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5,Thursday

통일 베트남 더 깊이 알기 (3)

베트남 통일 이후, 하노이는 베트남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호찌민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노이 사람은 사상성이 강하여 경직되어 있고, 호찌민 사람은 개방성이 강하여 유연하다. 이러한 성향의 연유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노이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아서라고 말하고, 호찌민은 자본주의 국가인 프랑스,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시장경제를 표방한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으나 정확하지 않은 말이다.

우리는 통일 베트남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통일 이후, 남북 베트남의 진정한 통합 과정의 이해를 위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이 부분은 한반도 통일과 통합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특이한 공식이 하나 발견된다. 남쪽은 개방성과 유연성이 강하여 자유로워서 경제가 발달한 반면, 북쪽은 사상성이 강하여 민족성이 두드러지고 폐쇄적인 성향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는 원인은 1) 삶의 환경 2) 민족의 기원 3) 경제 유형 등이 주 요소들이다.
베트남의 하노이와 호찌민, 한반도의 평양과 서울,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영국의 에든버러(스코틀랜드)와 런던(잉글랜드), 미국의 북부와 남부 등이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과 평양이 바로 호찌민과 하노이다. 하노이를 평양과 베이징에, 호찌민은 서울과 상하이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베트남의 북쪽은 북방문화(중국, 몽골 등의 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남쪽은 남방문화(인도, 크메르, 말라야 등의 해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근, 현대에 들어서서 남쪽은 서구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도 했다.
고대 시대부터 북쪽 사람들은 민족성과 사상성이 강했다. 베트남의 통일 의지, 통일의 주도세력, 통일의 전 과정 속에서 이러한 민족성과 사상성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하노이가 공산주의 영향의 지역이라서가 아니라 삶의 환경, 민족의 기원, 경제 유형 등으로 인해 민족성과 사상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2014년 9월 18일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 투표(Scottish independence referendum 2014)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는 영국(특히, 잉글랜드)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스코틀랜드의 국민투표였다. 16세 이상의 모든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문항은 “스코틀랜드가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Should Scotland be an independent country?)”로 단순하게 제시되었다. 찬성 45%, 반대 55%로 부결되었지만, 이것은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와 통합 후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우리는 맬 깁슨이 주연으로 출연한 ‘브레이브 하트’라는 남쪽 잉글랜드와 북쪽 스코틀랜의 전쟁 영화를 잘 기억하고 있다. 1296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스코틀랜드의 존 1세를 폐위하고 스코틀랜드를 식민지화했다. 스코틀랜드는 극렬한 저항을 하는데, 이 독립해방군을 이끈 인물이 윌리암 윌리스이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스코틀랜드의 민족영웅 윌리암 윌리스의 자유를 향한 강인한 민족성과 사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에게 북한 사람은 모두 세뇌교육을 받아서 사상성이 강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세뇌교육의 영향도 있지만, 실제로 북한 지식층은 그 지역이 민족의 기원지이며,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수도가 있었고 한반도 역사에서 정신세계를 주도해 왔다는 의식이 강하다. 하노이가 또한 그러하다.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신라와 백제는 남방민족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고고학 학계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다. 아랍인, 인도인의 피가 신라, 백제 사람들에게 섞였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대조영은 왜 그렇게 신라의 나당연합을 반대하고 발해를 세웠는가? 국제 정세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신라, 절대로 당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쟁한 고구려.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어쩌면 나당연합의 신라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북쪽과 남쪽의 사상 문화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북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는 남북 베트남의 통일 이후, 진정한 통합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통합의 완성도를 높이며, 한반도 통일에 주는 혜안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013년 12월에 새터민(북한이탈주민) 학생들이 분단국 경험 차 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트남 통일과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이란 제목으로 강의한 후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지며 북한 청년대학생들의 한반도 역사와 문화 인식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랜 시간동안 고조선,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정치, 문화의 사상세계를 주도해 온 곳이 바로 북한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왜 수도를 남쪽의 한양으로 천도했는지에 대한 정치적 배경도 잘 알고 있었다. 남한 지도자들이 북한과 통일에 대한 논의하고 더 깊은 통합을 이야기 하려면 북한 지식층의 이러한 민족성, 사상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남북 베트남에 대한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식은 통일 이후 남북 베트남 주민의 삶의 통합에 대한 관점의 지평을 더욱 넓혀줄 것이다. 또한 한국인에게 통일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에서의 새로운 통찰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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