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3,Tuesday

고전에서 길어 올린 ‘깊은 인생’- 베트남 Huu Lung, 진경 산수화 속으로 들어간 클라이머 (2부)

 

 

 

‘좋은 울음터다, 한바탕 울만 하구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호곡장론好哭場論을 말했으니 광활한 요동벌을 처음 마주쳤을 때였다. 베트남 Huu Lung 암벽을 맞닥뜨린 순간, 카르스트 지형의 노다지 암벽을 보고 세상 가장 행복한 클라이머가 되어 무릎 치며 말하게 된다. 좋은 놀이터다, 한바탕 놀만 하구나. 그곳은 여전히 개척의 손길을 기다리는 바위들이 여기저기 지천에 널려 손짓하는, ‘바위 하는’ 사람들의 천국이었다. 한 폭의 진경산수화 안으로 들어가 화선지에 없던 클라이머의 화룡점정, 번지는 먹이 되어 나타날 참이다.

user image

 

지금의 정신으로 들어선 베트남 후룽Huu Lung 암벽

새벽 3시에 일어나 06:10 호치민발 하노이행 비행기를 타고 08:30에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차로 두 시간을 달려 랑손Lang son 지역(우리나라의 ‘도’단위)에 진입하자 카르스트 지형이 우리를 감싼다. 지나는 길 곳곳에 클라이머들이 바위에 붙어있다. 알싸한 긴장과 약간의 설렘, 바위에 매달린 나를 상상하고 죽지 않으려 발산되는 아드레날린이 폭풍처럼 나를 휘감는다. 바위에 붙으면 바위만 생각한다, 눈 앞에 바위만 몰두하게 만드는 황홀한 지금의 정신으로 나는 들어간다.

이 지역에 클라이머를 위한 숙소는 Mao’s Homestay가 유일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위로 향한다. 이곳에는 10군데가 넘는 바위가 있고 100개 이상의 루트가 있다. 다양한 바위 중에 첫날 우리는 가장 유명한 Head wall을 올랐고 둘째 날 Dragon wall을 올랐다. 숙소에서 Head wall까지는 5분, 어프로치는 걸어서 3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숙소에서 점심을 바위까지 배달해 주신다. 오로지 바위 오름짓에만 몰두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져 있다.

 

비정상적으로 굵은 전완근을 가진 이들의 천국

Head wall 언저리에 이르자 마자, 낯선 이방인이 바위 밑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우리를 반기는 클라이머들, 국적은 모두 다르지만 비정상으로 굵은 전완근을 가진 그들이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인사를 마치고 재빨리 자일을 풀고 장비를 전열한다. 미끄러운듯 날카롭고 부드러운 듯 거친 석회암 특유의 질감이 새롭다. 오버행 뒤로 수직으로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벽과 종유석을 왔다갔다 하며 오르는 석회암 바위 재미가 쏠쏠하다. 최대 3피치까지 등반이 가능한 루트가 있다.

이곳 후룽Huu Lung 지역 대부분의 코스는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81년생 프랑스인 Jean Verly씨가 개척했다. 그는 바위에 미쳐 베트남 전역을 샅샅이 뒤져 찾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노다지 암벽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12년 전부터 개척을 시작했으나 여전히 미지의 암벽들이 산재散在해 있다. 그날 이 친구와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마침 우리가 오른 Head wall에 개척자 Jean Verly씨가 등반 중이었다. 우리는 바위를 개척해준 그가 고맙고 반가워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등급이 짜다, 홀드가 숨어서 보이질 않는다는 농담과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곳에 가끔 오는 Jean Verly씨의 프랑스 친구 패트릭이라는 사람이 주영 선배님의 친구였음을 알게 된다. What a small world! Jean Verly는 주영 선배님에게 패트릭에게 친한 한국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Mr. Chu를 아냐고 묻는다. 내가 바로 Chu라고 하자, 매드락의 Mr. Chu가 당신이냐고 되묻는다. 선배님이 허허 웃으시며 그렇다고 하니 Jean Verly는 화들짝 놀란다. 아이고, 몰라 뵀다며 선망어린 눈빛으로 바뀌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급 공손해진다. 다시 한번 알게 된다. 산악계는 좁다. 그러면서 12년 전 이곳을 발견한 일, 개척하며 어려웠던 일, 볼트 앵커링 방식의 제약 등 자신의 보스를 만난 듯 개척자 Jean Verly씨는 주영 선배님 앞에서 브리핑 모드로 전환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겨울에 다시 와 남은 바위들을 같이 개척하자, 내가 들어도 든든한 말들이 Jean Verly씨의 등을 쓰다듬는다. 우리는 그의 넓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응원했다.

 

전 세계 클라이머들이 하나 되어

저녁이 됐다. Mao’s House에 낮에 구석구석에서 등반하던 클라이머들이 모두 모였다. 네덜란드, 베트남, 호주, 싱가폴, 일본, 국적도 다양하다. 이 숙소의 좋은 점은 저녁을 따로 먹을 수 없다는 점인데 주인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저녁을 모두 같이 모여 한 시에 지정된 장소에서 먹어야 한다. 젊은 산악인들이 필연적으로 함께 저녁을 먹고 통성명이 시작되고 이야기 꽃이 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술이 빠질 수 없다.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K-POP 노래를 열창하며 하나가 된다. 주영 선배님의 기가 막힌 기타 연주가 어우러져 분위기는 고조되고 베트남 두 여성 클라이머들이 댄스까지 들고 나오니, 내일은 없다며 놀아재꼈다. 그 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등반 이야기를 하다 사람들이 주영 선배님의 정체를 알게 됐다. 기념사진 세례를 받으시고 요세미티 낭인일적 생활을 멋드러지게 꺼냈는데 살아있는 역사가 말하는 역사를 사람들은 배꼽을 잡아가며 들었다.

 

진경산수화 같은 풍광

다음 날 아침, 나는 후룽Huu Lung에서 진경眞景을 보았다. 아침나절 물안개가 카르스트 지형으로 우뚝 솟은 산과 산 사이를 휘돈다. 어제 내린 비로 호수가 불어 담담히 고인 모습이 늠름하다. 아침 맑은 숲 안에서 숨을 토한 뒤 입을 벌린다. ‘늑골 새새가 들뜨고 벌어지는 느낌이 들 만큼’ 공기를 깊이 들어 마신다. 쓰읍, 지구가 주는 선물이다. 전날 후룽Huu Lung 암벽지구의 Head Wall 구석구석을 돌며 바위를 올랐다. 간간히 내리는 빗줄기에도 비 한 방울 눌러 붙지 않는 마른 석회암을 올랐다. 말이 달리는 넓은 초원을 양손을 휘저으며 걸었고 몸을 비비며 바위와 바위 사이를 기어올랐다. 줄을 타고 오르며 저 멀리 있는 마을을 봤더랬다. 그리고 지금, 욱신 쑤시는 몸을 일으켜 어제 오른 바위를 바라본다. 진경산수화 같은 풍광,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갔고 머리가 엉클어졌다 가라앉는다. 살아 여기 있는 것이 기막힌 우연 같다. 잘 살고 못 살고 중요하지 않다. 명리도 실리도 산만큼 못하다. 살아있어 좋은 것이다. 한가한 아침이 얼마 만인가.

누군가 자신의 명리와도 바꾸고 싶은 것이 진경을 보는 한가함이라 했다. 문사가 부족해 이 아름다움을 놓고 해석하지 못하는 중에 문득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읊었던 시가 떠오른다. 연암은 중국 연경에 다다라 이 시를 썼다. 아마도 후룽Huu Lung과 같이 올록볼록 솟은 카르스트 지형과 산허리에 둘러진 구름을 보고 감탄하며 쓰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말을 탄 채 촉도난을 읊었더니만

오늘 아침 이내 몸은 진관에 드네

저녁 구름 푸르스름 어부수를 막았고

아침 숲은 시뻘겋게 조서산을 이었네

글자를 배운 것이 평생 후회로구나

명리를 줄 터이니 한가한 몸 못 바꿀까

 

-열하일기, ‘길에서’ (路上) 일부, 연암 박지원-

 

 

후회없이 오르고 남김없이 산다

둘째 날 등반을 이어간다. 오늘 Dragon wall이다. 물소가 느리게 풀을 뜯고 염소가 작은 워낭을 흔들며 노는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초원을 가로질러 5분 정도 걸어가면 멋진 동굴과 함께 잘생긴 바위가 떡하고 나타나는데 한 마리의 스테고사우루스처럼 늠름하다. 바위는 약간의 오버행으로 기울어졌지만 홀드가 좋아 모션이 크고 완력을 쓰고 오르는 재미가 있다. 저 멀리서 Mao’s House의 주인, Mao 아저씨가 초원 한 중간에서 노래를 부르며 점심 배달을 오신다. Mao 아저씨가 오니 동네 사람들도 죄다 모였다. 모두가 ‘저기를 왜 올라가나?’ 하는 의아한 눈빛과 이방인을 보는 신기함이 함께 묻어 있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 관중들의 측은한 눈빛을 응원삼아 바위를 올랐다. 주영 선배님은 별 다섯개를 주고 싶은 멋진 코스라 하시며 재용아, 니가 있어 이렇게 멋진 곳에 올 수 있었다며 내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다. 고마움은 오히려 나의 것인데 몸둘바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이 등반이 끝나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지금 맨 앞에 있다.

석회암 바위가 날카로웠던 모양이다. 정신없이 오를 때 몰랐던 상처가 집에 도착하니 그제야 아우성을 친다. 여기저기 피딱지가 너덜너덜하지만 얼굴은 연신 웃음이다. 여전히 내발은 착 달라붙었던 암벽화를 잊지못하는 듯 펑퍼짐한 운동화가 어색하다. 발조차 잊지못하는 바위라니. 1박2일의 꿈같은 등반으로 이제 한 달은 어떤 스트레스에도 거뜬할 테다. 다시 튼튼해진 전완근으로 삶을 움켜쥐리라.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