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고전에서 길어 올린 ‘깊은 인생’- 몸으로 말하기

아주 긴 게으름을 피우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첫 문장의 시작이 여간 어렵지 않다. 첫 문장을 어렵다는 말로 시작했으니 이제 술술 쓰여질 것인가. 어줍잖은 칼럼을 끄적이며 쓰기가 힘드니 마니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이리 징징대는 것도 잘 쓰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문득 그 희망이 가엾다는 생각을 한다. 매일 쓰지 않고 영감을 바라는 시인처럼, 불상을 봤다고 그날 밤 꿈에서 몽중가피를 바라는 순진한 거사 같은 가여운 희망이다. 물경 읽지도 않고서 말이다. 이를 두고 헛물 켠다 하지 않던가.

말이 나온 김에 그저 잇는다. 주제 없이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연상에 따라 써내려 가는 글은 틀림없이 중언부언 할 테지만, 글의 전개를 이처럼 뜬금 없는 우연에 내맡기는 건 머리에서 정돈된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보이고 느끼는 대로 느끼는 몸의 언어이기로 가볍고 본능적인 내게 맞는 글쓰기라 여긴다. 예컨대 ‘읽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머리의 언어는 대번에 책을 떠올리겠지만, 몸의 언어는 ‘읽씹’을 연상하는 식이다. 천박하기까지한 몸의 언어는 사실 머리의 언어가 차마 이르지 못하는 곳에 우리를 닿게 한다. 어떤 언어나 상황이 주어지면 머리의 언어가 작동하기 전에 언어의 골짜기 저편에서 이미 번쩍하고 떠올려진 이미지가 몸의 언어다. 그것은 머리의 언어가 건드리지 못하는 저 깊은 곳을 건드린다. 수치와 저급함, 죄의식, 본능, 욕망, 충동을 일깨우는 것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런 언어의 혈흔을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기 싫어하지만, 머리의 언어만으로 논리정연하고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다.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의 말은 다 맞는 말인데, 옳은 말인데, 왠지 반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맞는 말을 머리의 언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를 몸의 언어로 말하면 머리의 언어는, 주는 것 없이 미운, 싸가지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싸가지를 싹수로 표현하면 다시 머리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언어는 얄궂다.

얄궂은 운명은 의외로 감동적이다. 수난을 겪지 않는 영화 주인공은 없고, 역설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얄궂은 몸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가 주지 못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잘 쓰여진 몸의 언어를 알고 있다. 그것은 신화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몸의 언어를 두른 인간군상들의 상징 체계다. 능욕하고, 폐륜을 저지르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반한다. 그런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인류의 숭배를 받으며 수천년 인류 사상의 고결한 신경체계를 이루며 오늘까지 전해진다. 그것은 진실에 진실하기 때문일 테다. 진실에 진실한 몸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일 테다. 진흙에서 피는 연꽃은 상투적 비유지만, 실로 저급한 감정의 언어에서 인류는 제 나아갈 길을 찾는다. 제 자리가 흉방凶方에 있기 때문에 길방吉方을 비칠 수 있는 천강성 처럼, 고통과 오물덩어리인 이 세상 예토濊土에서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잊지 않기에 우리 눈빛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과 같이.

그러나, 그렇지만, 그런데도 나는 늘 방황하고 불안하다. 인류를 지탱하는, 몸의 언어가 가리키는 방향과는 반대편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니 머지 않은 날, 후회할 테다. 머리로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도 머리로 말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진 않은가 말이다. 입으로 내뱉는 말 중 논리적 사유를 제일로 치고 있으면서도 같잖게도 몸의 언어로 대화하자는 유아적 자기 분리의 위선은 재수없다는 말을 들어도 반박할 수 없다. 그러니 물으나 마나한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내가 살아야 할 삶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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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만족할 줄 알게 된 나는 저 도저한 몸의 언어가 팔딱이는 저 곳을 애써 외면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내 책장이다. 세상에 넘쳐나는 생동의 언어를 죽은 사람이 쓴 책에서 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세계가 그들의 언어다. 그 세계의 한중간에 있으므로 그들은 책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 그렇다, 우리는 병들었다. 그들과 같이 생생한 세계를 움켜쥘 수 없다면, 머리로 사는 법 외에는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몸으로 산 사람들이 쓴 몸의 언어는 책 속에 있으므로 그리로 들어서야 한다.

몸으로 쓰여진 언어로 무장한 책은 내 삶을 그들의 방향으로 이끌고 나는 그 언저리에 닿아 비로소 몸으로 말하는 법을 자득하게 될 테다. 그때 알 수 있으리라, 머리로 말하는 시시함을.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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