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GDP 100→4600달러 ‘도약’… 군경 1만3천명 퍼레이드로 자신감 과시
베트남이 오는 30일 베트남 전쟁 종전과 통일 50주년을 맞는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을 장악하고 20년 전쟁을 마감한 지 반세기가 흘렀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와 분단을 끝내고 통일국가가 된 베트남은 개혁개방으로 최빈국에서 중진국으로 성장했다. 더욱이 과거 전쟁 당사국이었던 미국, 한국과도 화해하며 ‘대나무 외교’를 통해 급성장했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재식민화를 시도한 프랑스와 ‘베트남 국부’ 호찌민(Ho Chi Minh)이 이끈 독립운동 세력 간 대결에서 비롯됐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한 후 베트남에서 물러났지만,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친서방 남베트남으로 분단됐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했다. 하지만 미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Viet Cong)의 게릴라전에 고전했고,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고조되면서 1973년 완전 철수했다. 결국 북베트남은 2년여 만에 남베트남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뤘다.
이 전쟁으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측은 80만 명 이상, 미군은 5만8000여 명, 남베트남군은 30만 명 이상, 민간인은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파병된 한국군도 5099명의 사망·실종자를 냈다.
통일 후 베트남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1978년 캄보디아, 1979년 중국과의 전쟁에 따른 국방비 부담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로 경제난에 빠졌다. ‘보트 피플’이라 불리는 난민이 수십만 명 발생했고, 상당수가 바다에서 숨졌다.
전환점은 1986년 ‘도이머이(Doi Moi·쇄신)’ 정책이었다. 개혁개방으로 외국 기업을 유치하며 베트남은 1990년대 이후 연 5~9%의 고도성장을 이루며 신흥공업국으로 떠올랐다.
화해와 실용주의 외교도 성장 동력이 됐다. 베트남은 전쟁 20년 만인 1995년 미국과 수교했고, 한국과도 1992년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현재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외국인 직접투자(FDI) 국가로, 누적 투자 규모는 약 874억 달러(약 126조원)에 달한다. 특히 삼성전자는 한때 베트남 전체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FDI 기업으로 성장했다.
베트남은 통일 50주년을 맞아 30일 호찌민에서 군·공안 병력 등 1만3000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를 실시한다. 수호이(Su)-30MK2 전투기와 미(Mi)-8, 미-17 헬기의 시범 비행도 예정됐다. 중국·라오스·캄보디아(Cambodia) 군대도 베트남 정부의 초청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한다.
하지만 기념일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상황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행정부가 마크 내퍼(Marc Knapper) 주베트남 대사 등 자국 외교관들에게 기념행사 불참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개발처(USAID) 폐지로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 지원, 불발탄 제거 등 전쟁 피해 지원 사업도 중단되는 상황이다.
이에 팜 투 항(Pham Thu Hang)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4월 30일 기념행사는 용서·평화·화해·치유를 기리며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정신을 되새기는 기회”라며 양국 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강조했다.
연합뉴스 2025.04.28