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December 4,Wednesday

흥미로운 골프 이야기 태양의 결투 (Duel in the Sun)

DUEL IN THE SUN, 백주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알려진 영화로 1944년 그레고리 팩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심리 멜로물의 서부영화 제목입니다. 하지만 골프계에서의 DUEL IN THE SUN은 태양의 결투라는 번역으로, 1977년의 스코틀랜드 턴 베리 골프 코스에서 열린 디 오픈(THE OPEN) 마지막 날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의미합니다. 과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거창한 이름이 붙게 되었네요?

46년 전 그곳으로 달려가 봅니다.

때는 1977년 7월, 스코틀랜드 서쪽 바닷가에 돌며 만들어진 링크스 코스인 턴 베리(Turnberry)골프장. 그야말로 바닷가 자연 그대로의 골프장입니다. 골프장 한가운데 등대를 세워 자신만의 특색을 만들어 낸 100년 된 고전 골프장에서 105회 디 오픈이 열렸습니다. 작렬하는 7월 여름의 태양 아래 출전 선수들은 무더위와 싸우고 있고, 그들의 게임을 보기 위해 구름같이 갤러리가 모였습니다. 아마 스코틀랜드 주민이 다 모인 듯합니다. 그 가운데 당시 골프계를 흔드는 두 선수가 뜨거운 태양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검승부를 겨루고 있었습니다.

1949년생으로 당시 28세의 한창 떠오르는 프로 6년 차의 톰 왓슨과 1940년생인 37세의 당시로는 미국골프의 대표주자인 잭 니콜라스입니다. 그날은 영국날씨 답지 않게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에 뜨거운 태양이 선수들 머리 위를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멀리 대서양을 건너온 두 명의 미국인이 디 오픈의 주인공이 되어 마지막 날 정면 대결을 펼치고 있습니다. 용호상박의 대결을 벌이고 있던 두 선수는 3라운드 결과 68-70-65 똑같은 타수인 7언더파로 총 203타를 치면서 공동 선두에 나섰습니다. 전체 타수는 같아도 3일 동안 매일 같은 타수를 기록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마지막 날 마지막 조로 승부를 겨루게 됩니다. 골프장에 모인 구름 갤러리들은 두 미국 선수가 마치 쌍둥이같이 스코어를 만들며 경기를 펼치는 모습에 넋을 빼고 샷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식을 내뿜으며 반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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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라운드, 첫 홀부터 잭이 먼저 치고 나가면서 연속 버디를 기록하며 4홀 째에 3타차로 훌쩍 톰을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아, 어린 톰 왓슨은 이런 큰 경기를 견디지 못하는가 하는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옵니다. 하지만 젊은 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나의 차례라는 듯이 톰 역시 내리 3홀을 버디로 이어가며 다시 동타를 만듭니다. 골프 신이 만든 시나리오는 너무 익사이팅하여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갤러리가 뿜어내는 열기를 받아 더욱 뜨겁게 타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9번 홀에 다다랐습니다. 톰이 9번 홀에서 보기를 하면서 한 타 차로 벌어지더니 12번 홀에서 잭이 버디를 만들어 잭이 다시 2타차를 앞서갑니다. 하지만 톰 역시 13번 홀과 15번 홀에서 버디를 만들면서 두 사람은 또다시 동타가 됩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사람의 박빙의 경주에 갤러리들은 환호합니다. 이제 고작 2홀을 남겨두고 17번 홀 티그라운드에 섭니다. 4일 동안 70홀을 돌면서 두 선수는 4일 내내 똑같은 점수를 내고 있었고, 이제 남은 두 홀로 승부가 결정됩니다.
파5의 17번 홀에서 잭 니콜라스는 3타 째 그린에 올려 홀 컵 1.2미터에 볼을 올려놓고 버디를 예약합니다. 젊은 톰 왓슨은 젊은 패기 답게 세컨 샷으로 그린에 공을 올려놓고 이글을 노립니다. 이글을 노린 톰 왓슨의 볼이 홀 컵을 비켜나갔고, 탭인 버디를 기록합니다. 이제 잭의 1.2미터 퍼팅이 남았습니다. 또다시 동타로 마지막 홀을 갈 것이라 예상했으나 긴장 탓이었을까, 잭은 수천 번은 했을 법한 그 짧은 퍼트를 놓치며 통한의 파를 기록합니다. 마지막 한 홀을 남겨놓고 톰이 한 타를 앞섭니다. 이 짧은 퍼트 미스가 골프 역사를 바꿀 것 같은 느낌이 스며듭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지막 18홀에서 먼저 티샷을 하는 톰은 드라이버 대신 2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날려 좁은 페어웨이 중앙을 차지합니다. 18홀에서는 늘 드라이버를 잡지 않던 잭이 한 타가 뒤진 마지막 홀에서 과감한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드라이버를 침착하게 빼냅니다. 그렇게 고심 끝에 뽑은 드라이버 샷이 심한 굴곡을 그리며 우측 깊은 러프에 빠집니다. 신은 잭에게 등을 보이는 듯합니다. 반면 페어웨이를 점령한 톰이 먼저 7번 아이언으로 핀 60센티 근처에 볼을 올려놓습니다. 환호하는 갤러리. 모두 톰의 승리를 예감합니다.
덤불 속 러프에 떨어진 볼을 찾은 잭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페어웨이로 레이 업을 할 것인지, 무리이긴 하지만 그린을 바로 노릴 것인지 고뇌에 빠진 잭에게 수많은 갤러리는 응원의 함성을 보냅니다. 그 응원에 힘을 받은 것인가? 고뇌 끝에 8번 아이언을 잡고 깊은 러프의 저항을 감수하며 날린 샷이 그린 왼편, 핀으로부터 11미터 떨어진 곳에 올라갑니다. 비록 먼 거리이긴 하지만 기적 같은 샷이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덤불 속 러프를 뚫은 잭의 집념이 공을 그린 위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한 타 앞선 톰의 볼은 핀 바로 옆에 자리하고, 한 타 뒤진 잭의 공은 저 멀리 그린 언덕에 위치합니다. 이미 승부가 난 듯하지만 정작 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린을 돌며 그린 라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봅니다. 일단 버디를 넣고 톰의 실수를 기다리자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버디 시도를 하기에는 너무 먼 길입니다. 잭은 예의의 허리를 깊게 숙여 둥근 등을 만든 어드레스로 과감하게 버디 퍼트를 보냅니다. 1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던진 잭의 공이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홀을 목표로 다가갑니다. 아, 이럴 수가! 그 먼 길을 달려온 볼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잭이 환호합니다. 와우! 수천의 갤러리의 함성에 뜨겁던 태양마저 흠칫 놀라는 모습입니다. 순간 카메라는 잔뜩 굳은 표정의 톰의 얼굴을 비칩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샷이 눈앞에서 연이어 벌어졌으니 표정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톰의 차례입니다.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비록 짧은 거리이긴 하지만 이 엄청난 부담을 극복해야 합니다. 왜 신은 이렇게 가혹한가요? 잭이 바로 전에 날린 두 개의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샷을 허락한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심장이 요동칩니다. 손 마디마디 신경이 모두 곤두섭니다. 무심한 바닷바람이 톰의 긴 머리칼을 날립니다. 뜨거운 스코틀랜드 태양이 작열하는 턴 베리 18홀 푸른 그린, 그린을 빽빽하게 둘러 앉은 수 만의 갤러리와 온 세상의 방송 카메라가 응시하는 가운데, 하얀 공 하나가 길고 긴 승부를 결정하기 위해 넓은 그린 위에 외롭게 서 있습니다. 그를 향해 다가서는 톰, 홀까지 고작 3뼘밖에 안 되는 거리이지만 그곳을 마주하는 톰의 눈에는 천길만길입니다. “이 왕관의 무게를 기꺼이 감내하리라, 너무나 쉬운 퍼트잖아, 나는 잘할 수 있어.” 수 없는 자기 최면을 되뇌며 최후의 공을 마주합니다. 세상이 모두 정적 속으로 묻힙니다. 뜨겁던 태양도 숨을 멈춥니다. 요동치던 푸른 파도마저 순간 정지한 채 톰을 응시합니다. 어디선가 갤러리의 침 삼키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어옵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내가 울렁이는 가슴을 달래며 조심스럽게 퍼터를 내밉니다. 60센치를 가는 공은 굼벵이처럼 더디게 기어갑니다. 마침내 홀에 떨어지는 땡그랑 공 소리가 갤러리의 엄청난 함성 속에서도 뚜렷하게 사내의 귓전을 파고듭니다. 갤러리의 함성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드디어 이루었습니다. 기나긴 승부의 마침표는 이렇게 뜨거운 태양 아래 턴 베리 18홀 그린 위에 깊게 새겨졌습니다, 턴 베리의 골프 여신은 마지막 순간에 톰 왓슨을 택했습니다. 아마 신도 젊은 신사를 좋아하나 봅니다.
두 선수는 승부가 결정되자 서로 어깨동무 하고 그린을 걸어 나옵니다. 골프에서만 볼 수 있는 진정한 동반자의 모습입니다. 이 대결을 세상은 ‘DUEL IN THE SUN 태양의 결투라는 이름을 붙여주어 기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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