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고전에서 길어 올린 ‘깊은 인생’- 꿈을 현실을 데려오는 법 (다산에 기대어, feat 다산)

 

삶의 가치는 그것의 불모성에 의해 측정된다. 쓸모를 위해 살아있는 생명력을 소진하지만, 자신을 밥벌이에 번제하며 스스로 태운 땔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조지오 망가넬리(Georgio Manganelli)의 말처럼 ‘우리는 무익한 것에서 생명을 얻고 유익한 일을 하면서 탈진한다.’ 쓸모를 위해 삶을 태우지만 그럴수록 삶의 가치는 서서히 쪼그라들고, 졸아든 삶을 다시 세우기 위해 쓸모를 향해 돌진하는 역설의 맥놀이는 우리 모두가 빠져든 세상의 부비트랩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꼬리를 물어 삼키는 뱀의 아가리, 고대 신화의 우로보로스Ouroboros적 자기모순을 안고 무한으로 순환하는 세계의 비유처럼, 난감한 것이다. 반대되고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를 집어삼키며 암약하는 모순은, 늘 어거지로 살아서 너덜해진 우리 삶을 정확하게 겨냥해 조롱하는 것 같다.

이상은 무용하고 현실은 ‘가난’이다. 돈 없는 사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억만장자든 백만장자든 결핍으로 둘러싸였다면 그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는 법에 관해 약사여래 같은 처방은 없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잗다란 전환의 기회들은 있을지 모른다. 바뀔 수 있었던 운명, 벗어날 수 있었던 시시한 삶, 잡지 못한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늘 가지고 산다.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올 거라 믿으며 누군가 옜다 던져주는 선물이 있으리라 믿으며 기대하고 수정하고 철회하며 안주한다. 아마도 그 기회는 영혼의 촉수를 동원해야 잡을 수 있을 테다. 그 전환의 기회를 붙잡는다면 그것은 폭풍처럼 내 삶을 뒤덮을 것이다.

여기, 현실과 이상, 밥과 꿈의 화해를 자신의 삶 안에 녹여내고 쓸모와 불모 사이에 놓인 인생의 난감함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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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제일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미리 준비되어 있다면 최상이다. 그러나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노멀 루트다. 이 경로의존을 벗어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꿈 꿀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메타노이아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의 바람은 단순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죽는 것이었고 죽음이 곧 퇴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늘 증명과 경험의 누적을 요구하는 세상이 있는 한 전환에 성공하는 일은 요원할지 모른다. 이때 오지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에게 다산이 들려주는 메타노이아는 간명하다. 초짜 시절과 같은 시초의 날들에 우리가 들어선다면, 이 오지의 첫 발에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200년 전 다산이 아들에게 하는 말을 새겨봄직 하다. 이것은 직업적 자유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네가 닭을 기르기로 했다니 좋은 일이다. 농서(農書)를 잘 읽어서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실험해 보되, 색깔과 종류별로 구별해 보고, 홰를 다르게 만들어 사육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 닭보다 더 살찌고 더 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읊어 보아라. 만약 이익만 보고 의리를 알지 못하고 기를 줄만 알고 취미는 모르는 채 부지런히 골몰하기만 하여 옆집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만 한다면 겨우 시골의 졸렬한 사람이나 하는 양계법이다. 기왕 닭을 기른다면 모름지기 백가의 책 속에서 닭에 관한 글들을 베껴 모아 차례를 매겨 계경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다산은 닭이라는 오지로 들어선 아들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이 닭은 누군가에겐 작가고, 소설가며 미술가고 산악인이자, 자동차 정비공이고 또 무수히 많은 사회의 첫 발일 테다. 다산의 ‘닭’은 그 사람이 들어선 새로운 길이다. 그래서 닭을 각자가 처한 ‘닭’으로 바꾸어도 다산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어서 다산은 말한다. 각자의 오지를 휘분류취 彙分類聚 하라. 자료를 모아 분류한 다음 종류에 따라 다시 한데 묶어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정보를 갈래별로 나누면 비로소 흩어진 정보들이 하나의 방향을 지시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휘분이다. 갈래별로 쪼개어 나눈 정보는 다시 큰 묶음으로 모아 하나의 질서 속에 편입시켜야 한다. 계통이 서서 구획이 나누어진 전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것이 유취다.’ 일상에 녹아들 쓸모는 휘분하고 삶에 자양분이 될 불모는 유취하라.

어쩌면 직업 창조는 일과 취미가 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산의 휘분유취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아주 잘하게 되어 그 일로 밥을 먹고, 그 일로 나날이 정신적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 밥과 존재를 일치시키는 것, 닭을 키우되 닭이 경제적 수단만이 아니라 닭의 정경을 관조하고 그 정경을 읊고, 그 일을 즐기게 되는 차원에 이르는 것, 그것이 삶의 골수가 되고 그때 일은 밥벌이를 넘어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되어 무르익는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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