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7,Saturday

몽선생( 夢先生)의 짜오칼럼- 음식기행

 

 

 

‘기행(紀行)’이란 여행 중에 보거나 들은 것들, 체험하면서 느낀 것들을 적은 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행, 기행문, 여행기, 여행문학은 모두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간혹 글이나 TV와 같은 매체에서 문학기행, 역사기행, 생태기행 등과 같은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기행을 여행 중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 아닌 여행 자체로 표현했다면 이는 잘못된 용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기행=여행’이 아니고 ‘기행=여행문(글)’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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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재미없는 얘기로 시작하느냐 하면 이 칼럼의 제목을 ‘음식기행’으로 잡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려면 음식 또는 음식점들을 찾아 다니며 눈으로 보고, 맛으로 느낀 것을 적은 글이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내용으로는 음식 여행이라는 뜻에 더 부합되기에 기행이라는 표현을 달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그럼 왜 이런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낌 상’ 기행이 더 다가와 틀린 줄 알고도 제목을 그리 잡았으니 책망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입니다.

베트남에 살면서 할 만한 일은 제한적입니다. 오토바이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교민들이라면 더욱 활동범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인근에 산이 없으니 등산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강과 수로가 지천이어도 물에서 할 수 있는 일 또한 별로 없습니다. 평지라 해도 걸을 만한 보도가 없으니 걷는 일도 고역입니다. 걸을 거리가 있다해도 너무 덥습니다. 위험하기도 합니다. 넋 놓고 다니다 내 손 안의 폰이 순식간에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경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한계입니다. ‘씬짜오’와 ‘깜언’ 정도를 말하는 수준으로 거리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커버하기 어렵습니다. 교민들의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이 그 중 나은 선택지입니다만 그것도 취향이 맞아야 합니다. 이럴 때 고려해 볼 만한 것이 음식기행입니다. 먹는 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 먹는 것을 취향으로 삼는다고 말하려면 어딘지 거시기합니다. 일단 돈이 들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특별히 호찌민시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먹는 일이 단지 비어있는 위장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를 들여다보고 문화를 이해하고 사람을 겪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품위 있는 취향으로서 만이 아니라 음식기행 중에 겪는 에피소드 역시 이 취향의 즐거움을 더합니다.

베트남에 진출하고 초창기에 가장 열심히 한 것이 음식기행이었습니다. 본사의 방문객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현지의 이해를 위해서도 역시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음식을 소개하는 매체가 많지 않았기에 일본 여행사의 잡지를 뒤지고, 로컬 친구들의 소개를 받아가며 찾던 맛집 순례였으니 그리 순탄하다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이공을 바닥부터 알아보리라 호기롭게 중고오토바이를 끌고 거리를 헤매 다니다 배가 고파 멈췄던 4군 벤응에(Bến Nghé) 천(川) 근처의 러우(lẩu)집을 기억합니다. 외국인의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집중시키던 그 때, 메뉴를 읽을 수가 없어서 골라 낸 러우버(lẩu bò)가 세수대야 같은 큰 용기에 담겨 나오는 전골이란 것을 알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족히 3, 4인 분의 러우를 저 외국인이 어떻게 혼자 다 먹을 것인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내 등에 꽂히던 사람들의 눈길. 아마 그날 제가 흘린 땀방울의 절반은 구경거리가 된 당혹감이고 나머지 반은 그 자리를 어찌 벗어날까 하는 조바심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그 뿐일까요? 베트남어로 열심히 ‘메뉴’ 라는 단어를 공부하고 후배 주재원과 식사를 하며 그 맛에 만족해 호기롭게 추가 주문을 하겠다고 ‘특던(thực đơn)’을 외쳤을 때, 메뉴판이 아닌 계산서를 가져다주는 어린 웨이터의 순진무구한 미소를 마주하는 심정이란! 이 일은 후배 주재원과의 내기로 발전해서 ‘특던’할 때 진짜 메뉴판을 받아 드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했지만 두 세번 내기를 할 동안 어김없이 계산서를 받아 든 우리는 계면 쩍은 웃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 사이에는 절대로 메뉴만큼은 베트남어로 말하지 않는 불문율이 생겼습니다. 음식기행이 준 잊지 못할 실패의 기억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식당을 찾아 자신 있게 메뉴를 주문한 후 눈 앞에 놓인 음식이 사진과 다름을 확인할 때나, 음식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노력이 베트남어 실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음식 맛과 더불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했던 것은 그 가운데 이 도시를 알아가는 실력이 쬐끔씩 쬐끔씩 자라감을 느낄 수 있었던 탓입니다. 그건 나름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호찌민시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국적도 다양합니다. 그러니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음식문화를 기대해 볼만 합니다. 사이공은 그래서 음식문화에 있어서도 크로스오버 지역입니다. 동과 서가 교묘하고 적절하게 겹쳐서 어떤 것은 자기들의 본연을 지키고 어떤 면은 서로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거리음식이 서구의 플레이팅을 본 딴 고급스러운 베트남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전쟁통의 서민음식이 웰빙음식으로 선호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켠에서 거리음식은 거리음식으로, 서민음식은 서민음식으로서의 전통을 지켜 나갑니다. 외국음식도 다르지 않습니다. 호찌민시의 외국인 중에는 작으나마 자기 음식점을 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유럽인들 사이에 이런 일들은 흔합니다. 불과 대여섯 개의 탁자를 둔 프랑스식당, 이태리 음식점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장소들의 집결지가 타오디엔(Thảo Điền)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투득시로 편입된 2군 지역의 타오디엔은 음식기행을 할 최고의 장소입니다.

한 달에 한번이라도 시간을 내어 타오디엔의 골목들을 유유자적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작고 예쁜 가게들이 여기저기 아롱다롱 사탕처럼 박혀 있습니다. 들어가보면 어딘지 좀 거만해 보이는 유럽인 주인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다가옵니다. 얘길 나눠보면 또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즐기다 보면 이들과 우리가 이방의 어딘 가에 함께 머무는 인연이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라면 더욱 좋습니다.

본지에 소개되었던 ‘뚜벅이들을 위한 걷고 싶은 거리(통권 제323호)’를 뒤져보면 타오디엔 곳곳의 보석 같은 가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COVD-19 탓에 몇몇은 사라져 버렸지만요.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발견한 그 골목, 그 장소, 그 자리에 앉아 펼치는 음식기행이란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멋진 경험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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