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0,Saturday

사랑의 이유

2003년 1월 [짜오베트남] 이라는 제호로 격 주간지 잡지를 만들어 낸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년 동안 292호를 무사히 발간했다.
2008년 제호를 < 씬짜오베트남>으로 바꾸고 새로운 출판사와 계약을 하는데 그때 그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들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글로 된 글이라 발행 전에 필요하다면 베트남어로 번역을 하여 그 내용을 반드시 확인하도록 하라는 말과 함께 주의 사항을 일러주는데, 그 주의 사항에 베트남의 모습이 보인다.
항상 고정적으로 나가는 칼럼들이나, 에디터 칼럼에는 반드시 써야 할 글의 주제는 없지만, 써서는 안될 것은 있다며, < 정치와 섹스> 얘기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는 친절한 조언을 들려주었다. 그 후 이 소심한 인간은 정치는 물론이고 섹스는 커녕 ‘사랑’을 주제로 한 글도 써보지 못했다. 그러다 이 글을 쓰면서 제목을 올리는데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설마 이 단어를 이유로 잘못된 글이라고 책망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고, 오늘은 일단 맛보기 사랑 얘기를 해보자.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나오는 필리아(사랑)에 대한 글을 보고 개인적으로 약간 비틀어 정리한 것이다.
(Philia, 한글 번역 책에는 ‘친애’라고 번역을 했고 영어로는 통상적으로 friendship 으로 번역하나 이 책에서는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이라는 정의에 무게를 실은 듯하다, 친구나 선후배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같이 함께 있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모든 존재, 즉 친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리스어로 친구라고 번역하는 필로스 philos 라는 별도의 단어가 존재하니 필리아를 사랑으로 번역하여 읽는 것이 이해가 쉽다는 느낌이다 )
그,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존재는 세가지 이유로 사랑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
“첫째, 나에게 유익한 것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랑할 만하고, 둘째는 즐거움과 쾌락을 이유로 사랑할 만하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대상인 그 자체가 좋기 때문에 사랑할 만한 하다” 라고 세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는 이 3가지 이유에 대응하는 3가지 사랑에 대하여 설명했다.
첫째로 꼽은 자신에게 유익한 사랑, 부산대학의 이왕주 교수는 철학의 개념을 영화의 이미지로 설명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사랑을 도구적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즉 상대가 부자거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거나 유명 가문의 자녀라던가 하는 이유로 사랑을 느낀다면 이것이 도구적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그 도구로서의 역할이 어떤 이유든지 사라진다면 그 사랑은 깨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경제적 부는 도산될 수도 있고, 특별한 재능은 갑자기 녹이 쓸 수 있고, 유명 가문은 한 순간에 몰락할 수도 있다. 이런 가변적인 이유로 시작된 사랑은 그 이유 만큼이나 역시 가볍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불붙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듯이 이미 제 기능을 읽은 도구적 사랑은 그저 따뜻한 봄날 양지에서 잠시 즐기던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리게 마련이다.

둘째, 즐거움을 주는 쾌락적 사랑이다. 상대의 외모, 성격, 취향 등이 맘에 들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해서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를 쾌락적 사랑이라 한다. 그러나 미추를 구분하는 시각은 주관적이긴 하지만 사람이 변화함에 따라 사랑의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감수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화무는 십일홍이라, 열흘 넘는 붉은 꽃이 없다고, 아무리 양귀비와 같은 미모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변화되고 그 변화는 사랑에 영향을 미치며 주로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가변적일 수 밖에 없는 애욕이나 기분에 좌우되는 쾌락적 사랑은 인간의 간사하고 변덕스러운 마음 만큼이나 항상 위태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쉽게 깨지기도 하고, 그 못지 않게 또 다른 사랑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사랑이 쾌락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젊은이들의 사랑은 그 치기 만큼이나 쉽게 헤어지고 만나고 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가 말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품성을 바탕으로 한 완전한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 그 존재 자체가 좋아서 이루어진 사랑을 말한다. 그는 이 사랑의 조건으로 善 과 德 그리고 유사성을 들었다.善이란, 마음에서는 착한 것이 善이듯이, 몸에는 건강이 善이고, 욕망에서는 절제가 善이다. 즉 사랑을 하기 위하여는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과 건강한 육체 그리고 욕망에 대한 적절한 절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善이 정신적 자세라면, 德이란 육체적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대한 잘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바로 이런 사랑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활동으로서의 德” 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으로 유사성, 두 사랑의 당사자가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지만 정신적으로는 선을, 행동으로는 덕을 추구하는 유사성도 있고 서로 그런 유사성을 인지함으로 상대에 대한 호감도를 발전시켜 결국 이상적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성이 많은 것이 좋다고 결코 완전한 같음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사랑의 당사자라고 해도 서로 완전히 같아진다는 것은 가능할 일도 아니지만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완전한 사랑에 모순이 된다. 하나 만으로는 사랑이 불가 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아닌가? 그러니 모든 차이를 제거한 완전한 동일성은 그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파국이라고 단언하며 완전한 사랑의 형태는 다름에서 출발하여 같음으로 향하는 길의 어느 지점 정도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라고 서술했다.


사실 4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진짜 흥미로운 소재로 참 재미없는 글을 썼구나 싶을 정도로 지루한 책이지만 3천 년전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그런 사랑에 대한 같은 고민을 하고 살았다는 것을 느끼니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류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의 기운이 솟아나는 듯하다.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의 사랑에 대한 명언으로 글을 마친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작성자 : 한 영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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