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보는 법을 연습하는 중

출근길, 차창 밖으로 슝슝 지나가는 오토바이 행렬을 봅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각양각색입니다. 매일 보는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흥미롭습니다. 같은 일터의 파트너인 듯, 앞 사람은 오토바이를 몰고 뒷사람은 공구가 든 바케스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갑니다. 절묘한 자리 배치로 네 명의 식구가 편안하게 올라탄 오토바이, 짧은 치마를 오토바이용 보자기로 감싼 예쁜 아가씨, 한치의 햇살도 허용하지 않으려 팔 토시와 긴 장갑에 귀까지 덮이는 마스크를 한 사람, 회사의 로고가 크게 박힌 빛 바랜 티를 입고 달리는 아저씨. 각자 자기 나름의 장소로 자기만의 속도를 내며 달립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문득, 이 장면을 조금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가상의 드론을 띄워봅니다. 각각의 특별한 사람들이 올라탄 오토바이는 긴 오토바이 행렬이 되네요. 그 행렬 속에 엉킨 차들도 거대한 오토바이 무리에 빨려 듭니다. 빠르게 달리던 오토바이들이 행렬 속에 묻히니 천천히 흐르는 거대한 흐름이 됩니다. 제가 탄 차도 그 흐름에 녹아 도저하게 흐릅니다. 이렇게 보니 아까 봤던 오토바이 위에서 각자로 가던 사람들의 특별함은 사라지고 흐른다는 사실만 남는 것 같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면 차가운 물이 발등을 간지럽힙니다. 발 사이로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무 느낌 없이 보면 그저 강이지만, 발을 담그면 강을 이루며 지나는 물방울을 느낍니다. 드론을 띄워 내 사는 모습을 보면 그저 산다는 사실만 남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 기쁨, 괴로움, 슬픔, 환호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사는 동안 느끼는 감정은 매순간 의미가 있겠지요. 물방울처럼요. 분명, 내 발가락 사이를 지나가고, 내 인생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건 나만 아는 일들입니다.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이지요. 그런 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한 사람의 인생은 바로 그런 것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을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꽃처럼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새처럼 지그시 눈을 뜨고 가만히 세상을 그저 봅니다.

시선을 위로 보냈다가, 아래로 갔다가, 무리에 섞였다가, 홀로 보다가, 보는 법을 넓히면 흥미롭습니다. 시선으로 얻어지는 관점은 다양합니다. 나중에는 가끔 도로에 출현하는 개구리 눈으로 세상을 봤다가 진도에서 베트남까지 와서 고생하는 우리 집 황진이(누런 진돗개) 시선으로도 세상을 읽어보고 싶네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아서 흥분됩니다. 개로 빙의해야 하는 어렵디 어려운 절차가 있지만요. 상대의 세계로 완전히 이입하며 들어가는 시선 바꾸기, 보는 법을 연습하는 일은 어쩌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지름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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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때 전혀 느껴지 못했던 초라함이 베트남에선 수시로 느껴집니다.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어딜 가든 불안이 따라옵니다. 낯설다는 건 흥분을 주기도 하지만 불편과 불안을 몸에 베이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별 생각없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베트남에선 도무지 어려워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리도 어둡고, 길 건너기도 어렵고, 통장을 만들거나 휴대폰 데이터를 충전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버스 타기도 언감생심입니다. 하나 하나 천천히 알아가며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씩 배우다 보면 가끔 나에게 없던 시선 하나가 생기는 걸 느낍니다. 낯선 곳에서 살아본 경험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새로운 시선 하나씩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베트남 시선이 내 눈에 얹히게 되면 베트남을 사랑하게 될까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I am learning to see(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합니다. 릴케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생각하며 한가한 토요일 오후에 릴케의 말을 곱씹으며 썼습니다. 해가 졌네요. 이제 황진이와 산책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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