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8,Thursday

골프 칼럼 – 골프 에티켓, 어디까지인가?

골프를 시작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골프장에 서면 그리 익숙지가 않습니다. 가깝게 느껴지긴 하는데 뭔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있습니다.

테니스나 수영 등 여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장에 들어서면 포근하다고 하는데, 골프장은 좀 다른 느낌을 갖게 합니다. 물론 정겹긴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구장의 멋진 모습을 다시 대하는 것이 늘 반갑긴 하지만, 절대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골프 필드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위대한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골프장에서는 마음가짐도 행동도 조심스러워집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호떡집 주인도 골프장에서만큼은 그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옷 갈아입는 락커룸에서는 그야말로 귀가 따가울 정도로 떠들어대는 현지인들도 정작 필드에서는 조심스런 입놀림을 보입니다.

골프장에서 소리를 지르는 유일한 경우는 공이 사람 있는 곳으로 날아갈 때뿐입니다. 힘차게 맞은 공이 심한 슬라이스를 내며 남의 페어웨이를 침범할 때 캐디들이 목을 높여 뽈올! 을 외칩니다. 이 경우 골프가 시작된 영국에서는 군대에서 포병들이 쓰던 용어인 “포어”를 외친다는데, 우리는 그냥 뽈올! 이라고 외칩니다. 사실 그 소리도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먼저 샷하고 맥 놓고 딴청을 하던 동반자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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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골프장에서는 과다한 소리나 행동은 금기사항이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에티켓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스윙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조신한 행동이 하나의 규범으로 등장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게 됩니다. 당연한 에티켓을 자신의 특별한 기준에 맞는 규범으로 요구하는 동반자를 만나면 모든 행동을 새삼스럽게 돌아봐야 하고, 남의 눈치도 봐야 하는 묘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어떤 이는 아예 시작하기 전에 동반자를 모아놓고 장황하게 골프 에티켓에 대한 강의를 합니다. 이런 행동이 자칫하다가는 동반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남의 행동을 관리 할 권리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즐기자고 하는 골프인데 골프의 에티켓이 인간관계를 잡아먹는 상황이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조용히 한다고 해도 넓은 야외에서 하는 게임인데 실내 독서실 같은 정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하긴 실내 독서실에서도 조용히 걷기도 하는데 그런 분들이 요구하는 정적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여하의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렇게 좀 유난스럽다 싶은 특급 에티켓을 요구하는 동반자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 번 볼까요? 가장 먼저 타인의 스윙을 외면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샷만 하고 타인이 스윙 할 때는 지켜보는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먼 산이나 바라보게 됩니다. 티샷을 할 때도 자신의 샷이 끝나면 냉큼 그 자리를 떠나 카트에 앉아 딴 짓을 합니다. 그 친구 샷을 바라보고 숨을 죽이는 게 피곤하니 멀리 떨어져 관심을 안 두는 겁니다. 또 그 근처에서 남아있다가 무심코 다른 동반자와 대화를 하다가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아예 멀리 떨어져 있게 됩니다. 자연히 동반자와의 대화도 적어집니다. 공개된 대화는 사라지고 카트를 함께 탄 동료와의 대화만 간신히 숨을 숩니다. 편 가르기가 됩니다. 라운드의 유쾌함은 소리 없이 소멸되고 무거운 공기가 필드를 덮습니다.  

아마도 그런 요구를 하는 양반도 나름대로 불편함이 있겠지만 그 양반은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골프를 잘 치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긴 골프도 못 치는 주제에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겠지요. 아무튼 대부분 이런 분이 공을 잘 칩니다.  

“그 양반 골프는 잘 치지……” 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공은 잘 쳐서 스코어는 좋은데, 하고 그 후에 진짜 평판이 나옵니다. 바로 그게 골퍼로서 세간의 평가입니다.

공을 잘 치는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공은 잘 치는데 너무 느려, 공은 잘 치는데 좀 구려, 투명하지 않아. 뭐 이런 소리가 뒤를 이으면 결국 공을 잘 친다는 소리가 아닌 듯합니다. 공은 잘 치는 데, 공을 제대로 치는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나 봅니다.

골프 에티켓은 나만 지장을 안 받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동반자 모두 편안해야 합니다. 서로 적당히 양보해야 합니다. 상대에 불편을 주는 행동을 금하는 것은 타인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불편은 자기 기준이 아니라 동반자의 기준에 따른 불편입니다. 자신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요구가 동반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보기 플레이나 간신히 하는 아마골퍼에게는 모든 행동 수칙 역시 그 수준에 합당해야 합니다. 즐겁자고 하는 게임이라면 즐거울 정도의 에티켓이 필요합니다. 영국 왕실의 에티켓을 들이밀며 이게 원칙이야 하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골프 라운딩에서 최우선 규칙은 팀 룰입니다. PGA 규칙이나 클럽 규칙 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동반자끼리 합의한 팀 룰입니다. 에티켓 역시, 엉성한 아마추어 골퍼들이 이룬 팀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 정상입니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골프를 치고 나면 3명의 적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4명이 라운드를 돌고 나니 3명이 다 적이 된 것입니다. 평소에 못 보던 속마음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골프입니다. 그리고 그 은밀한 속마음을 동반자에 들키면 그를 뒤돌아 서게 만들지요. 평소에는 점잖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던 양반이 골프장에서 걸러지지 않은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는 저으기 당황하게 됩니다. “역시 사람은 함부로 평가하고 단정하는 게 아니야, 시간을 두고 볼 일이야” 하며 자신의 단견을 꾸짖으며 실망하게 됩니다. 골프 치고 나서 관계가 멀어지는 경향이 나온다면 아마도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심리적 갈등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시 그런 갈등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라운딩 후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양반은 공도 잘 치면서 매너도 훌륭해”하는 소리를 듣는 게 모든 골퍼의 로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진짜 로망에 그칩니다. 골프 잘 치는 사람치고 성질 좋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프로건 아마건 말입니다. 고수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고수란 바닥을 다 보인 사람이란 말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오늘 라운딩의 동반자가 뛰어난 고수다 싶으면 일단 그분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는 게 그날의 운을 망치지 않는 방법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수는 늘 외롭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즐기는 게 고수의 품격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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