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26,Sunday

슬로우 비디오

전국민 관심충만, 해피무비

흔히 슬로모션 하면, 주인공의 움직임이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 영화에서는 비장미 넘치는 액션이나 결정적인 장면을 더 멋있게 만드는 화룡점정의 기술로 알려져 있다. 새로 나온 영화 ‘슬로우 비디오’는 이 슬로모션의 속도 미학을 따뜻한 휴머니즘과 결합시킨 독특한 상상력의 영화다. 물론 그 결과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낙관적이긴 하지만. 주인공 여장부(차태현 분)는 움직이는 사물을 느리게 볼 수 있는 ‘동체시력’을 가진 채 태어났다. 이 독특한 능력 때문에 10살 이후부터 20년 가까이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 장부는 어렵사리 CCTV 관제센터 계약직으로 사회에 발을 딛는다. 동네 곳곳을 볼 수 있는 CCTV 안에는 오밀조밀한 동네 사람들의 삶이 들어가 있고, 그 안에는 그간 헤어졌던 수미(남상미 분)의 모습도 들어 있다.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다. 영화 ‘감시자들’에서 스릴러의 요소로 쓰였던 CCTV, 흔히 사람들을 감시하는 침투적인 시선을 가진 차가운 장치가 오히려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관찰의 도구로 바뀌다니. 장부는 동네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그들과의 교감을 꿈꾼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CCTV 영상과 장부가 있는 실제 공간이 부드럽게 접합되는 순간에 뻗어 나오는 마법 같은 훈훈한 온기다. 장부는 매일 밤 혼자서 야구를 하는 상만의 CCTV 화면 앞에서 공을 받아주는 포즈를 취한다. 어린 나이임에도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새벽 일찍 수레를 끌고 폐지를 줍는 어린 백구의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고 싶어 한다. 특히 아버지가 남겨주신 억대 빚에 쫓기는 수미의 경우,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세계 속에 뛰어들어가, 그녀와의 직접 접촉을 시도한다. 물론 ‘모래시계’류의 TV만 보고 자란 장부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수미에게도 꽃다발을 들고 교차로에 서서 고작해야 ‘꽃이 피어서 봄이 아니라, 네가 와서 봄이다’ 같은 닭살스러운 멘트를 내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태현은 그 모든 꺼끌꺼끌거리는 오글거림을 그의 인간성과 능청스러움, 코믹함과 순정으로 돌파한다.

결국 ‘본다. 느리게 본다’라는 영화의 숨겨진 주제는 삶 안에서도 어떤 느림이 미학이 돼, 천천히 장부와 수미의 로맨스도 안단테의 속도로 진행된다. 여기에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변변한 일자리를 못 얻어 관제센터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병수(오달수 분)가 가세한다. 소소한 시선을 통해 우리 읍내의 사람들, CCTV 속 사람들은 어쩌면 매일 자신이 주인공인 리얼 드라마를 찍고 있을지 모른다는 감독의 속마음이 함께 전해진다.

무슨 일인지 동네 지도를 상세히 그리는 장부. 장부는 수미의 얼굴을 그리고, 엄마가 다니는 목욕탕과 시장을 세밀하게 모사한다. 그림은 현실을 닮아가고 현실은 그림을 닮아가는 미장센들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장부의 숨겨진 사연과 맞물려진 복선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김영탁 감독은 자신의 바람대로 성선설이 가득한, 따뜻한 동화 한 편을 만들어 냈다. 너그러운 관객이라면 기꺼이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순도 100%의 이 착한 영화에 각박해진 마음을 기댈 수도 있겠지만, 한편 나같이 메마른 사람은 세상의 비정함이 과연 이 세계를 찢어 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을 지우기 어렵다. 서툰 진심과 유치한 낙관성의 어디쯤 영화 ‘슬로우 비디오’는 존재한다. 흔한 소재를 새롭게 보는 김영탁 감독의 아이디어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선에서.

슬로우 비디오

감독 : 김영탁
출연 : 차태현, 남상미, 오달수, 고창석
작성자 :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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