주히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자라면 바람도 많은 법입니다. 내가 그 시절에 그러했듯 불만족과 갈등의 바람 속에서 좌충우돌 흔들리고 있겠지요. 자라가는 아들과 달리 그 아들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느리게 보내고 있습니다. 귀는 더 이상 맑게 들리지 않아 중년이 된 아들의 전화 목소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눈도 더 이상 밝지 않아 메시지를 보기도 수월치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매일같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지난 모든 영욕의 세월로 인해 감사함을 고백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는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아버지 된 그에게 드릴 수 있을까요?

아들이 베트남에 돌아옵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부로 한국도 베트남도 아닌 나라에 머물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보지 못한 시간이 3년을 넘었는데 이제라도 보게 되니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습니다.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될 시간이 기다려 집니다. 그는 또 얼마나 마음과 생각이 자라 있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을 항상 어리게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내가 보는 세계의 범위를 훌쩍 넘어 저만치 가고 있을 것입니다. 작은 줄만 알았던 그의 세계는 미류나무의 높이만큼 되어 그의 아버지, 어린 날의 우상의 왜소해진 어깨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내어줄 어깨가 없고 그에게도 더 이상 기댈 어깨가 없음에 슬퍼할 지도요. 하지만 그럼으로 말미암아 서로는 각자의 인격으로 이해되고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정이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인생 여정을 있는 그대로 안아 주기를 바랍니다. 자비의 의미를 이해하며 내가 나의 아버지를 그렇게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듯이 나의 아들도 나이가 더해 갈수록 그의 아버지를 그렇게 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나의 아들 된 이와 나의 아버지 된 이에게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5월입니다. 습기를 머금은 우기의 바람이 촉촉하게 스며듭니다.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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