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28,Wednesday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베트남 10대 수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국가 베트남은 예로부터 강력한 수군(해군)을 보유하고 있어 수많은 외적의 침략에도 나라를 잘 보전할 수 있었다.이번 호에는 특별히 베트남 해전사를 참조하여 바다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는 베트남 민족의 10대 수전을 소개한다.

세계역사상으로도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vô tiền khoáng hậu) 배트남 수병의 용맹스러움은 이미 고대시대부터 널리 알려졌다. 비록 전투에서 패하기도 하지만 베트남 수병은 예로부터 세계최강, 중국과 몽골군, 프랑스 함대에 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7-1

QUỲNH CHÂU(琼州 海峡)전투

고대 HÙNG VƯƠNG시대

베트남 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베트남 민족은 이미 고대 Hùng왕 시대부터 수전에 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대 베트남 최초의 해전은 사서에 남아있지 않다. 다행히도 Hải Phòng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Văn Lang국 제 6대 훙왕(Hùng Vương thứ 6)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중국 해남 Quỳnh Châu섬에서 해적들이 수시로 해안에 출몰해 베트남 민족을 괴롭혔다. 당시 왕은 군사를 이끌고 가 하이퐁 일대, 항부어(Hang Vua;왕의 동굴이란 뜻)에 매복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훙왕은 적군을 맞이하여 통쾌한 대승을 거두었으며, 또 다시 적군의 본거지인 Quỳnh Châu섬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괴멸시켰다.

이후 중국해적들은 감히 베트남 영토를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베트남 수병은 단지 강이나 내륙 수로를 통해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인근 바다를 종횡무진 누비며 외적과 맞서 싸워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7-2

ĐIỂN TRIỆT호수 전투

546년 리남데 군대와 중국 양나라와의 수전

생즉사, 사즉생

Điển Triệt 호수(Vĩnh Phúc성, Lập Thạch현, Tứ Yên 마을) 일대는 6세기 Lý Nam Đế 왕 시절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지역이다. 중국 양조시대(nhà Lương;梁朝)시대 일어난 민중봉기 이후인 AD. 544년 Lý Bí Vạn Xuân이란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Lý Nam Đế라 칭하며 왕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하노이 부근 Tô Lịch강변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후 곧바로 중국 양나라가 Vạn Xuân국을 침략한다.

당시 양군은 545년 7월 하노이 홍강까지 밀고 들어와 리남데를 위협하자, 그는 Tô Lịch성을 버리고 Động Lão산으로 (Vĩnh Phúc성) 도주하고 만다. 이후 546년 마침내 전열을 가다듬어 딩(hồ Điển Triệt)호수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당시 리남대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Lô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적군이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는 호수부근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논밭에 진을 치고 항전을 펼친다.

결국 양나라 군대는 계속된 무모한 공격에 힘이 빠졌고 장군들도 싸울 의지가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어느날 밤 비가 많이 내려 강의 수위가 높아지자 흐르는 강물을 따라 호수로 급습하자 리남데는 양나라 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패하고 긴급히 Khuất Lão (Tam Nông, Phú Thọ) 동굴로 피신하고 만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배한 그는 자신의 부하Triệu Quang Phục에게로 권력이 이양하고 운명한다.


7-3

938년 BẠCH ĐẰNG 전투

베트남과 남한 간의 수전

중국지배 1천년의 종비부를 찍다!

밧당(白藤, Bach Dang) 전투는 중세 베트남이 아직 정식국호가 없었을 당시 응오귄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수군이 남한(Nam Hán;중국 5대 10국 가운데 하나)의 군대를 밧당 항에서 격파한 사건이다. 당시 결전의 날이 다가오자 응오 장군은, “남한의 수군은 강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사령관은 젖먹이에 불과하다. 또한 병사들은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상태기 때문에 아직 승산은 있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잠시 후 그는 병사들을 시켜 미리 날카로운 나무말뚝을 밧당강 하류에 박고 남한의 수군을 그곳으로 유인했다. 그의 계략대로 불과 몇 척의 작은 배들로 자신을 맞으러 나온 것을 보자 남한군은 가소롭다는 듯 그들을 쫓아 밧당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마침 만조라서 물도 불어났기에 남한군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응오 장군은 미리 밧당강에 뾰족한 쇠심이 달린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놓은 상황이었는데, 이윽고 물이 빠지자 말뚝으로 인해 남한군의 전함은 기동불능에 빠졌고, 응오의 군사들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틈타 작은 배들로 남한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이 격렬한 해전은 중국지배 1천 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베트남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다. 응오귄(吳權)은 이후 남한의 간섭을 뿌리치고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인 응오(吳) 왕조를 건립한다. 세간에서는 그를 일컬어 왕중왕으로 부르곤 한다


7-4

981년 BẠCH ĐẰNG 전투

LÊ ĐẠI HÀNH과 송군대간 전투

지략과 용맹으로 송군을 수장시키다

이 전투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웅은 지략과 용맹함으로 송나라 군대를 굴복시킨 레호앙(훗날의 레다이한)장군이다.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딘보린(Đinh Bộ Lĩnh)은 12 사군 시대를 종식 시키고 국가를 통일한 후 왕위에 올라, 국호를 다이꼬 비엣(Đại Cồ Việt)이라 했는데 이후 얼마 못되 그의 아들 또안이 6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는다. 당시 송나라의 태종이 이때를 놓칠 새라 총 공격을 감행하자 딘 왕조의 총사령관인 레호안(Lê Hoàn, 이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딘 왕조를 위협해 스스로 왕위에 올라Lê Đại Hành이라 칭한 후 띵레(Tiền Lê;전레-980~1009년)왕조를 창건한다.

송나라측은 광동, 광서 등에서 군대를 동원해 내륙공격을 감행, 수도 호아르(Hoa L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와 아울러 송나라 왕은 친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하지만 레호앙은 민병대과 연합해 결사항쟁의 의지로 맞섰다. 그는 밧당항을 침입한 수군과 랑선지방의 찌랑 요새에서 송나라 군사를 격파했다.(981년)

당시 그는 밧당어구에서 파도가 격렬하게 치는 가장 위험한 장소에 수군을 매복시킨 후 송나라 적군을 몰아 일거에 수장시킨다. 이후 레호안은 수 차례 사절을 파견, 결국 송나라는 986년 레호안을 정해절도사로, 993년에는 교지국 왕으로 봉했다.


7-5

1069년 NHẬT LỆ전투

ĐẠI VIỆT과 찜탄과의 수전

신출귀몰, 찜탄군함을 일거에 격파하다

찜탄(Chiêm Thành)국은 중세 참파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베트남 영토에 두 나라가 공존하며 살고 있었다. 찜탄은 베트남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만 송나라와 손을 잡고 베트남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리 왕조시대 Lý Thái Tông 왕과 Lý Thường Kiệt 장군은 5만여 군사를 이끌고 송나라와 손잡은 찜탄국을 징벌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리 장군은 수로를 통해 광빈성 Nhật Lệ (Quảng Bình)지역에 도착, 찜탄 수군을 일거에 격파한다. 찜탄 수군은 비록 수전에 능한 데다 대단히 용맹스러웠지만 리끼엣부대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 후 베트남은 퀴년성 Thị Nại (Quy Nhơn) 해구에도 수군을 보냈지만 당시 병력의 태반을 잃은 찜탄왕은 더 이상 베트남 영토를 침범하지 못했다.


7-6

1288년 BẠCH ĐẰNG전투

원나라와 다이베엣과의 전투

세계 최강 원나라가 무릎꿇다

1277년 원(Nguyên)나라 군대는 Đại Việt을 세번째로 침공한다. 하지만 베트남을 침범한 세계최강의 몽고군도 열대 베트남에서는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당시 장기전에 지친 몽골의 장군들은 전염병이 나도는 여름이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후퇴를 결심하고, 밧당(Bạch Đằng)강을 따라 내려간다. 바로 이 무렵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은 스스로 부대를 이끌고 호아(HOA) 강을 건너면서, “만일 몽골군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를 맹세케 했다. 그리고 밧당에 도착한 후 지난 날 응오귄(Ngô Quyền)의 책략을 이용했다. 즉, 해류가 만조가 되었을 때 밧당강을 따라 항해하던 몽골전함은 금새 나타났다가 후퇴하는 베트남 소형선박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대해 베트남 사가들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쩐흥다오의 배들이 나타나자, 몽골 사령관 Ô Mã Nhi의 함대는 그 뒤를 쫓았다. 몽골군이 매서운 공격을 시도하자, 때마침 간조 때가 되어 물이 빠져나갔고 몽골의 배들은 철기둥에 부딪혀 전복되었다. 1288년 4월 3일 Ô Mã Nhi를 포함한 수많은 군사들이 수장되었으며 100척의 몽골 전함은 모두 침몰했다.”

쩐흥다오장군은 이처럼 전쟁에서 수적으로 열악했던 상황에서도 절대 사람들의 지지를 잃은 적이 없었으며, 항상 적재적소에 맞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심지어 그는 필요한 상황이라면 마을이나 수도를 떠나 후퇴함으로써 막강한 적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상황이 호전되는 시점을 기다려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단호함은 병사들을 감동시켜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7-7

1643년 CẢNG EO전투

베트남수군과 유럽함대와 격돌

베트남 최초 유럽함대 격파

17세기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차이나 일대에서 야심을 드러내며 식민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Trịnh가의 가주는 이들과 결합, Nguyễn가의 가주를 몰아내고자 연합하여 중대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Gianh강(Quảng Bình성, 지금의 후에, Thuận An지역)에 정박중이었다.

이에 윙가의 Nguyễn Phúc Lan영주는 세자와 함께 50여척의 군선을 이끌고 속전속결로 De Wijdeness함선에 올라 Pieter Baek선장이 지휘하는 수군을 포위한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선장은 즉시 배를 폭파해버렸는데, 그 결과 배 안에 있던 윙가의 군사들과 함대의 선원 도합 200여명이 희생되었으며, 나머지 함대는 허겁지겁 달아나다 암초에 부딛혀 침몰, 총 7~8백명이 전사했다.


7-8

1785년 RẠCH GẦM – XOÀI MÚT 전투

따이성군과 씸족 & 윙 연합군간의 혈전

주변세력과 민심을 적절히 이용한 종합예술

윙후에(Nguyễn Huệ; 훗날의 광쭝황제)가 초창기, 베트남 최대의 농민운동인 따이선(Tây Sơn ; 西山) 봉기를 주도할 당시 전투다. 이 무렵 윙후에 군은 남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윙(Nguyễn;•阮)씨와 태국군과의 연합세력 5만여 명을 1785년 1월 19일 남부 띵양성, 랏검-쏘이이뭇(Rạch Gầm-Xoài Mút)에서 단 하루만에 격퇴(베트남 해전사상 전무후무한 사건)하여 그의 명성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차후 그는 잔존 세력들을 파죽지세로 격파하여 나라를 통일하고 광쭝황제로 즉위했다. 사가들은 이때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776년, 5만여 명의 군사를 태운 3백여 척의 군함은 윙안(Nguyễn Ánh)의 3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2갈래 길로 나뉘어 띵양성을 진격해 들어온다. 하지만 1785년 1월, 윙후에(Nguyễn Huệ)는 이 지역의 토착민들로 구성된 민병들과 긴밀한 협조하에 메콩강 일대 6~7km 사이구간인 랏 검(Rạch Gầm)에서 소아이뭇(Xoài Mút)지역에 기습공격을 감행할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다. 1785년 1월 19일,마침내 결전의 태양이 떠오르고, 윙-씸 연합군이 수로를 따라 올라오자 따이성 군은 기다렸다는 듯 집중 포격을 가한다. 태국군은 결국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퇴양난의 고립지경에 빠져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그나마 해변으로 기어 올라오는 적군을 매복한 따이성 군대가 전광석화처럼 섬멸하며, 이로 인해 윙가의 가주 윙안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태국으로 몸을 피해 달아나고 만다”

이처럼 전투를 시작한 지 단 하루만에 2만여 따이성 군대가 그보다 배 이상으로 많은 4만여 명의 씸군과 수천 명의 윙안부대를 수장시켰다는 것은 세계 해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투이다.
후대 사가들은 이 전투에 대해 베트남이 최초로 유럽식 함대와 맞붙어 이긴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7-9

1801년 THỊ NẠI 대전

따이선함대와 윙 군함간의 전투

베트남 적벽대전

1800년, 따이선가(nhà Tây Sơn)와 윙(chúa Nguyễn)가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방어선인 Quy Nhơn성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따이성 가의 장군이 이끄는3대의 거대한 Định Quốc 함대(따이성 군대 속속)는 어마어마한 양의 대포를 장착한 채 2천여척의 군함을 대동하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한편 윙가의 윙안(Nguyễn Ánh) 장군은 Thị Nại어구에서 적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바다가 고요할 때 화력을 총동원하여 적군을 일거에 박살내기로 전술을 짜고 어구에 수많은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Định Quốc 함대는 윙가의 60척의 군함에 둘러쌓여 대패하고 만다. 당시 윙가의 전투함들은 종횡무진 쾌속 질주해 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전투 후 윙안은 승승장구, 전국을 통일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사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Thị Nại전투는 동한 말기 적벽(Xích Bích)대전에 필적하는 전쟁으로, 국내 양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엄청난 대군을 투입해 치른 엄청난 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쟁으로 따이성가는 급속히 쇠락하고 만다.


7-10

1861년 NHẬT TẢO전투

베트남과 프랑스간의 수전

프랑스 함대, 간담이 서늘!

프랑스 식민시절인 1861년 프랑스군은NAM Kỳ지역을 공략중이었다. 그해 6월 23일 프랑스 군은 Gò Công (Tiền Giang)지역을 점령한 후, Espérance함선을 Nhật Tảo강변에 정박시킨다. 당시 이 군함은 화포 등 다양한 무기를 장착한, 강력한 함대였다. 하지만 당시 윙가의 Nguyễn Trung Trực 장군은 이 전투함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12월 10일, 마침내 그는 150여명의 군사를 여러 작은 배에 나누어 싣고 결혼식을 하러 가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리고 적군이 방심한 틈을 타 순찰중이던 이 배를 급습해 37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침략군의 상징이었던 화포를 불태운다. 당시 후에성에서 이 소식을 들은 Tự Đức왕은 조서를 내려 이들의 공을 치하했으며, 이후 승전보는 베트남 전국으로 급속히 펴져나갔다.

지난 938년 응오귄(Ngô Quyền) 장군이 밧당(Bạch Đằng)강에서 중국의 신흥강국 남한(Nam Hán)을 무찌르고, 1288년 쩡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이 원나라 군대를 대파했듯 베트남 수군의 용맹성은 세계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지금도 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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