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3,Tuesday

몽선생(夢先生)의 짜오칼럼 – 행복의 집

‘행복의 집(Nhà Hạnh Phúc)’이라는 곳이 호찌민시 한 구석에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 분을 통해 소개받은 시설입니다. 아이들을 돌보고 있지만 고아원도 아니고 정부로부터 인가된 시설도 아닙니다. 그 선교사 분은 제게 시설과 아이들을 돌보는 현지인 목사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 주셨지만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마치 계주를 하며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건네 주는 것처럼 저에게 넘겨준 것은 아닐까 했습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저와 이 시설과의 관계가 햇수로 사 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행복의 집이라고 불리는 이 시설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첫 인상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개발로 밀려가는 임시거처와 같은 가시설 내에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흙탕물이 튈까 조심하며 고인 물 가운데 놓인 돌을 디딤대 삼아가며 찾아가야 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시설을 밀어낸 아파트단지의 이름도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행복이라는 포장지로 싸여 있는 곳이었다고 표현한다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낯선 이방인을 맞아 주었던 이 곳의 아이들은 모든 결핍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지금도 변치 않는 그 모습이 저를 사 년째 이 곳에 묶어 두었던 힘의 정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시설을 행복의 집으로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번듯한 건물로 옮긴 지가 이년이 넘었습니다. 목사 부부가 보상으로 받은 택지와 교회의 지원, 그리고 몇몇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3층짜리 예쁜 집을 올렸습니다. 돈이 모자라 공사가 중단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 기간이 거의 삼 개월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선하게 마무리되어 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남자아이들은 또 그렇게 비록 공동이지만 자기들의 방을 가졌습니다. 이제야 말로 행복해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COVID-19사태가 터졌습니다. 아이들은 등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설에 보낼 수도 없어서 몇몇 가정과 지역교회에 분산되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급히 서둘러 섬기는 공동체 식구들과 더불어 아이들이 먹을 것과 생필품들을 챙기고 전달했던 기억이 선합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시설에는 십 오명 남짓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정으로 떠나간 아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처음 방문 때부터 눈에 익은 아이들이 있어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표정이 밝아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 들 중에는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도 있고, 결손가정 아이도, 저희가 눈 수술과 학자금을 지원해 준 아이도, 이웃에서 놀러 온 아이도 그리고 심지어 목사부부의 자녀도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구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화평했고 서로에게 예의가 있습니다. 이런 행복의 집에 제가 멘토링 하는 베트남 청년들을 연결한 것이 작년 초의 일입니다.

올해 어렵사리 기회를 만들어 청년들과 함께 행복의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COVID-19로 계획만큼 방문은 못했지만 청년들은 몇 달 동안 용돈을 쪼개 모은 후원금과 간식거리를 준비했습니다. 몇 차례의 방문으로 청년들과 익숙해진 아이들은 서로 쉽게 어울렸습니다. 아니,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을 청년들에게서 찾기 때문일런지도 모릅니다. 우리 청년들도 그런 아이들을 잘 받아들여 줍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청년들 중에는 결혼하여 자녀가 있는 멤버도 있는데 이제는 데려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던 큰 그림에 점차 다가서고 있는 느낌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행복의 집에서 청년들이 아이들과 더불어 정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기초는 ‘동정(同情)’이 아니라 ‘동감(同感)’입니다. 단지 그들이 가여워서가 아닙니다. 청년들이 아이들의 처지에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의 청년들 역시 행복의 집 아이들과 같은 어려움을 겪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로는 아이들이 청년들과의 관계를 통해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으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어려움을 겪어낸 선배들을 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두 모임을 연결하는 기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이들은 성장을 합니다. 이 자연스러운 진리가 행복의 집에 가장 큰 고민이 되겠지요. 물론 멈춰 있다면 방법은 있습니다. 규모 내에서 미래를 예측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이를 먹습니다. 그리고 불확실성은 ‘확실히’ 증가합니다. 교육에의 요구, 성장에 따른 신체적, 생리적 변화, 그리고 학교를 벗어나 사회로 안정적으로 편입될 수 있을까 하는 부분까지. 모든 일이 목사 부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겠지요. 이제 곧 누군가를 돌보는 일의 범주가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나게 될 테니까요. 행복의 집이 계속해서 행복할지에 대해 미지수가 생깁니다.
이것을 해결할 길의 하나가 사회적 연대입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이 두려운 것은 그 크기가 그릇을 벗어나 넘칠 때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크기를 키워야 합니다. 불확실성을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이 충분하면 위험도가 저하됩니다. 그런데 하나가 갖는 힘은 한계가 있으니 연대하여 체적을 키우는 것이 하나의 방법입니다. 사회적 구조 내에서 연대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지요. 청년 그룹과 그들을 연계하는 것, 속한 교회 공동체와 연대하도록 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기업이나 종교단체들이 연합하는 것도, 후원자나 결연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특히 기업의 CSR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 때에 미인가 기관에까지 그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키도록 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적합한 방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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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모임을 지켜보고, 수고한 청년들과 함께 한 식사 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며 한편으로 기쁜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움이 남아있습니다. 내 나라도 아닌 이방에서 어디까지가 내 역할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까지 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성장을 수용할 연대의 길을 열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까지 일지도요.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이런 고민은 아마도 제가 베트남에 머물러 있는 기간 동안 가져가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인 듯싶습니다. 바라기로는 행복의 집이 앞으로도 계속 환한 웃음을 되찾은 아이들로 채워진 진짜 행복의 집으로 남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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