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rch 29,Friday

고정관념 깨기. 프랜시스 베이컨


작업실에서 책상을 정리하던 중에 예전에 배우던 베트남어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펼쳐본 책 속에는 고등학생 시절에 베트남어 작문 숙제로 썼던 글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갓 베트남어를 배울때라 문장으로 딱딱하게 쓰여있었습니다. 글의 주제는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쓰시오’ 와 ‘당신이 앞으로 미래에 하기로 결심한 일에 대해 쓰시오’ 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나는 디자이너이자 화가다
(중략)
한가할 때에는 주로 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내 작업실은 매우 깨끗하다.
그 곳엔 냉장고가 있다.
(중략)
나는 밤새거나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밤에서 아침으로 바뀌는 순간이 기쁘다.
아침이 오면 나는 잔다.
(중략)
그림을 그릴 때엔 펑크 음악을 듣는다.
종종 노래하기도 한다.
감정을 따라 즐기며 빠르게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림 속에 시간과 공간이 있다.
(중략)
매일 매일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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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게 2005년이니까 10년 전에 쓴 글 입니다. 이 글을 또 굳이 창피하지만 이곳에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원하는 것을 종이에 써놓으면 이루어진다는 어떤 책의 내용처럼 지금 그 때 썼던 글처럼 비슷하게 살고 있습니다.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작업실에는 갈망하던 냉장고가 있고, 냉장고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와 음식이 들어있고, 그 때에 비해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밤샘 작업하고 아침에 자고 …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때 ‘로또 1등 당첨’ 도 하나 써놓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리고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 부분을 지우고 수정하고 싶습니다. ‘매우 깨끗한 작업실’을 ‘여러 종류의 물감과 도구들을 마구 벌려놓고 바닥에는 흩뿌려진 물감 자국이 있는 그런 느낌 있는 작업실’로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화가는 작품도 유명하지만 작업실도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입니다. 한번도 청소하지 않았다고 전해질만큼 악명이 높은 그의 작업실에 관한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작업 인부들이 그의 그림을 짓밟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격분한 그는 작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합니다. 발 디딜 틈 없이 쓰레기더미로 가득한 작업실이 얼마나 너저분하고 지저분했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2002년에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갤러리에서 런던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옮겨왔다고 합니다. 갤러리에서 고용한 고고학자와 예술사가들이 그의 유품들을 분류하고 그 위치를 기록하며 작업실의 정밀 지도를 그리고, 30년 동안 그득히 쌓인 먼지까지도 수집해서 그대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베이컨의 그림 속에 인물들은 뒤틀려있거나 뭉개져 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무섭고 괴기스럽다고만 느껴졌었습니다. 특히 그림 속의 이빨이 보이게 벌려져 있는 입들은 소리가 들릴 것 같기도 하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그의 그림을 자꾸 보다 보니 나를 겁주려는 것이 아닌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뒤틀리고 뭉개진 얼굴들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없이 맞고 망가진 사람 또는 그처럼 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그림이랑 똑같이 생겨서요. 뭉개지고 뒤틀리지는 않았지만 그림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지저분한 작업실과 대비되게 옷을 잘 입고 있어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예전에는 겁이 나서 그의 화집을 보면 실눈을 뜬 채 재빨리 책장을 넘겨버리곤 했지만, 이제는 눈을 뜨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바로 ‘페인팅’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헉’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때때로 그림을 보며 받는 감정들이 글로 표현이 안될 때가 있는데 이 그림이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무명의 베이컨을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뉴욕 모마의 컬렉터는 이 작품이 세계적인 작품이라고 알아보았고 2년 후 이 작품은 뉴욕 모마에 소장됩니다.

사람을 조금만 뒤틀게 그리는 작가가 있으면 ‘베이컨의 영향을 받았나 보다’ 라고 생각이 들만큼 그의 화풍은 독창적이며 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몸의 구조들이 제대로 뒤틀려 있는 그의 그림을 보며 당연히 많이 배웠을꺼라(정규 미술 교육) 생각했었는데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나는 작품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뭔가를 ‘하려’ 하는 겁니다.” 라는 그의 말처럼 치열하게 캔버스와 물감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하던 그를 본받아 청소할 시간도 없이 열심히 작업에 매진하다 보면 어느새 제 작업실도 느낌 있는 작업실로 변해 있겠죠? 그 때 또 정리하다가 이 칼럼을 펼치게 되길 바라며 이번 칼럼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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